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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로 느낀 국제방송의 정취 (박은옥)
2010-07-22 16:39:03 cri
립하(立夏)가 지나면서 련이어 화창한 날씨가 계속된다. 멀리 산등성이를 따라 신록이 무르익어가고 흰구름 감도는 들판에서는 울긋불긋 꽃송이들이 너도나도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있다. 완연한 초여름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이례적으로 눈까지 내리던 봄추위때문에 작은 빙하기의 도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학자들과 전문가들도 온난화를 리유로 지구위기설을 제기했었다. 그래서인지 성큼 다가온 올해 여름은 한층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러면서 벌써부터 그 뜨거운 여름해살이 기다려진다. 또 올해 7월에는 우리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방송이 60주년 맞게 된다. 한여름에 만들어갈 그 즐거운 추억을 생각하니 밀려오는 감동의 물결에 그냥 가슴부터 뜨거워진다.

텔레비죤의 출현과 보급으로 위기를 맞았던 라지오방송이고 인터넷을 비롯한 뉴미디어의 등장으로 도전과 시련에 직면해야 했던 국제방송인만큼 60주년을 맞는 그 감회는 더욱 남다를수밖에 없다. "막내"로 입사해 뒤도 못 돌아보고 달려온 세월이 24년이다. 그래도 방송에 대한 열정과 애착에서는 무정한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지 않는다. 늙을줄 모르는 방송의 덕일수도 있겠다. 1986년, 나는 연변인민방송국에서 5년 근무 경력을 가지고 직장을 중국국제방송국으로 옮겼다. 수도로 향하는 설렘과 함께 기숙사 룸메이트가 인연이 돼서 그토록 믿고 따르던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초대 아나운서 박정의 언니의 "소중한 기회, 노력의 시작"이라는 좌우명을 마음에 지니고 고향을 떠나 또 다른 조선어방송집단의 일원이 된것이다.

그러나 큰 무대는 분위기부터 사뭇 달랐다. 12년만에 맞는 후배라서 그런지 아나운서선배들은 한결같이 나를 반갑게 맞아줬다. 중국의 "리상벽"(조선의 유명한 방송인), ﹑"최성원"(조선의 인민방송인)과 "김동건"(한국 유명한 아나운서)을 꿈꿨던 선배들이였기에 첫인상에서도 바로 그 큰뜻이 느껴졌다. 프로그람의 최종전달자 역할을 하는 아나운서 집단이라는 의미에서 이들이 지닌 품위와 이들이 발산하는 매력은 바로 나에게 현재 우리 방송의 정취와 전통으로 "입력"되였다. 지금도 이들이 만들어낸 자양분은 우리 방송의 생장"호르몬"으로 큰 역할을 하고있다. 훌륭하게 성장한 후배들을 지켜볼 때마다 이런 느낌은 훨씬 더 선명한 화면으로 다가온다.

나에게도 이런 훌륭한 아나운서들을 운명적인 동료, 선배로 모실수 있게 만들어준 고마운분들이 몇분 계신다. 그러나 오늘은 공적인 립장에서 적어보는 글인것만큼 사적인 감정은 가능한 자제하겠다. 그냥 속으로 그 고마움을 다시금 되새겨보면서 빛이 바래지 않도록 더욱 가슴깊이 간직할 생각이다.

방송기술의 비약적인 발전과 라지오활성화를 위한 정부의 대폭적인 지원이 밑거름이 되면서 라지오는 또다시 신속성과 참여성 등의 매력적인 특성으로 경쟁력을 갖추면서 예전의 사랑을 되찾게 되였다. 국제방송국 조선어방송도 명실공히 중조, 중한간의 활발한 경제﹑문화교류에 보다 훌륭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대표적인 매체로 다시 정착했다. 청취여건의 부단한 개선으로 이런 영향력은 계속 확대될 전망이다. "보이는 라지오"로 실황중계된 건국 60주년 기념 열병식과 상해엑스포 개막식이 조선과 한국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것도 이런 측면에서 해석할수 있겠다. 라지오아나운서를 지망하는 사람들도 전에 비해 많이 늘었다. 이들을 위해 우리 국제방송국 서창술﹑ 김태근 아나운서,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의 "골든마이크" 박청죽아나운서, 연변인민방송국 간판아나운서였던 서방흥아나운서 등이 좋은 입문서를 펴냈다. 또 친구인 김계월아나운서와 윤련월아나운서는 현재 연길에서 아나운서 실무교육을 실시하는 명문"아카데미"를 운영하고있다. 북경에서는 대학생들이 방학이면 가끔 우리 방송국을 찾아 아나운서 기량도 뽐내는 한편 방송에 대한 리해도 도모한다. 이런 후배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글이 되였으면 좋겠다. 지침서나 가이드라인이 아닌 국제방송국 조선어방송의 남다른 향기로 이들에게 다가갈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4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가면 선배들의 모습에 비춰진 세월의 흔적에서 나는 다행스럽게도 60년 전 국제방송의 첫 모습까지 어렴풋이 더듬어볼수 있었다. 제1대 아나운서였던 리련숙선생님이 정년퇴직하면서 내가 입사했다. 그래서 선생님이 직접 방송하시는 모습은 옆에서 직접 지켜보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도 무척 아쉽다. 그러나 퇴직후에도 선생님께서는 방송에 대한 애착이 여전하셔서 자주 사무실에 들려 후배들을 격려하셨다. 그때마다 나는 선생님의 고운 자태에서 세월의 풍파를 이겨낸 국제방송의 정숙함을 느낄수 있었다. 이분들은 뜨거운 열정과 불타는 의지로 건국 초기의 어려운 행군길에 올라 밤잠을 설쳐가며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방송을 이웃 나라들과의 평화﹑, 친선, ﹑단결을 도모하는 중요한 창구로 정착시켰다. 또 조선전쟁의 발발과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으로 그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위상도 높아졌다. 그러면서 방송시간도 늘고 프로그람도 다양해졌다. 이렇게 짙은 호소력을 가진 정다운 멜로디는 1960년대의 포근한 아침을 여는 서광이 되여 후배들을 불렀다.

리성호선생님, 김춘선선생님과 신정자선생님이 2세대로 아나운서 집단에 합류한것이다. 리성호선생님은 1960년, 중앙인민방송국의 조선어방송이 잠시 중단되면서 자리를 국제방송국으로 옮기셨다고 한다. 나는 연변에서 근무할 때부터 리성호선생님의 명성을 익히 들었다. 많은 국내 조선말방송 남자아나운서들이 너무나 본받고싶어하는분이셨다. 그런데 내가 입사했을무렵에는 선생님께서 건강이 너무 안 좋으셔서 출근을 제대로 못하고계셨다. 몇번 뉴스를 같이 방송했었는데 잘 보이고싶어 긴장해하는 나를 아버지같은 자애로운 미소와 눈빛으로 격려해주셨다. 무척 힘들어하시면서도 권위성과 론리성, 친근감을 끝까지 지키셨던 자랑스러운 선배님이셨다. 그리고 2년 뒤, 그는 만류하는 후배들의 손길을 뿌리치고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먼길을 떠나셨다.

수동타자기 몇대만 조심스레 소리내는 숙연함속에 고인과 마이크앞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했던 김춘선, 신정자 선생님은 활기 넘치던 청춘이 그리울수밖에 없었다. 두분은 모두 사범학교를 갓 졸업한 인기만점의 소학교 처녀선생님에서 리성호선생님의 후배가 되셨다. 그래서인지 두분 역시 늘 긍정적이고 따뜻했으며 동정심도 많았다. 항상 진정한 동료애와 성실의 참뜻을 몸으로 실천하면서 방송에서는 최선을 다해 오차 없는 완벽함을 추구했다. 이같은 깨끗한 령혼덕분인지 국제방송국에서 조선어방송부는 청결하고 정돈이 잘 돼있는 부서로도 유명했다. 이런것들이 차츰 전통으로 뿌리내리기 시작하면서 1960년대부터 조선어대외방송은 또 한국, 일본과 쏘련 연해주일대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그때는 이데올로기대립에 많은 신경을 써야 하는 시기였지만 선배님들은 한결같이 정치적인 감각과 원칙이라는 대세관(大局观)을 길러 방송의 품위를 높였다. 그러면서 1970년대 도약의 발판도 마련하였다.

1970년대는 동트는 아침에서부터 활기와 생동감이 느껴졌다. 얼마후 국제방송국 조선어방송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는 "삼총사"가 등장한것이다. 서창술, 김태근, 리정옥 아나운서는 엄선을 거친 최상의 "재료"로 "원산지"에서 직접 북경에 "공수"되였다. 그리고 처음부터 선배들의 정성어린 손끝에서 "맛있는 김치"로 태여나기 시작했다. 곱게 다듬어진 다음 깨끗한 소금물에 담겨졌다가 갖은 양념과 어우러지면서 특유의 맛과 향기를 찾은것이다. 또 조선에서 파견된 초대 방송전문가들로부터 방송언어의 순화사용에서 화술리론에 이르기까지의 "숙성"과정을 거쳤다. 국내 다른 조선어방송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기회였다. 때문에 고된 훈련이 반복되는 과정에서도 최고 아나운서를 지향하는이들의 무한도전은 그칠줄 몰랐다. 도서관과 열람실, 자료실에도 이들의 부지런한 발걸음이 이어졌다. "소설랑독의 대가"로 불리는 서창술아나운서, "꽃중의 꽃" 리정옥아나운서와 "시즌 전관왕" 김태근아나운서는 아무나 되는것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등장인물의 성격을 정확하게 파악해 목소리 톤과 음색의 변화로만 다양하게 형상화해야 하는 작업인만큼 소설랑독은 뛰여난 화술기량을 필요로 한다. 또 이야기를 감칠맛나게 풀어나갈수 있는 서술능력도 지녀야 한다. 거기다 서창술선배는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타고난 맑은 목소리와 풍부한 음량도 가졌다. 그래서 예술단의 가수 오디션을 통과한적도 있다고 한다. 리정옥아나운서는 항상 누구보다 아나운서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모든 일에 가장 필요한 존재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늘 밝은 모습으로 기사내용에 덤으로 감동까지 실어보내면서 화려한 이미지와 활달한 성격으로 조선어방송의 "무용수"로도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김태근아나운서는 전천후(全天候)를 소화하는 "종합방송인"이다. 그는 부지런한 영농군의 자세로 구슬땀을 쏟아부은 결과라고 말한다. 쟝르를 불문하고 원고만 들면 모든 방송을 깊이있게 소화하는데 구성작가, 기자, 리포터, 사회자, 프로듀서의 령역까지 마음대로 넘나든다. 덕분에 요즘은 후배아나운서들도 이런 "바쁜 삶"의 매력을 느낄수 있게 되였다.

개혁개방의 물결을 타고 찾아온 20세기 80년대는 국제방송이 대외교류를 통해 전성기를 만들어가는 시기였다. 리련숙선생님과 신정자선생님이 다녀온 뒤로 "문화대혁명"때문에 10여년간 중단되였던 중조 량국간 아나운서교류도 다시 물고가 트이기 시작했다. 김춘선선생님과 서창술, 김태근, 리정옥 아나운서가 선후로 조선중앙방송위원회와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실무연수와 리론교육을 받고 돌아왔다. 조선에서는 반대로 중국어방송 아나운서들이 우리 방송국에 파견되여 중국어방송 실무교육을 받았다. 내가 북경에 도착했을 때는 조선 연수 순번이 입사동기인 백일승아나운서와 나에게 돌아와있었다. 백일승아나운서는 나와 동기임에도 대학신입생이라 입사수속이 간단해 나보다 반년 정도 빨리 근무를 시작했다. 짧은 시간임에도 백일승아나운서는 이미 "박힌 돌"이 되여있었다.

한편, 나에게는 이미 "연변인민방송국 제조"라는 꼬리표가 달려있어 그냥 정기적인 "유지 보수"로만 만족해야 했다. 이런것에 "불만"을 품고 아나운서를 그만둔분도 계신다. 나의 유일한 연변인민방송국 아나운서 선배였던 윤봉현선생님이다. 윤봉현선생님은 아나운서의 사명감 대신 "웃음"으로 조선어방송의 력사를 쓰고싶었다 한다. 그후 윤봉현선생님은 조선어방송부에서 "시사정치담당 기자"를 거치며 "중국국제방송국 제조"로 탈바꿈해 조선어부 주임까지 력임했다. 이렇게 아나운서에서 직책을 전환한분들로는 또 1964년에 입사한 장원천선생님과 1975년 길림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 아나운서에서 직장을 북경으로 옮긴 김희남선배님이 계신다. 장원천선생님은 조선어부 소속의 제1아시아쎈터 부주임과 초대 중국국제방송국 서울 특파기자도 력임했다. 김희남 선배님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당시 기량을 바탕으로 오래동안 나와 함께 "라지오잡지" 진행을 맡았다. 선배님은 다른 뜻을 품어서가 아니라 성대질환때문에 아나운서직을 그만둘수밖에 없었다며 가끔씩 아쉬움을 털어놓기도 한다.

그러다가 1987년 나와 백일승아나운서는 조선중앙방송위원회에서 고정영애선생님의 "제자"로 되는 영광을 안게 된다. 그리고 반년 뒤 나는 국제방송국 분위기에 완전히 빠져들어 선배님들과 함께 조선어방송의 력사적순간들에 동참할수 있었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중한 량국 사이의 방송교류협력이 활발한 양상을 띠게 되자 한국청취자들이 선호하는 정감어린 방송방식과 따스한 이미지의 진행분위기도 갈수록 중요한 존재로 다가왔다. 이무렵, 나는 북경에서 당시 서영훈 한국KBS 사장과 국제협력실 정량 실장을 만난것이 인연이 되여 친척방문수속으로 현임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 손명화아나운서와 함께 처음으로 중국에서 KBS로 아나운서 연수를 떠나게 되였다. 연변인민방송국 서방흥선배님과 흑룡강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 박청암아나운서도 현지에서 연수프로그람에 합류했다. 한국어능력시험은 물론 론술과 작문, 실무 시험에서 수백 대 일의 경쟁을 통과한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KBS아나운서들은 대부분 순간적인 언어구사능력과 전달능력이 뛰여났었다. 또 륜리의식과 인성, 창의성을 돋보이면서 텔레비죤과 라지오 프로그람을 동시에 진행하고있었다. 급속하게 변화하는 미디어환경을 먼저 접해볼수 있는 기회였다. 어떤 강압적인 틀에서 벗어나 청취자들과 한결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소통하고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도 중조, 중한 량국간의 방송교류와 협력은 계속됐다. 표준 언어와 어법, 억양과 속도감에서 조선과 한국은 많은 차이를 보였으나 량국 모두가 방송상대국이였던만큼 우리는 한결같이 비판적인 시각이 아닌 따뜻한 마음으로 이 모두를 존중하며 우리 방송만의 특성을 찾기 위해 지혜를 모았다. 1990년대 초반에 입사한 김금철아나운서와 김철아나운서, 후반에 입사한 리명란아나운서가 이를 위해 선후로 조선과 한국 연수프로그람을 다녀왔다. 나는 늘 김금철아나운서가 소리 빛갈과 억양에서 한국 KBS의 표영준아나운서를 많이 닮았다고 생각한다. 론리적인 전달과 침착한 진행에도 그런 느낌이 묻어있다. 지금도 연변조선족자치주 설립 50주년 경축행사와 북경유니버시아드 개막식을 같이 생방송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김금철아나운서의 순발력이 빛났던 순간이기도 했다. 얼마전까지 또 우리 방송의 서울 특파기자로도 활약했다. 물론 지금은 중견아나운서로 다시 제자리로 복귀하였다. 리명란아나운서는 내가 녀자후배로 가장 먼저 맞은 아나운서다. 지금은 정확한 발음과 박진감 넘치는 리듬으로 뉴스방송에서 두각을 나타내고있다.

1990년대는 아나운서들의 활약이 무척 두드러졌던 시기이기도 하다. 12부작 라지오드라마 "가정교양"과 10부작 라지오드라마 "대추골의 젊은이들"이 탄생해 청취자들로부터 많은 인기를 얻었다. 교외쪽에 위치한 신정자선생님의 "별장"에서 대본을 연습할 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감개무량하다. 또 비슷한 시기, 조선어방송부의 전체 직원들이 출연한 설특집방송에서 리정옥선배님의 주체버전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이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던 추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그러나 영원히 지지 않는 예쁜 꽃은 어디에도 없었다. 먼저 백일승아나운서가 간부로 진급해 아나운서집단을 떠나더니 새 방송청사로의 이전과 디지털화의 실현을 바라보며 김춘선선생님과 신정자선생님이 퇴직을 결심한것이다. 중국어강좌를 방송하시면서 발음 한마디한마디에까지 각별한 신경을 쓰셨던 김춘선선생님과 어떤 원고든 최소한 두세번은 큰소리로 읽어보고나서야 스튜디오를 찾으셨던 신정자선생님은 이렇게 방송에 대한 무한한 책임감과 열정을 후배들에게 보내는 편지로 남기시고 무대를 양보하셨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지식정보화시대가 열리자 그 무대에 밀레니엄세대들이 등장했다. 림봉해, 한창송 아나운서와 송휘, 리준 아나운서가 선후로 입사해 한가족이 된것이다.

림봉해아나운서는 흑룡강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의 원로아나운서 림홍선생님의 조카이다. 고모를 닮아서인지 예쁜 목소리를 타고났다. 그리고 항상 웃음 띤 얼굴과 차분한 자세로 친근감을 살리며 청취자들에게 먼저 다가간다.

한창송아나운서는 지금도 내가 진행하는 "문화기행"이라는 프로그람의 "당대문화명인록"코너에 매주 "브리지"로 등장한다. "그들은 력사를 개변시킨 위대한 인물은 아닙니다. 하지만 평범한 그들의 평범치 않은 기여가 우리의 문화를 살리고있습니다. —문화명인록", 이렇게 몇글자 안되는 분량이지만 음색, 억양, 휴지와 속도에서 감칠맛을 살려 이어지는 프로그람 내용을 기대하게 만든다. 인터뷰방송에서도 이렇게 맛갈스러운 진행솜씨를 뽐낸다.

송휘아나운서는 맑고 탄력있는 목소리로 모범생이미지를 풍긴다.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한 그는 표정과 행동연기까지 동반하며 성대모사를 구사하는것으로 분위기메이커를 자처하고있다. 덕분에 요즘은 대형행사 사회자로도 인기가도를 달린다.

"부자집 도련님"의 깔끔한 외모를 자랑하는 리준아나운서는 밀레니엄세대답게 인터넷에 특별한 관심과 실력을 가지고있다. 조선어부 인터넷사이트의 웹디자인과 웹마스터로도 활약을 펼치고있다. 또 내가 진행하는 프로그람에 나와 주간 문화계 소식도 전해준다. 늘 순수한 모습으로 청취자들에게 신뢰감과 편안함을 선물하고있다.

이런 재간둥이후배들을 바라보며 얼마전 리정옥아나운서와 서창술아나운서도 선후로 정년퇴직을 맞았다. 김태근아나운서도 올해가 마지막 근무해이다. 이들에게 후배들은 티없이 깨끗한 수정마이크를 선물했고 또 선물할 예정이다. 등려군의 "그대여 언제 다시 오려나"가 또 귀전을 맴돈다. 김태근선배님을 따라 즐겨 찾던 "사과밭" 꽃향기도 한층 그리워진다.

이런 후배들을 바라보며 나는 국제방송국 조선어방송의 오늘과 래일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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