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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으로 시작되여 꿈으로 이어지는 방송인 (김희남)
2010-07-22 16:39:03 cri
(남) 여기는 북경방송국입니다.

(녀) 여기는 북경방송국입니다.

북경시간 저녁 7시, 조선과 한국 시간으로 저녁 8시, "동방홍"악곡소리에 이어 남녀아나운서의 긍지에 찬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세상에 울려 퍼진다.

이 목소리는 청취자들에게 중국과 세계를 소개하고 중국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목소리는 중국에 대한 청취자들의 리해를 높여주고 그들과의 끈끈한 정으로, 중국과 대상국간의 친선의 가교로 이어진다.

수도 북경에서 중국 당과 정부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아나운서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은 이루다 형용할수 없었다.

세월은 흘러 꿈에도 열망하던 방송계에 입문한지도 어언 30여년, 그것이 올해를 맞아 조선어방송 개시 60주년에 이르게 되였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감회 깊고 꿈같은 나날들이였다.

가장 보람찬 일

1975년 7월, 23살 나이에 길림인민방송국에서 최영수, 한정숙 선생님과 함께 국제방송국(그때는 북경방송국이라 했음.)에 전근되였을 때 나는 부서에서 가장 나이 어린 아나운서였다. 그때는 아날로그방송을 할 때였고 북경방송국 몇십가지 언어중의 하나였던 조선어조가 아나운서와 번역, 편집으로 나뉘여있었다. 아나운서들중에는 방송국의 얼굴이라 할수 있는 리련숙, 리성호 등 오랜 아나운서와 선배들인 오정숙, 김춘선, 신정자 등분들과 나보다 몇년 일찍 입사한 서창술, 김태근, 리정옥 아나운서가 있었다.

그때 서울말씨로 방송하는 리련숙아나운서의 방송은 부드럽고 류창하고 품위있었고 리성호아나운서의 방송은 첫마디만 들어도 북경방송국의 자부심을 한껏 느낄수 있는 특색있는 방송이였다. 특히 그의 시사해설방송이 그랬던것으로 기억된다. 그때 막내였던 나는 처음부터 하나하나 선배님들의 가르침을 받았고 따라서 방송수준도 점차 달라지기 시작했으나 어디까지나 걸음마를 타기 시작한 "유치원생"에 불과했다.

그런데 얼마후 조선어조의 아나운서들중 어떤이는 몸이 좋지 않아 휴양하고 또 어떤이는 "5.7"간부학교에 가게 되여 나 혼자 남자아나운서의 중임을 떠메게 되였다.

당시 나는 약 1년간 녀자아나운서들과 함께 뉴스를 비롯해 모든 방송을 하게 되였다. 비록 남자는 나 혼자였지만 힘든줄을 몰랐고 중국의 목소리를 전한다고 생각하니 그만큼 보람을 느꼈다.

특히 1976년 7월 28일 당산대지진때 그 여파로 북경사람들도 밖에 천막을 치고 살면서 공포에 떨고있었고 계속되는 여진으로 사람들이 사무청사에 들어가기 저어했다. 하지만 번역원들은 어김없이 사무실에서 방송원고를 번역했고 아나운서였던 우리는 그 원고를 들고 방송실에 달려가 당과 정부의 목소리를 전했다.

바로 이때 주덕위원장과 주은래총리, 모택동주석이 련이어 서거했다. 다산다난했던 1976년, 우리는 전국 인민과 함께 눈물을 흘렸고 또 그 슬픔을 딛고 방송을 계속했다. 이는 1970년대에 입사한 우리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더없이 귀중한 경험이였고 힘든 시련이였다고 생각된다.

보람을 느낀 일은 이것뿐이 아니였다.

1988년, 1년간 조선 김일성종합대학에 연수 갔을 때였다. 중국대사관에서는 조선 관련 부문 관계자들을 위해 늘 영화감상회를 마련하군 했는데 중국의 이모저모를 보여주는 시보영화와 당시 개혁개방을 반영한 중국의 예술영화를 상영했다. 그때 영화대본 번역은 중국에서 간 연수교원들이 함께 하고 영화 해설은 내가 맡았는데 평판이 좋았다. 그러던 어느날, 평양인민문화궁전에서 "중조우호호조협정체결" 기념일에 즈음해 중국의 예술영화를 상영하게 되였다. 해설은 역시 내가 했다. 영화감상회에는 조선의 유명한 배우들을 비롯해 수백명의 관련 인사와 평양시민들이 참가했다. 영화가 끝나자 장내가 떠나갈듯 요란한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일층 연회장에 내려가자 조선 예술영화 "이름없는 영웅들"중 유림과 순희 역을 맡았던 인민배우들이 직접 와서 어쩌면 그렇게 해설을 잘할수 있었느냐면서 축하해주었다. 이때 옆에 있던 중국대사관 문화참사가 나를 김일성종합대학에 연수 온 중국국제방송국 아나운서라고 소개해주자 "그럼 그렇겠지." 하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실로 아나운서의 긍지를 느끼게 한 잊을수 없는 일이였다.

아나운서는 방송국의 얼굴이다. 아무리 좋은 내용도 결국은 아나운서의 화술형상을 통하여 청취자들에게 전달된다.

그런데 청취자들을 보지 못하고 하는 방송이 그 효과가 어떤지를 알려면 청취자수신보고서나 편지, 전화 등을 통해서 조사해야 한다.

한번은 청취자설문조사를 한적 있다. 내용인즉 어느 프로가 좋은가, 어느 아나운서의 방송이 듣기 좋은가 하는것이였다. 당시 수년간 해오던 "라지오잡지"라는 자체 편성 방송프로그람이 있었다. 청취자들은 이 프로가 좋고 프로를 담당한 아나운서들의 방송이 듣기 좋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중앙텔레비죤방송국의 취재나 KBS 연수 등 출장차로 한국에 다녀올 때도 중국경제의 급속한 성장으로 중국에 대한 한국 국민의 시각이 많이 달라지고 중국의 위상이 높아진것을 실감할수 있었고 따라서 중국국제방송국에서 근무하게 된 긍지를 느낄수 있었다. 그럴 때면 청취자들을 위해 량국의 우의를 돈독히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겠다는 결의를 다지군 했다.

2000년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방송 개시 50주년 특집방송과 수도 FM방송 개시 1주년 특집방송 그리고 여러차례의 음력설모임 특집방송을 비롯한 많은 프로들을 내가 편성하고 박은옥아나운서와 함께 방송해 좋은 평을 받았던 일이 기억에 새롭다. 특히 50주년 특집방송에는 방송국의 얼굴이라고 할수 있는 리련숙과 리성호 아나운서를 비롯해 50년간 방송에 참여했던 거의 모든 아나운서들의 목소리가 담겨져있어(록음테프를 CD에 담았음.) 후배들이 우리 선배들의 목소리는 어떠했는지, 선배들은 어떻게 방송했는지 들어볼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남았다.

가장 어렵던 일

나는 방송을 사랑했다. 또 멋진 아나운서가 돼보려는 꿈도 가지고있었다. 그런데 그 꿈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목소리는 아나운서의 생명이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 문제가 생겨 아예 방송에서 하차한적이 있었는데 그때가 가장 어려웠던것으로 기억된다. 그후부터는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번역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던 것이 목소리가 점차 회복되여 자체 프로그람도 편성하고 방송도 하게 되였다. 말하자면 이때로부터 번역도 하고 방송도 하는 "일인다역"의 방송인으로 변신한것이다.

그때 어렵던 일은 이것만이 아니였다.

방송을 잘하려면 문화수준이 있어야 했다. 그 세대의 사람들이 다 그러하듯 중학교 2학년에 "문화대혁명"을 겪은 나로서는 공부할 기회가 없었다. 방송국에 와보니 선배님들은 거의다 "문화대혁명"전에 대학교나 중등전문학교를 졸업한분들이였다. 우리는 지식이 딸렸고 배워야만 했다. 그래서 중앙민족대학 조선어문학부에 다니면서 방청도 했고 그후에는 연변대학 통신학부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1981년, 연변대학 통신학부에서는 북경에서 학습반을 꾸렸다. 학생수는 40여명이였던것으로 기억된다. 대학교를 다니지 못했거나 "공농병대학생" 그리고 북경의 여러 조선족 문화단위의 젊은이들이 거의 모두 다녔다. 연변대학의 선생님들이 여름과 겨울 방학을 리용해 2차씩 북경에 와 강의를 하였는데 장소는 방송국으로 정했다. 우리는 일하면서 공부를 했다. 주변 학교 교실을 리용해 공부했는데 그것도 어떤 때는 여의치 않아 장소를 멀리 다른 곳으로 옮기기도 했었다. 방송국에서 남쪽으로 10여리 떨어진 장소에서 공부한 학기도 있었다. 게다가 겨울에는 추운 고생, 여름이면 더운 고생까지 겹쳐 힘들었지만 우리는 5년간 열심히 견지했다. 방송국에서 적극 지지해주었고 우리의 학구열이 어려움을 극복하게 했던것이다. 그때 우리 반에는 대학꿈을 실현하기 위해 60이 넘는 나이에도 불타는 열정으로 우리와 함께 열심히 공부한 전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조 김양영조장도 계셨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공부하러 다니시는 그분의 열정은 항상 우리에게 힘이 되였다.

그때의 어려움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쑥스러운 얘기지만 총각때 북경에 온 나는 장가갈 나이가 되였지만 알맞는 대상자를 만나기 힘들었다. 북경에 조선말을 아는 처녀가 적었고 여러가지로 조건이 제한되여있었던것이다.

그때 북경은 수도라 출장오려 해도 소개신이 있어야 하는 세월이였다. 당시 북경에 호적을 둔 조선족은 수천명밖에 안되였다. 그들은 대부분 공화국창건후 북경에 전근되였거나 대학교를 졸업하고 중앙 각 부서에 배치받은 사람들이였다. 간혹 그들의 자녀들이 있긴 하나 조선말을 모르는 등 여러가지 원인으로 배우자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때 북경에서 그것도 방송국에서 근무한다는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방송인은 모두가 선망하는 직업이였다. 그런데 북경에서 장가가기 그렇게 힘들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결국 다른 사람의 소개로 고향 처녀한테 장가를 갔는데 집사람을 북경에 전근시키는데 많은 시간과 정력을 소모하였는데 이 역시 퍽 어려운 일중의 하나였다.

가정의 언어환경은 방송을 잘할수 있는 뒤받침으로 된다. 북경에서는 다같이 고향에서 만난 부부간인데도 집에서 조선말보다는 중국말을 하는 때가 더 많다. 중국말만 하는 언어환경에서 자란 자식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그렇게 되는것 같다.

지금 북경에서 나서 자란 조선족들의 자식치고 조선말을 하는 아이는 매우 드물다. 요새 북경에 우리 말 우리 글을 배워주는 유치원이나 학교가 생겨 기쁜 일이지만 학교수가 아주 제한되여있고 거리 또한 멀어서 그 혜택을 보는 애들은 극소수이다. 북경에서 자란 조선족아이들에게 우리 말, 우리 글을 기르치는것은 우리 모두에게 남겨진 숙제이다.

훈훈한 인심

1975년, 북경에 방금 왔을 때는 중국경제가 발전하지 못한 시기였다. 그때 방송국청사는 복흥문 네거리 부근에 있었는데 중화인민공화국창건 10주년 경축 10대 건물중의 하나였다. 그때 북경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라고 해야 왕부정에 있는 10여층짜리 북경호텔 새 청사였다. 거리에는 자동차가 별로 없었고 자전거가 많았다. 지하철은 1호선뿐이였고 지하철표는 한장에 10전씩 했다. 자금성의 입장권도 10전이였던것으로 기억된다. 만리장성은 그때 입장권이 없었다. 북경에는 그때 왕부정상가거리와 전문상가거리, 서단상가거리 등 3대 상가거리가 있었으나 지금처럼 화려하지 못했고 거리에는 회색으로 된 건물이 많았다. 그때 남자들은 대부분 남색 데트론천으로 지은 중산복을 입고 헝겊신발을 신고 다녔는데 나도 역시 례외가 아니였다. 녀성들중 치마를 입은분이 별로 없었고 색상 또한 어두웠다. 그때 천안문광장에서 가끔 대형행사가 열렸는데 그럴 때면 우리는 방송국에서 천안문광장까지 걸어다녀야만 했다.

그때 나의 매달 로임은 38원이였는데 먹고 쓰기에도 빠듯했다. 한해에 한번씩 집에 다녀올 때면 부모님을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부모님이 주는 돈을 가져다 보태 쓰군 했다. 그 시기 외지에서 친척과 친구 등 손님들이 많이 찾아왔었다. 반갑기는 하나 접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떤 때는 잠자리가 여의치 않아 남자손님이면 한침대에서 자거나 아예 내가 쓰던 일인용침대를 내주고 나는 사무실에 나가 걸상을 놓고 잘 때도 있었다. 그때는 젊은 시절이여서 손님이 오면 아무리 힘들어도 모시고 다녔고 좋다는 곳을 다 구경시켰다.

조선어조에서는 한때 리발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리발기를 구입해 직접 리발하고 리발한 머리카락은 모았다 팔아 복숭아나 수박 등 과일을 사먹던 시절도 있었다. 그리고 조선어부 직원들의 결혼축의금은 일인당 1원, 가족이나 다른 조의 결혼축의금일 경우는 일인당 50전이였다. 그후 방송국 "8대 금강(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조와 국제방송국 조선어조의 총각 8명을 가리킴.)"은 결혼을 대비해 일인당 5원, 총 40원의 호조금을 모았는데 그것이 결혼때 한몫을 막았다. 그때 조선어조의 책임자였던 김성철조장의 로임도 얼마 안되였고 대학졸업생이라야 로임이 56원이였다. 그때 나는 평생에 로임을 100원 이상 받아볼 때가 있을가고 생각한적도 있었다. 당시 조선어부의 대부분 직원들의 생활이 퍽 어려웠지만 인심만은 훈훈했다.

조선어조의 김성철조장은 해마다 명절때면 일여덟명의 독신들을 청해 상다리가 부러지게 음식을 차려놓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주었고 고향에서 부모나 가족이 오면 무조건 청해 식사를 대접했다. 독신들의 결혼식도 조선어조 녀성들이 직접 챙겼는데 료리솜씨는 북경호텔의 료리사도 울고갈 정도였다.

그때 우리는 한해에 한두번씩 북경 교외의 경치 좋은 공원으로 들놀이를 다녔다. 당시 구하기 힘든 맥주는 조선전문가를 통해 외국인상점에서 사왔고 점심에 먹을 음식은 집집이 자체로 준비했다. 이때도 역시 녀성들의 료리솜씨를 자랑할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들놀이에는 가족들도 동반했는데 모두 자기 집의 음식솜씨를 자랑할수 있는 최고의 음식으로 준비해왔다. 점심전까지의 자유활동시간에 녀성들은 나물을 캐거나 공원을 돌아보았고 남성들은 주로 카드놀이를 했다. 점심때가 되면 가지고 간 음식을 신문지우에 쭉 펴놓고 그옆에 둥그렇게 모여앉는다. 푸짐한 음식은 그 맛이 일품인데 거기에 곁들인 맥주는 흥을 돋군다. 어느새 카세트록음기에서 흥겨운 노들강변곡이 흘러나오고 사회자가 앞으로 척 나선다.

"여러분, 즐거운 이 시각 지금 이 장면은 전파를 타고 세상에 중계되고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오락판에서 녀성 두명이 좌우에서 김성철조장의 팔을 척 끼고 나와 억지다짐으로 노래를 부르게 한다. 난색을 보이던 조장은 히죽이 웃더니 노래하기전에 오른손의 식지로 먼저 자기 얼굴을 가리킨다. 이상하다싶었는데 인차 칼칼한 소리로 노래를 뽑는것이였다. 18번이라고 하는데 그 가사가 기막혔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듯이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이 노래에 춤판이 벌어진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장끼를 자랑한다. 공원을 돌아보던 사람들도 삥 둘러서서 구경하는데 실로 연변가무단의 공연도 무색할 장면이 아닐가싶다.

당시 독신들은 젊은이들중 먼저 북경에 전근되여온 태근선생네 단칸집에 모여 놀 때가 많았다. 식당과 거리가 가까운것도 있겠지만 사모님의 료리솜씨가 일품이였고 어느때 가든 반기면서 잘 챙겨주었기때문이다. 방송국에 있던 "8대 금강"은 시도 때도 없이 이 집에 찾아가 채소와 쌀을 축낼 때가 많았다. 특히 겨울에는 배추김치가 맛있었다. 한번은 한 겨울 먹을 량의 김치를 큰 독으로 한독 가득 담가놓았는데 맛이 채 들기도전에 독신들이 쳐들어가 3일만에 바닥냈던 일이 기억에 생생하다.

나는 조선어조 여러분들의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았다. 지금은 퇴직하였지만 직장에 계실 때 여러모로 우리를 사랑하고 아껴주신 모든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다. 특히 길림인민방송국에서 함께 전근해오신 최영수선생님과 한정숙아주머니는 나를 언제나 친동생처럼 보살펴주셨다. 그분들의 행복과 건강을 진심으로 기원한다. 또 우리곁을 영원히 떠난 조선어조 선배님들의 명복을 빈다.

배움의 길은 끝이 없다

1970년대 중반 방금 입사했을 때 우리 조선어조에는 오랜 번역원과 편집원, 아나운서들이 적잖았는데 그때 조선어조에는 몇사람이 있어 빛난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다. 그 몇사람이란 방송원고 번역도 잘하고 소설번역도 잘하여 민족출판사에서 책을 낸 박창식선생님, 방송국 번역에 종사하면서 중요한 통역에도 나가고 가끔 조선노래 가사를 한어로 번역해 출판물에 발표한 한창희선생님 그리고 방송을 잘하는 리련숙아나운서와 리성호아나운서였다.

김성철조장과 북경대학을 졸업하고 방송국에서 중문편집을 담당했던 길문도선생님이 조선의 도서를 중문으로 공동번역해 번역, 출판한것을 본적 있다. 김성철조장이 조선 도서의 문장내용과 어휘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면서 한마디한마디씩 구두로 설명하면 길문도편집이 그것을 중문으로 한자한자 번역했다.

아나운서와 번역, 편집원실이 따로 있었던 당시 아나운서들은 선배들을 모시고 방송을 열심히 배웠고 번역원들 역시 오랜 선배님들의 지도를 받으며 실력을 키워왔다. 나에게는 민족문화궁과 북경도서관 도서증이 있었는데 늘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에 가 소설책과 기타 자료를 빌려다보군 했다. 사무실에서 짬짬이 시간을 리용해 어휘카드를 만들기도 했고 필요한것을 노트에 적기도 했는데 업무에 많이 도움이 되였던것 같다.

당시 번역원들중 연변대학 제1기 조선어문학부 졸업생이였던 키가 훤칠한 류운섭선생님이 인상깊다. 번역하다 모를것이 있어 그분에게 물은적이 많았는데 대답할 때의 행동이 참 우습강스러웠다. 물으면 그저 대답하는게 아니고 묻는 사람들쪽을 향해 먼저 한손을 척 쳐들고 조금은 답답할 정도로 뜸을 들였다가 웃으면서 천천히 대답해주셨는데 그 대답이 알기 쉽고 생동했다. 사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내용을 척척 대답해주던 그는 정말 존경이 가는분이였다.

선배님들은 나의 원고를 열심히 고쳐주셨고 "핀잔"도 많이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과정은 반드시 거쳐야 하는 배움의 과정이였고 그 "핀잔"은 금을 주고도 바꿀수 없는 사랑의 "핀잔"이였다.

그때 우리는 누가 보든말든 열심히 공부하여 기량을 닦았다. 성공했다 하여 자만하지 말고 실패했다 하여 락심하지 말아야 한다고 늘 말씀하시던 조선어조 김성철조장의 말씀이 지금도 기억에 새롭다. 그분은 또 영글지 않은 곡식이 고개를 쳐든다고 이발도 나지 않은 사람이 콩밥부터 먹으려 해서는 안된다며 늘 경종을 울려주시였고 실력을 닦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고 항상 격려해주시였다. 나는 조선어조의 모든 사람에게서 배웠고 우리는 이런 과정에 점차 실력을 쌓아가게 되였다.

조선어부에서 내가 가장 나어린 꼬마였다면 가장 년세가 많은분은 최원부선생님이였던것으로 생각된다. 머리가 희슥희슥하고 강마르게 생기신분인데 60고개를 바라보는 로인이였다. 다리가 약간 안으로 휘여서그렇지 걸음걸이만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씩씩했다. 그분은 부서에서 신문이나 자료 등을 정리하고 사무실을 청소하고 끓인 물을 길어오는 등 잡다한 일을 하고있었는데 알고보니 "우파"에 걸려 이른바 "개조"를 하고있었던것이다. 한때 그는 몸이 좋지 않아 장기간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았는데 치료기간 짬만 나면 영어 등 여러 어종의 외국어를 열심히 공부하여 상당한 수준의 외국어실력을 갖춘 "신화"를 창조해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후에 그는 모친이 살고계신다는 서울로 돌아갔다. 지금도 신문의 자료들을 가위로 오려 분류별로 꼼꼼히 정리하고 배움에 항상 게을리하지 않았던 그분의 모습이 자주 떠오른다.

이외 우리에게 획기적인 도움이 된 일이 있다.

조선어부에 갓 전근되여왔을 때는 윤범수 등 2명의 조선전문가가 번역원고를 교열하고있었다. 번역원들이 방송원고를 번역해 전문가에게 넘기면 그들이 교열했는데 그때 그들이 우리 번역원고를 새까맣게 고친것으로 기억된다. 왜냐하면 "문화대혁명"시기 중국과 조선과의 교류가 끊겼다 다시 시작되다보니 당시 번역원고에는 한어단어를 직역한것이 많았다. 2007년까지 무려 9명의 조선전문가들이 조선어부에 와서 번역원고를 교열했는데 그들의 도움으로 조선어부의 번역과 방송 수준도 큰 진보를 가져왔다.

중한수교이후 조선어방송은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였다. 조선중심의 방송으로부터 조선과 한국 청취자를 고루 돌보는쪽으로 변화했고 방송용어도 량측 청취자가 거부감을 갖지 않고 다 받아들일수 있는쪽으로 선택하게 되였다.

대외방송은 딱딱한 설교식방송에서 청취자에게 다가가고 중국을 재미있게 홍보하는 방송으로 탈바꿈하게 되였고 해외 현지방송과 국내 거주 외국인을 상대로 한 현지방송이 개설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 한국과의 업무교류가 늘어나고 한국어를 접하고 배울 기회가 많아지게 되였다. 한국 KBS방송국 연수, KBS방송국 해외파견 강좌, 인터넷원고 교열을 맡아 2년간 조선어부에 몸 담아온 고광수선생님의 원고교열은 나에게는 좋은 배움의 기회였다.

조선어방송의 창창한 미래

중국국제방송국은 현대적인 국제라지오방송체계를 적극 구축하고있다. 비약의 시대에 발맞추기 위해서는 조선어부 전체 성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조선어부라는 이 "시계"가 조금의 오차도 없이 착착 잘 맞아 돌아가게 하려면 조선어부 모든 사람이 일심협력해야 한다. 조선어방송의 발전속에 개인의 발전이 있고 그속에 성취감도 있게 된다. 세상은 많이 변했지만 단 한가지만은 변하지 않은것이 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청취자를 포함한 모든 수용자들을 위해 방송을 꾸리고 청취자와 함께 방송을 꾸린다는것이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래일도 역시 마찬가지다.

청취자에게 다가서는 방송, 재미있는 방송, 유익한 방송을 꾸리려면 조선어부 전체 성원들의 꾸준한 노력과 창조가 필요하다. 특히 경쟁이 치렬한 시대에 세계적인 최고의 방송으로 영원히 립지를 굳히려면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무엇이 문제인지 또 그것에 어떻게 대응할지를 철저히 검토하고 대책을 댄후 헌신적으로 실천해나가야만 조선어부의 창창한 미래를 보장할수 있을것이다!

30여년 전에 입사해 방송걸음마를 타기 시작한 나도 이제는 대선배님이란 말을 듣는다. 나는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있다. 나를 키워준 당과 정부 그리고 어엿한 방송인으로 성장시켜준 국제방송국 조선어부의 전체 임직원들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이다.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누었고 쓰러졌을 때도 항상 옆에서 지켜주고 부추겨주고 밀어주신 여러 선배들과 동료들에게 진심으로 머리숙여 감사드린다. 또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 청취자 여러분께도 감사드린다.

이제 계주봉은 유능한 후배들에게 넘겨졌다. 세계 최고의 방송을 만들어나갈 그들은 계속해 새 꿈을 꾸고 그 꿈을 현실로 만들어가고있다. 하긴 방송인은 꿈으로 시작한 신성한 일터에서 계속 꿈을 이어나가는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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