마천루도 기초가 튼튼해야
방송국에 첫발을 들여놓았을 때는 20대도 초반인 그야말로 열혈청년, 방송이 뭔지도 잘 모르면서 방송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패기 하나로 뛰여든 그 세월이였다.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른다."고 열정 하나로 용맹을 부린것이다.
생각해보면 원로님들의 사랑이 나를 방송인으로 성장하도록 이끌었다. CRI 조선어방송의 창시자들인 리련숙, 리성호 아나운서, 중국 조선어 번역계에서도 성망이 높은 박창식선생, 인생의 황혼길에도 여전히 변함없이 방송을 관심하고 아낌없는 지지와 편달을 주시는 윤봉현, 장원천 등 여러 선배님들…그런분들이 음으로 양으로 이끌어주시고 스승이 되여 인생을 가르치고 방송을 지도하고 앞길을 밝혀주었던것이다.
나는 방송을 사랑한다. 자신의 작품으로, 육성으로 청취자들과 교감하는 방송인, 나로서는 정말 직성에 딱 맞는 멋진 직업이 아닐수 없다. 그런 각오가 있었기에 방송에 도취되여 수십년 세월을 숨 가쁜줄 모르고 달려왔다.
조선어방송계의 원로이신 ≪방송통론≫의 저자 조선의 리상벽선생은 "방송의 성공 여부는 얼마만한 지식을 소유했는가에 있다."고 말씀하셨다. 조선중앙방송위원회와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직접 그분의 가르침을 받을 때는 그 말씀의 깊은 뜻을 다는 깨닫지 못했다. 방송인으로 수십년 달려온 오늘에 와서야 비로소 그 말씀에 탄복하기에 이르렀다.
방송을 갓 시작한 초창기에는 천부적인 목소리, 발음, 형상력, 방송의 끼 같은것으로 어지간히 해나갈수 있는것이다. 하지만 일정한 경륜이 쌓이면서 지식의 힘을 느끼게 된다. "방송인은 팔방미인"이라고도 한다. 즉 깊이에서는 차이가 있어도 방송인은 세상만사를 다 방송에 실어야 하기때문에 세상만사에 관심을 갖고 배워야 한다. 아는 소리를 하는것과 모르고 남의 말을 그냥 앵무새처럼 흉내나 내는것에는 엄연한 구별이 있다. 대중을 계도하는 역할을 하는 방송원은 앵무새가 되여서는 안된다.
"지식은 책속에 있다."고들 한다. 방송에 몸 담은 초창기 북경도서관의 조선과 한국의 도서(그때는 한국도서를 접하기가 무척 힘들었지만 다행히 북경도서관의 김국현선생이 몰래 한국도서를 내다가는 배움에 갈증을 느낀 나에게 열심히 제공하였다.)를 문학작품이든 인물전기든 닥치는대로 읽어내려갔다. 나는 책을 읽음에 있어서 전반 스토리보다 아름다운 구절구절에 더 매력을 느껴 좋은 말들이 나오면 그것을 필기장에 깨알처럼 메모해넣는 습관이 있었다. 그렇게 정리된 노트가 저그만치 열권이 넘었으니 내가 읽은 책도 어지간히는 많았으리라 생각한다. 그것이 후날 내가 방송작품을 쓰거나 생방송을 진행함에 있어서 "입을 벌리면 문장이 쏟아져나오는 경지"에 이르도록 한것이 아닐가싶다.
방송은 실천이 중요하다. 아무리 리론적으로 박식가라고 해도 실천경험이 없으면 관건적인 시각에 흔들리기마련이다. 그 시기 우리는 유감없는 방송인으로 성장하는 지름길로 목소리를 갈고 닦음과 동시에 다양한 쟝르의 방송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중국방송악단의 류서림중음가수를 스승으로 모시고 발성을 배웠고 윤봉현, 장원천 등 선배님들의 인도하에 방송극을 연습하고 시랑송을 하고 각종 실황방송을 연습했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것은 수도체육관에서 록음기를 들고 세계녀자배구선수권대회 실황중계리허설을 매일과 같이 하는것을 보고 옆좌석의 뻬루 중계방송원이 엄지손가락을 내밀며 힘을 주던 그 순간이다.
피타는 노력은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 실천속에서 각고의 노력으로 "고층빌딩"의 기초를 닦은 우리들을 지도부와 선배님들은 어여삐 봐주시고 조선어방송의 중임을 맡긴것이다.
비록 CCTV음력설야회와는 비할수 없지만 CRI 기타 언어 방송에 비해서 손색없는 신년특집프로와 중요한 기념일 방송의 집필과 사회를 수없이 해왔으며 정치, 경제, 문화, 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의 취재를 유감없이 소화하고, 특히 1990년 북경아시안게임을 계기로 개, 페회식은 물론 배구, 롱구 등 종목의 실황방송을 소화해내며 CRI 스포츠중계방송의 서막을 열기도 했다.
부지런한 영농인의 심정으로
부지런한 영농인의 손끝에서 풍성한 열매가 맺어진다. 방송도 부지런해야 그만한 결실을 맺게 된다. 방송인으로서 거창한 일이 자기에게 차례지길 기다릴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속에서 하나하나 착실히 일하며 부단히 축적을 해나가는것이 성장의 길이다. 이는 방송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있을수 없는 자세이다.
방송의 생명은 현장을 소리로 살려주는것이다. 20세기 80년대말 90년대 초반부터 취재에서 현장분위기를 살리기에 애를 썼다. 스포츠방송이 아니더라도 기타 파트너와 함께 북경 여러 농수산물시장, 백화점, 대관원공원, 백운사음력설절간장, 조선족설맞이모임, 북경세계녀성대회 등 수없이 많은 현장을 달리며 그것을 실황방송으로 록음, 제작하여 청취자들의 좋은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방송은 다양한 분야의 청취자들을 대상으로 한 대중전파매체이다. 그런것만큼 방송속에 그들의 목소리를 많이 담아야 한다. 수십년의 방송 생애에서 비록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당시는 서울시장) 등 명인들을 취재하는 영광도 누렸지만 그래도 명인들보다 보통사람들에게 마이크를 많이 돌렸고 필묵을 많이 들었다. 그런 인터뷰가 친근감을 주고 청취자들이 쉽게 받아들일수 있었던것이다.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한국의 유명가수 최진희와의 전화인터뷰, 영원한 스타 조용필취재, 조선의 인민배우 최용린취재, 서울 주재기자 시절 제주도 우도에서 선상에 함께 한 제주 해녀와의 인터뷰 등은 그들에게 가깝게 다가섰기에 그들이 보다 편한 마음으로 취재에 응해주었고 좋은 방송효과를 거둘수 있었던것이다.
스포츠를 사랑하는 나로서 지난 수십년간 스포츠취재에 많이 나선것은 큰 행운이였다. 북경세계배구선수권대회, 북경아시안게임, 부산아시안게임, 도하아시안게임, 천진세계탁구선수권대회, 한일월드컵, 할빈동계아시아안게임, 북경유니버시아드, 대구유니버시아드…수많은 스포츠 현장을 뛰면서 현장을 소리로 청취자들에게 보여주었고 또한 화면방송에 뒤지는 소리방송의 제한성때문에 청취자들이 흥미를 자아낼수 있는 선수들의 경기장외 이야기를 쓰기에 힘을 썼다. 한일월드컵 개막식날, 수천명의 세계 기자들의 초점인 개막식 현장보다 광화문에서 열광하는 한국 "붉은 악마"들의 모습을 여실하게 보여준다든지, 한일월드컵에서 한국이 4강 진출의 신화를 이루었을 때 한강변 잔디에서 귀여운 꼬마와 함께 축구공을 굴리는 행복한 한국 젊은 세대의 모습을 반영한 글 등은 경기현장 이상의 효과로 사색과 상상의 나래를 펼쳐주었다. 도하아시안게임에서는 경기소식과 경기성적을 적시적으로 전하는것은 물론 "망중한"의 스토리로 "취재일기"를 개척하여 소리방송에 "조미료"를 더해주었다. 한국의 경마선수 김형칠이 경기도중 불상사를 당한후의 한토막 일기―"렬사의 땅 도하도 선수의 죽음을 슬퍼하는가 장대비를 쏟아붓는다"는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구절이다. 그때의 글을 중국의 많은 매체들에서 련재하기도 했다.
방송에 입문한 수십년간, 생생한 정보를 해내외 청취자들에게 제1시간에 전하기 위해 열심히 필을 날렸고 소리를 전파에 담았다. 그것이 인정을 받아 국제방송상, 다양한 국가급상, 서울프라이즈 등 수많은 영예를 따내기도 하였다.
단순히 방송원으로서 마이크앞에만 선것이 아니라 방송취재에서부터, 집필, 국제방송의 주종목인 번역은 물론 마지막 제작까지, 송출을 제외한 모든 일들을 나는 직접 소화해냈다. 물론 전문화시대에 어느 한 분야를 뚜렷이 하는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CRI가 중국을 세계에 알리는 국제방송인것만큼 전문화된 "일인다역"이 더욱 필요한것이다. 물론 많은 방송인들이 이 길을 걷고있다. 앞으로도 우리 방송인들은 반드시 그렇게 성장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해외 특파 기자―방송인으로서의 업그레이드
CRI의 신임으로 2002년 3월 한국에 특파기자로 파견되여 2004년 7월까지 2년 더 되는 서울 특파기자 시절, 나는 방송인으로서 한층 더 성숙하였다. 방송국내에서 동료들과 함께 업무를 전개하던 나날과 독립적으로 해외에서 하는 특파기자 생활은 완전히 다른 환경, 다른 업무였다.
무슨 일을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가로부터 모든것은 자각에 따른다.
우선 출퇴근시간이 따로 정해지지 않았다는것이 특징이다. 숙소 겸 사무실인 한국지국 아빠트가 해외기자 생활의 보금자리요, 출근장소였다. 인터넷이 해외에서 정보를 접수하는 첫 경로라면 외신클럽에서의 정기적인 만남이나 청와대 비서실 혹은 여러 공관서나 사회단체들에서 외국기자들을 상대로 열리는 브리핑, 각종 행사 취재초청, 더 많이는 자신이 알아서 결정해야 할 취재거리, 정보의 바다속에 자신이 기사감을 선택, 집필해야 하는것은 기본이였다.
해외 특파기자는 단순히 소속 언어부만을 위해 일하는것이 아니라 CRI 전반을 위해 뛰여야 하며 전국의 여러 매체들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그러니 한국어보다 중국어 기사가 더 중요한것이다. 국제방송 신문에 정기적으로 중문기사를 실어야 하고 CRI 뉴스쎈터에 첫 시간대 뉴스를 전해야 한다. 신화사와도 선의의 경쟁을 해야 한다. 그러니 시시각각 한국 주류 매체의 보도에 눈과 귀를 기울여야 하고 다른 매체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소식을 전해야 한다. 여기서 정확하게 전해야 한다는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자본주의사회의 언론들은 나름대로의 자유와 국위를 지키는 언론인의 기본자세가 있다. 그들의 기사를 그대로 번역하다가는 큰 코를 다칠 때가 있다.
서울에 특파원으로 파견되여 첫 대형취재가 중국민항기의 부산국제공항추락사고 보도였다. CRI는 물론 CCTV, 북경텔레비죤방송, 상해 동방텔레비죤방송 등 많은 국내 매체들에서 첫 시간대 리포터를 요구해왔던것이다. 그것도 단순한 사고소식인것이 아니라 사고원인, 정부대책 등 상당히 세부적이고 원칙적인 문제를 요구하는 기사와 리포터였다. 현장에 가지 않고 한국 언론의 보도에만 따른다면 원칙적인 문제가 생길수 있다. 즉 중국민항기가 어떻게 추락됐나 하는 문제에서 한국의 매체들은 그 원인을 이상기후에 따른 중국민항기 조종사의 미숙한 운전으로 보았다. 물론 오늘날까지도 원만한 해결을 가져오지 못한 민항기추락사고지만 중국기자라면 여기서 한국 언론의 보도를 그대로 번역해서는 문제가 되는것이다. 반드시 이상기후에 인한 가시거리문제, 지면지휘소와의 련락두절 등 객관상황을 정확하게 보도하되 서둘러 상세한 보도를 피해야 하는것이 원칙이다. 사고원인은 전문가들이 검증을 거쳐야 하는것이니 기자가 나름대로 밝힐 분야가 아니다. 사고발생후 량국 해당 부문의 발 빠른 조치, 구조작업 같은것은 상세한 보도가 가능한것이다.
서울 특파기자 시절, 많은 기사중에도 중요한 사건에 직면하여 서울과 북경 본사와의 대담식심층보도 혹은 평론을 진행했다는것은 소리가 생명인 방송에서 한낱 개척이라고 생각된다.
특파기자로서 문자로 전하는것은 그런대로 할수 있는데 더 힘든것은 중문으로 된 리포터이다. 방송사업에 몸 담은지 수십년 세월, 조선어로 글을 쓰고 조선어로 방송하는것을 업으로 했던 나에게 있어서 중문으로 글을 쓰고 중국어로 리포터를 한다는것은 도약이며 도전이였다. 그것을 해낼수 있은것은 사명감에서였다고 본다. 그때 쓴 글들이 지금도 중문검색 사이트에 들어가면 백편을 훨씬 넘는다. 이런 기사들을 CRI는 물론 중국의 여러 매체들에서 게재를 했다는것은 참으로 가슴 뿌듯한 일이다.
청취자, 방송존재의 리유
상계에서는 고객을 "왕"이라 한다. 방송에서는 청취자를 "왕"으로 모셔야 한다. 청취자가 없는 방송은 존재의 리유도 없다.
지금 우리는 청취자군체통계에서 청취자 편지 한통을 청취자군체 50명으로 설정한다. 10통이면 5백명으로, 백통이면 5천명으로, 천통이면 5만명으로 청취자군체를 통계한다. CRI 조선어방송 청취자 래신 황금기인 지난세기 1950~1960년대는 매달 조선으로부터 받는 청취자들의 편지만도 5천통을 헤아렸다고 한다. 그러니 그때 조선어방송의 청취자군체는 얼마나 막강했는가!
오늘날과 같은 멀티미디어시대, 특히 인터넷이 발달한 상황에서 방송 청취자군체에 변화가 생기고 청취습관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그럴수록 방송은 청취자들의 구미에 맞게 꾸려나가야 생존해간다.
멀티미디어가 어떻게 다양하게 발전하든지 방송의 생존공간은 여전히 존재하는것이다. 특히 전문 해외방송을 청취하는 단파클럽이 세계에는 그 수를 헤아릴수 없을 정도다. 그 영향으로 국내 방송청취자클럽과의 교류도 활발히 진행되는 상황이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청취자들이 듣고싶어하는 "소재"를 선택하고 "들을 맛" 있게 제작하는가에 달렸다.
우리 방송의 청취자들의 반향을 들어보면 중국에 대해 알고싶어서, 그 욕구를 실현하는 창구로 CRI를 선택한다. 방송을 꾸려나가는 우리로서는 그들이 대단히 고마운 존재이다. 때문에 그들과 항상 교류하고 그들이 우리 방송에서 무엇을 요구하고 어떤 형식의 방송을 즐기는가를 잘 파악하고 목적있게 방송을 진행해야 한다. 특히 그들을 방송에 많이 출연시켜 방송을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최근년간 여러가지 원인으로 방송을 진행하면서 청취자 편지가 적어져 그들의 반향에 대해 잘 파악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럴수록 매 한통의 청취자 편지를 중요시하고 프로에서 성의있게 청취자의 서신을 취급해주고 요구사항을 들어주며 청취자와 교감을 이루어야 한다.
조선 평양시의 신승철씨는 최근에 새롭게 늘어난 청취자다. 평양시 모 중학교 교원으로 사업하는 그가 첫 편지를 보내와 중국의 교육상황에 대해 문의해왔다. 편지를 받아본후 즉시 관련 자료를 정리하여 "청취자의 벗" 프로에서 그의 편지를 취급함과 동시에 그의 물음에 비교적 원만한 답을 주었다. 얼마후 그가 감격에 넘친 두번째 편지를 보내왔다. 해외 청취자의 요구사항을 이렇게 철저히 들어주고 답을 보내주는 방송에 고맙고 방송된 내용이 학생들에 대한 강의에도 도움이 되였다며 앞으로 더 열심히 듣겠다는 내용이였다.
방송청취자군체는 다양하다. 문화수준, 직업, 년령, 성별 모든것이 천차만별이다. 박동호청취자는 흑룡강성 목릉시의 한 시골농민이다. 방송을 청취하고 편지를 자주 전해오는 고마운분인데 편지의 문맥이나 표현에서 알아보기 힘든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그 편지를 자세히 읽고 좀씩 윤색을 하여 "청취자의 벗"에서 전파에 띄웠다. 청취자들이 즐겨 듣는것은 물론 본인은 방송된 자신의 편지에 감격해하며 CRI 방송을 지식을 풍부히 하고 인생을 보람차게 하는 평생의 길동무라 칭송하였다.
일본 오사까의 김영일화백은 한생을 이역땅에서 살아오며 민족어가 서툰 로인이다. 방송에서 그의 편지사연을 취급해주고 여러가지 물음에 답을 주고 편지를 좀씩 윤색을 하여 랑독하여주기도 했다. 그는 CRI에 깊이 매료되고 방송을 통해 서툰 민족어수준도 제고하며 인생을 풍부히 하고있다고 말한다.
방송은 더는 방송인들이 제작실에 앉아서 홀로 꾸려나가는 일방적인 매체가 아니다. "들을 맛" 있게 꾸리는 방송은 우선 방송을 듣는 청취자들을 방송에 많이 등장시켜야 한다. 그래야 방송 자체가 생동하고 실감이 가고 청취자들이 흥미를 가진다. 지난 몇년간 "청취자의 벗" 프로를 꾸려오면서 청취자와 호흡을 같이하는데 중시를 많이 돌렸다. 신년특집프로 같은것도 전화를 통해 한국 단파클럽 김대곤회장님과 함께 진행하여 청취자의 방송참여도를 높이고 생동감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좋은 편지내용들은 진행자가 랑독하는것이 아니라 가능한 청취자 본인이 육성으로 읽게 하여 방송의 생동감을 더욱 살렸다. 이리하여 요즘 "청취자의 벗" 프로는 "들을 맛" 있는 방송으로 해내외 청취자들속에서 좋은 반향을 얻고있다. "소재"가 빈약해 이어가기 어렵던 "청취자의 벗"이 청취자들이 기대하는 프로로 변모하기까지 기본은 청취자에 밀착하여 그들의 마음을 파악하고 그들의 희망사항을 반영하고 그들과 교감하며 함께 꾸려나가는 자세로 프로를 만들고 진행해나갔기때문이다. 우리의 방송은 앞으로도 청취자들이 듣고싶어하는 "소재"를 선택하고 "들을 맛"이 있는 진행에 힘을 넣어야 할것이다.
CRI 방송인으로 숨가쁜줄 모르고 달려온 지난 세월, 이젠 열심히 뛸 때가 아니라 조용히 방송생애를 정리해볼 때인것 같다. 돌이켜보면 일편단심 방송이라는 한 우물만 판 나의 방송생애, 한점 후회없는 정열과 랑만의 련속이였다. 나는 자랑스럽게 말한다.
"나는 자랑찬 CRI 방송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