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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 조선어방송의 불혹에서 회갑까지 (이선옥)
2010-07-22 16:39:03 cri
중국국제방송국(CRI) 조선어방송이 올해로 방송개시 60주년 환갑을 맞이하고 내가 방송국에 입사한지도 만 20년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는데 방송국이 걸어온 60년과 방송국과 함께한 나의 20년을 돌아보니 감회가 새롭다. 지난 20년은 중국의 개혁개방정책과 함께 중국국제방송 조선어방송이 가장 빠른 변화를 가져온 20년이고 방송이 무언지도 모르던 한 녀인이 방송인으로 커온 20년이다.

60년 전, 첫 고고성을 터뜨린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방송의 목소리가 지금도 메아리로 들려오고 20년 전 북경에 도착해 천안문을 보면서 느낀 감격이 어제 같은데 모두가 상전벽해의 변화를 가져왔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20년 전, 중국국제방송국 사옥은 천안문에서 장안가를 따라 서쪽으로 제2순환도로가에 위치해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10주년 기념 10대 건물의 하나인 그 건물에 방송, 영화 총괄행정부서인 중국 라지오, 영화 및 텔레비죤방송부 산하의 세개의 방송국들―대외방송전문인 중국국제방송국과 국내방송 전문인 중앙인민방송국(CNR), 금방 시작한 텔레비죤 전문방송(CCTV)이 한 지붕아래서 오손도손 함께 살아가고있었다.

그뒤에 훌쩍 몸집이 커버린 텔레비죤방송이 장안가를 따라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곳에 새 사옥을 짓고 막내가 따로 살림을 차렸고 이어 국제방송 역시 장안가서쪽 석경산로 갑 16번지에 모던한 빌딩을 짓고 새 살림을 차려 오늘에 이르렀고 기존의 그 자리에는 오늘날 방송영화총국과 중앙인민방송국만 남아있다.

수십가지의 다양한 언어로 세계 각국을 대상으로 방송하는 국제방송은 세계의 축소판이라고 할수도 있다. 매일 중국어기사가 나오면 언어방송부별로 각자 상대국 언어로 번역해서 상대국 시간대에 맞추어 방송을 했다. 그러니 방송국사옥은 매일 24시간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인셈이였다.

인터넷은 고사하고 컴퓨터도 보기 힘들던 그때 언어방송부 사무실마다 팩스머신이 설치되여 중국어기사가 팩스로 자동으로 전달되면 사무실에서 대기중이던 편집이 원고내용을 보면서 상대국의 상황 등에 근거해 기사의 선택여하를 결정해 번역자에 넘긴다.

그때의 팩스머신은 지금처럼 일반종이를 사용한것이 아니라 특수 처리를 거친 두루마리 팩스전용종이를 사용해 제때에 교체하는것도 일대 공사였다. 팩스전용종이가 거의 다 되여가면 종이가에 빨간 색갈이 묻어 나온다. 이 적색신호만 보면 번개같이 달려가 종이를 교체해 원고를 받는데 차질이 없도록 해야 했다. 짧은 시간동안이라도 종이가 없으면 저장기능도 없었던 "둔한" 팩스머신이라 빠뜨리는 원고가 있어서 그 간단한 일에도 모두 사명감을 가지고 림했다.

팩스로 받은 기사를 편집인이 선택하면 그다음 순서로 번역자에게 넘어간다. 그때는 모두가 볼펜이나 만년필로 원고지에 "친필"로 번역문을 적었는데 한눈에 알아보기 쉽게 예쁜 글씨를 쓰는 사람이 아나운서들에게 가장 인기였다. 오리발처럼 그리면 아무리 한획한획 쓴다고 해도 알아볼수 없는 글자가 있게 되여 아나운서들이 골머리를 앓았고 새로운 번역자가 입사하면 그 번역자의 필체에 익숙해지느라 아나운서들이 고심하기도 했다.

금방 입사해서 다양한 분야에 언급된 기사를 번역하다가 가끔 조선어어휘가 생각나지 않아 사전을 찾아보거나 선배들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했는데 선배들한테 물어보면 머리속에 대사전이라도 입력해둔것처럼 묻자바람으로 딱 맞는 어휘가 나오면 그런분들이 너무 대단해보였다. 번역원고가 아나운서에게 넘어가기전에 거쳐야 할 고리가 또 하나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조선어방송부에서 가장 수준이 높고 경험이 많은분들이 번역원고를 심열하는것이다. 한쪽으로는 원문원고를 보고 다른 한쪽으로는 읽어내려가는 번역원고를 들으면서 틀린 구절을 족집게로 집어내듯 찾아 고쳐주었다.

그렇게 탈고된 번역원고가 그다음 순서로 아나운서에게 넘겨져 록음단계로 들어가는데 그때는 아날로그방송시절이라 커다란 원형의 록음테프에 소리를 록음해 감긴 테프사이에 종이를 끼워 뉴스나 프로그람의 시작과 마감을 표시했다. 아나운서가 뉴스를 록음하다가 틀리기라도 하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을 하거나 너무 많이 내려가서 다시 시작하기 힘들 경우에는 종이로 표시를 해두었다가 틀린 부분만 가위로 잘라내서 사용하군 했다.

얼마전에 인기리에 방송된 드라마 "잠복(潛伏)"의 주인공이 하던것처럼 가위로 틀린 구절만 잘라내고 다시 이어서 풀면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원활하게 방송되였는데 정말 신기함의 극치였다. 적지 않은 시청자들이 그 장면을 보면서 주인공의 기발한 지혜와 숙련된 동작에 감탄했을텐데 국제방송국에는 그런 손재주를 가진 고수들이 많았다.

제일 처음 바로 내 눈앞에서 그 고난이도 동작을 숙련되게 보여준분은 지금은 퇴직하신 김춘선아나운서였다. 빨리 되감기로 틀린 부분을 찾아간 다음 한두번 들으면서 눈으로 틀린 부분의 테프 길이를 짐작하고나서 가위로 자르고는 투명한 접착용테프로 다시 붙인다. 그리고 다시 들으면 틀린 부분이 신기하게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원활한 방송이 되였는데 몰입해서 그 일을 하시는 김춘선아나운서의 자세는 의심할바 없는 프로였고 동작도 예술 그 자체여서 그 순간 그분은 나에게 신같은 존재로 안겨왔다.

매일 저녁 7시부터 11시까지 이어지는 조선어방송이라 뉴스를 망라해 4시간 방송을 하는데 필요한 원반테프는 4, 5개 정도였다. 방송시간에 맞추어 그 테프들을 안고 방송 송신실로 가야 했는데 어쩌다가 시간이라도 조금 늦으면 방송시간을 맞추느라 그 테프들을 한아름 안고 미궁같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진땀을 빼기도 했다.

그뿐이 아니다. 테프를 시간별로 출력기에 올려 돌릴 준비를 하거나 출력기에 올려진 테프가 돌아갈때 가끔 테프가 튀여오르면서 방송이 중단될 때도 있었다. 그런 때를 대비해 항상 비상용테프를 준비해두고는 사무실을 지키고있다가 송신실에서 전화만 오면 비상용테프를 안고 정신없이 뛰여가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매일 방송시간 내내 담당자들이 륜번으로 야근을 서야 했다.

방송기사 작성에서부터 원고 선별, 편집과 번역, 록음, 전송 전과정을 인터넷과 컴퓨터에서 하는 디지털시대의 오늘날 모든 과정이 너무 편한 원인인지 아니면 나이가 든 원인인지 가끔 원시적인 그 작업시대가 그리워진다.

부채에서 에어콘으로

북경 최초의 지하철인 1호선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석경산이 있다. 1997년, 중국국제방송국은 그곳에 새 사옥을 짓고 분가했다. 잘 정돈된 넓은 정원을 가진 15층 새 사옥은 방송시설도 최신식디지털시스템이고 사무실 바로 곁에 단독 스튜디오도 갖추어져있어 록음테프를 안고 사무실에서 스튜디오로, 다시 송신실로 갔다왔다할 필요없이 모두가 컴퓨터시스템을 통해 이루어지며 빌딩 전체에 중앙집중 랭, 난방이 되여있어서 항온을 유지한다.

실내 항온유지가 뭐 그렇게 대단하냐고 웃을수도 있겠지만 20년 전에는 랭방시설은 물론 선풍기를 갖추려 해도 큰 기물을 마련하듯 오랜 시간을 두고 준비해야 했다.

서늘한 동북에서 살다가 갑자기 여름이면 폭서가 들이닥치는 북경에서 가장 참기 힘든것중의 하나가 더위였다. 사옥은 남북향으로 들어앉은 건물이지만 중앙에 복도를 두고 량쪽의 사무실들이 각자 단독으로 막혀있어서 통풍은 창문을 통해서만 가능해 삼복철에는 더위와 싸우는것이 고역이였다.

그때는 부채가 더위를 가셔주는 유일한 도구였다. 그렇다고 번역작업을 할 때 한손으로 부채를 흔들면서 할수도 없고 해서 잠시 일에 몰두할라치면 땀에 흠뻑 젖은 손때문에 원고지가 젖어들어 글자가 흐려지기도 했다.

스튜디오외에 방송국사옥에서 가장 시원한 곳은 건물 1층 로비 량켠의 통로였다. 오전일을 끝내고 구내식당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는 가장 더운 점심 1시경이 되면 우리들은 삼삼오오 1층에 내려가 통로 그늘진 곳에 서서 불어오는 바람에 더위를 식히군 했다.

지금은 사람마다 핸드폰을 가지고있고 또 사람마다 컴퓨터를 가지고있어서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대화하고 수다를 떨수 있지만 그때는 교류하기 위해서는 만나야 했다. 전화는 공적인 용건으로만 사용되는줄 알던 때였기에 시원한 바람을 안고 나누는 대화의 시간은 최신정보를 교환하고 조선어방송가족간의 정을 나누는 귀중한 시간이기도 했다.

지금은 컴퓨터가 필수여서 볼펜이 없어서 빌려 쓰는 사람은 있어도 컴퓨터가 없는 사람은 없을 정도이다. 사무실에도 매 사람당 컴퓨터 1대씩 배치되여 근무중에 메일을 체크하고 인터넷을 통해 뉴스를 보고 자신의 미니블로그를 업데이트하고 메신저로 친구들과 대화를 즐기기도 하지만 그때는 인터넷은 물론이고 컴퓨터도 보급되지 않아 컴퓨터를 사용하는 사람은 하이테크기술을 장악한 전문인이였다.

초기에 조선어방송부가 컴퓨터 한대를 받게 되였는데 오프레이팅시스템이나 문서시스템이 얼마나 복잡한지 사용법을 익히는데만 해도 적지 않은 시간이 소모되였다. 그때는 모든 문서명이 오픈된것이 아니라 은페되여 서류를 작성해놓고도 서류명을 모르면 컴퓨터에서 서류를 찾을수 없었다.

그러니 방송국 내부의 번역작업은 당연히 컴퓨터로 하지 않고 계속 수작업으로 했고 가끔 외부의 청구에 의해 진행되는 번역작업만 특별케스로 컴퓨터에서 진행했던것이다. 어느 한번은 컴퓨터사용에 익숙하지 않아 규정된 시간까지 번역작업을 마치지 못해 밤을 새면서 일을 마치고는 마치 최고봉을 완파하기라도 한듯 가슴이 뿌듯해하기도 했었다.

가족만찬에서 단체 외식으로

국제방송국 조선어방송은 직원 개개인의 가족들로 모여 형성된 대가정이다. 지금은 북경에 거주하는 조선족도 많고 시장도 많아 원하기만 하면 코리아타운 왕징(望京)에서 필요한 조선족생활필수품을 얼마든지 구하고 외식할 때면 이번에는 어디 가서 어떤걸 먹을가 하는 행복한 고민에 빠지지만 그때는 북경에 조선족음식점 하나 변변한것이 없었다.

방송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연길랭면집이 하나 있어서 가끔 일을 끝내고 모두들 그 집에 가서 랭면을 먹으며 더위를 식히고 고향음식에 허기진 위를 달래는것이 고작이였다. 맛은 정통 연길랭면과 전혀 다른 엉뚱한 맛이지만 그래도 랭면모양은 있어서 모두들 갈 때는 빨리 맛보고픈 마음에 뻐스를 타고 가고 돌아올 때는 북경의 밤거리를 거닐면서 즐겁게 웃고 떠들었다.

조선어방송부에 신입사원이 올 때마다 주방이 딸린 주택을 가지고있던 선배들이 정해진 규정이 있는것도 아니였지만 모두들 자원원칙에 근거해 순서에 따라 신입사원을 집에 초대했다. 대체로 1주에 한집씩 갔는데 주중부터 주말이면 어느 집에서 어떤 맛있는 음식을 먹을가 하는 행복한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아빠트시장화가 시작되지 않은 때라 방송국에 입사하면 기숙사에서부터 시작해 근무년한에 따라 아빠트를 배정받아야 했다. 금방 입사해서 남편 기숙사에 들었는데 동주루(同住樓, 함께 사는 집)라는 이름의 기숙사 일부 방에는 젊은 부부들이 살림을 차려 10㎡ 미만의 방은 거실겸 침실로 하고 주방은 복도를 사용했다.

식사때가 되면 집집마다 복도에 나서서 음식거리를 만들어 오늘은 어느 집에서 어떤 음식을 먹는지를 환히 알고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서로 나눠먹기도 해서 앞당겨 "공산주의사회"에 진입했다.

"함께 사는 집" 기숙사 같은 층에 그때 김태근아나운서와 사모님이 금방 학교에 들어간 아들과 함께 세식구가 오손도손 살아갔다. 손바닥만한 방바닥에 푸른 주단을 깔고 세면에 다양한 미니가구들을 갖춘 아담하고 깨끗한 집이였다.

나가고 들어오면서 심심찮게 찾아들어가서 밥을 얻어먹고 명절이면 술도 나누었다. 바닥에 둥그런 밥상을 놓고 둘러앉아 나누는 술맛은 꿀맛이고 복도 주방에서 만든 음식은 고급식당 료리가 따르지 못할 최고의 맛이였다. 식사중에 저가락장단에 흥겨운 노래도 부르고 아예 춤판까지 벌이던 그때가 세월이 흐를수록 아름다운 추억으로 깊이 새겨졌다.

방송국에 입사한 젊은이들이 결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식당도 변변치 않았던 그때 결혼식을 치를 례식장은 더더욱 없었기때문에 사무실이 결혼식장이고 결혼준비는 모두 조선어방송부 가족들이 맡아주었다.

많지 않은 월급에서 조금씩 모아 신혼부부에게 선물도 사주고 녀성분들은 추가로 집에서 결혼파티에 올릴 음식도 만들어야 했다. 남성들은 자연스럽게 신랑쪽 가족이고 녀성들은 신부측 가족으로 되여 신혼을 맞이하는 젊은이들에게 행복을 듬뿍듬뿍 안겨주었다.

지금은 퇴직하셨지만 직장에서는 선배, 퇴근후에는 엄마처럼, 언니처럼 우리를 이끌어주고 아껴주시던 한정숙편집, 김춘선아나운서, 신정자아나운서, 안옥화편집, 리정옥아나운서 모두 건강하게 행복한 로후를 보내시기를 기원하는 마음이다. 또 한분, 몇해전 우리곁을 떠나간 조선어방송 초대 아나운서 리련숙선생의 명복을 빈다.

방송국가족중에 누가 아파서 병원에라도 가면 륜번으로 병원에 가서 환자곁을 지키는것도 조선어방송부의 한 풍경이였고 어느 집에서 이사를 할 때면 누구라 할것없이 모두 나서서 남성들은 무거운 짐을 나르고 녀성들은 점심준비를 하면서 진정한 "공산주의사회"를 만들어갔다.

그때 모두가 기다리는 또 한가지는 일년에 두번 정도 진행되는 야외 들놀이였다. 봄이면 단체로 야외에 나가 민들레나 미나리, 달래를 캐기도 했는데 도착하자바람으로 녀성들은 열심히 산나물을 찾아다니고 남성들은 삼삼오오 카드놀이를 하면서 점심을 기다린다.

점심이 되면 넓은 비닐을 펴고 준비해간 음식물을 펼쳐놓는다. 지금처럼 떡집이나 식당에서 전화로 주문한 음식이 아니라 조선어방송부 집집마다 정성스레 준비한 스페셜음식이다. 아빠트를 배정받지 못한 싱글을 제외한 조선어방송부 모든 식구가 최고의 음식을 준비해 음식자랑이라도 하는듯하다.

오래동안 기름기 많은 중국식음식에 지친 위가 고추장냄새만 맡아도 즐거운 비명을 지를 정도였다. 쌀밥도 똑같은것이 하나도 없고 정성스레 만든 다양한 료리는 물론이고 고추장에 찍어먹는 오이와 파도 별미였다. 시원한 맥주를 곁들이며 어느 정도 위를 달랜다음 카세트테프를 틀어놓고 자연속에서 마음껏 춤과 노래로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유치원생"에서 대학생으로

20년 전, 방송국에 입사한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에서 올라온 "유치원생"이였다. 대학때 전공이 조선어였지만 방송경험은 아예 없고 기사번역경험도 전무한 상태에서 선배들의 가르침으로 방송인의 려정을 시작했다.

먼저 표준어휘 숙지부터 시작해 방송기사 번역의 기교에 이르기까지 배우는 동시에 기사번역의 실전을 거쳤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뒤이야기지만 금방 와서 "加强"은 "가강"이 아니라 "강화"라 번역해야 한다고 알려주던, 몇년 먼저 입사한 동기가 하늘같은 존재였다.

토끼꼬리만한 기사를 반나절이 되여서야 번역을 해놓으면 선배들이 한자두자 고쳐주고 그렇게 다듬어진 조선어기사가 아나운서들에게 넘어가면 아나운서들이 또 방송어순에 대해 가르쳤다. 조선어방송 구성원 모두가 가족이고 모두가 선생이였던것이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번역실력을 갈고 닦은 오늘날 거꾸로 새로 입사한 후배들의 번역원고를 보아주기에 이르렀다. 또한 지금은 그 어떤 문체로 글을 써도 모두 방송기사 냄새가 나고 작가가 되겠다던 어릴 때 꿈이 통번역전문가로 바뀌기도 했다.

조선어방송 상대국과 교류함에 있어서 가끔 방송국에 통역업무가 떨어지기도 한다. 입사후 몇년 지나 중국이 한국과 수교하면서 중국으로 방문오는 대표단 수자가 급증하면서 더욱 그러했다.

중한 수교 1주년 때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초청으로 한국 국회대표단이 중국을 공식방문하고 그 통역으로 내가 나가게 되였다. 통역업무수행중 한국대표단의 언어발음은 분명 확실하게 알아들을수 있는데 20~30% 정도의 내용은 도저히 알아들을수 없었고 마찬가지로 한국측도 내가 하는 언어를 100% 다 리해하지 못하는것 같았다.

그런 상황에서 전국인민대표대회 위원장과의 회견내용을 어떻게 통역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뜨겁다. 단,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 있으면 다시 물어서 그 뜻을 알고 최대한 정확하게 표현하려 한 자세에서 점수를 따서 그뒤 대표단 및 대표단 안내측과 맺은 좋은 인연이 오늘까지 이어지고있다.

중한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조선어방송에도 변화가 오기 시작해 조선중심으로부터 조선과 한국 청취자를 고루 돌보는쪽으로 발전하고 방송용어도 조선과 한국 청취자 모두가 받아들일수 있는 어휘를 선택하는데 신경을 쓰게 되였다.

조선어방송만 변화를 가져온게 아니라 중국국제방송국 전체에 급격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대외방송도 일방적인 선전형식의 방송으로부터 청취자에게 다가가는, 재미있게 중국을 홍보하는 방송으로 변했고 국내에 FM방송을 신설해 국내에 거주하거나 관광온 외국인을 상대로 외국어방송을 시작했다.

조선어방송도 저녁시간대에 1시간을 내여 북경지역 조선어청취자를 상대로 새로운 프로그람을 만들어야 했다. 기존의 인력으로 2시간의 대외방송도 하고 새로 추가된 1시간 국내방송도 해야 했으므로, 또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기 위해 조선어방송지도부는 편집과 아나운서가 총 7개의 팀을 묶어 완전히 새로운 방식의 방송을 시도했다.

나는 행운스럽게도 모든것을 다 바쳐 방송을 사랑해온 프로방송인 김태근아나운서와 팀을 무어 관광프로그람인 "공중가이드"의 기획, 사회, 편집을 맡게 되였다. 경험도 없고 자신도 없으면서 방송인이 되여보겠다는 열정 하나와 지도부의 믿음, 선배의 지도로 어렵게 방송을 시작했다.

지금도 처음 스튜디오에서 마이크를 마주했을 때의 감격과 흥분을 잊을수 없다. 50분 프로그람 록음에 2, 3시간을 소요했고 편집을 하면서 들어보니 방송이라고 할수 없고 록음된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도 듣기 싫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싶은 심정이였다. 포기하고싶은 마음이 굴뚝같을 때가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옆에서 김태근아나운서가 잘한다고 선의의 거짓말로 고무해주어 견지할수 있었다.

거기다가 새로운 방송을 시도한다며 원고를 쓰지 않고 대화의 형식으로 하다보니 군더더기가 너무 많아 편집하는데만도 반나절씩 걸리기 일쑤였다. 그때는 머리속이 온통 프로그람뿐이였다. 이번주에는 어떤 내용으로 하고 인터뷰는 누구를 하며 화제는 어떻게 시작하고 어떤 음악을 선택하며 어떻게 하면 지난번보다 더 잘할것인가만 고민했다.

그 덕분에 당당하게 자신을 가지고 모든 일에 림하게 되였으며 더우기는 행사에 통역으로 나가서 어떻게 하면 그렇게 말을 잘하고 목소리가 듣기 좋냐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 나는 항상 방송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왜냐하면 프로그람을 담당하는 그 몇년 동안 말의 군더더기를 버리고 마이크사용법을 익혔기때문이다.

이제 방송에 정이 들어 나와 방송은 불가분의 련인관계이고 방송국은 나의 종신귀착지이며 이 세상 어디서든지 방송인으로 뿌듯한 자긍심을 느낀다.

조선어방송은 오늘날 다양한 채널을 가진 신형의 복합미디어로 발전했다. 기존의 라지오대외방송과 국내 라지오방송외에 세계를 상대로 하는 방송사이트와 인터넷방송, 동영상프로그람도 있다. 20년 전 많은 선배들을 모시던 나도 이제는 뒤에 유능한 후배들을 둔 선배의 한사람으로 되였다.

60이 청춘이다. 지난 60년 동안 천지개벽의 변화를 가져온 조선어방송은 청춘의 매력과 왕성한 생명력을 유지해 20년 뒤, 60년 뒤, 나아가서 영원히 시대와 함께 변화를 가져와 세계 최고의 방송으로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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