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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도 짧았던 해외근무생활 (김동광)
2010-07-22 16:39:03 cri
중국국제방송국은 현재 전세계에 30여개 해외지국을 두고있다. 그중 서울 마포구에 있는 한국지국은 우리 조선어방송부 기자들에게 넓은 무대를 펼쳐주고 더 다양한 경험을 쌓게 해준다. 지금까지 조선어부에서 총 6명이 한국지국에 근무, 특파기자로 활약했다. 나도 행운스럽게 2004년부터 2006년까지 한국 특파기자로 파견되여 말로만 듣던 "해외근무"를 하게 되였다. 힘들면서도 행복하고 재미있었던 그 일상속으로 잠간 되돌아가볼가 한다.

나는 "진둥광"으로 통했다

서울에는 중국국제방송국 지국외에 신화사, 인민일보 등 타언론사 기자들도 포진해있다. 이들은 대부분 한족이지만 조선어를 거의 완벽하게 구사하고 일부는 조선, 한국에서 언어연수를 받았거나 근무한 경험이 있는 베테랑기자들이다. 처음에는 그들의 한국어실력에 나도 깜짝깜짝 놀라군 했다. 아마 한국분들도 그런 생각이였을가, 내가 한국어로 뭘 말하면 마냥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군 하였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한국어는 어디서 배웠냐, 고향은 어디냐고 문의해온다. 한국어를 잘 배웠다고 치하하는 말도 잊지 않는다. 내가 조선족이고 집이 연변에 있다고 소개하면 그때부터는 급속도로 가까와진다.

한국에 있는 2년간 행사나 연회에 참가할 때면 명찰에는 내 이름이 언제나 한국어표기로 "진둥광"으로 씌여있었다. 그래서 초면인분들은 나를 성씨가 진씨인 한족으로 오해하기가 다반사였다.

한번은 김제라는 도시에 모내기체험행사로 간적이 있었다. 외국인초청행사였는데 수십명 외국인들중에 우리 기자들도 동행했다. 즐겁게 일하고 푸짐한 새참을 먹은후에는 현지 기자들이 외국인을 인터뷰하는 시간을 갖게 되였다. 여러 중국기자들의 "추천"으로 내가 인터뷰를 받게 되였는데 현지 텔레비죤방송국의 기자가 조심스레 한국어로 말하면 안되냐 하고 물어온다. 그래서 선뜻 대답을 하고 카메라앞에 서서 몇분간 얘기를 나누게 되였는데…역시 내 예상대로 몇몇 한국기자들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어린다. 이어서 "공식질문"이 이어진다. 한국어를 어디서 배웠냐가 이어지고 나는 또 수없이 반복했던 고향과 언어에 대해 부연설명을 해야 했다. 재미있는 제스처와 "어눌한" 외국식한국어를 기대했던 한국기자들에게는 참으로 미안한 순간이였다. 그래서 다시 중국어로 몇마디 소감을 말했더니 그제서야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들이 보인다. 난 다만 어릴 때부터 써온 우리 말을 한것뿐인데, 그게 더 편할뿐인데 한국인들은 "진씨" 성을 가진 중국기자의 한국어실력에 감탄까지 하니 이런 아이로니가 어디 있을가?

또 한번은 한국의 모 그룹의 임원이 중국기자들과 초청식사를 함께 한적이 있다. 당연히 내앞에 있는 명찰에는 "진둥광기자"라고 씌여있었다. 두루두루 얘기를 나누던중 나하고도 몇마디 나누게 되였다. 진씨면 중국에서는 큰 성씨가 아니냐, 한국으로 치면 어느 성씨 정도로 되느냐고 묻는데 나로서는 송곳방석에 앉은 느낌이라고 할가. 그래서 김씨가 진씨로 "둔갑"한 연유을 말했더니 허허 웃으면서 다시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는 특별히 중국술 한병을 더 올려서 다같이 건배를 하자는것이였다. 덕분에 분위기는 한껏 무르익고 나도 편한 마음으로 즐길수 있었다.

특파기자라는 직업의 특성상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많은 얘기를 나누게 되고 내 성씨에 대한 재미있는 "오해"도 계속됐다. 택시기사들과 얘기를 나눌라치면 혹시 강원도사람이 아닌가 묻고 어떤분들은 내가 고향분들과 통화하는것을 듣고는 "이북사람"이 아닌가고 눈여겨볼 때도 있다. 그래서 어떤 때는 그냥 진둥광기자라고 한어발음으로 자기소개를 한다. 상대방에게는 약간 미안한 일이지만.

특파기자는 지칠 새도 없다

외국에서 근무하는 특파기자의 경우 독자적으로 대부분의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언제나 긴장의 끈을 놓지 말고 눈과 귀를 열어놓고있아야 한다. 본사에서 특별히 원고주문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 경우 수시로 발생하는 사건에 대해 기자 자신이 판단하고 원고를 쓰고 취재를 한다. 때문에 특파기자 생활은 자유로우면서도 언제나 "촉각"을 세우고있어야 한다는 모순의 련속이다. 특파기자에게는 밤과 낮이 따로 없고 휴일이 따로 없다. 그래서 집에서도 항상 텔레비죤뉴스를 듣고 인터넷을 수시로 체크한다. 외출을 할 때에도 차에서 라지오를 듣는것이 기본이다.

아침잠에서 깨여나면 배달된 신문을 읽는것이 첫 일과, 그것도 한부가 아니라 몇개 신문사의 신문들을 꼼꼼이 읽으면서 기사거리를 체크한다. 중요한 내용들은 즉시 원고를 만들어 본사에 보낸다. 큰 사건이 터지면 밤잠을 제대로 못 자는건 기본이고 식사도 건너뛰기가 일쑤다.

가장 인상에 남는것은 2005년 부산에서 있은 APEC정상회의 취재였다.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두주일 남짓하게 힘들었지만 신명나게 일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호금도주석이 한국을 방문, 한국 국회에서 연설하는 일정이 있었는데 에이펙취재차로 부산에 내려가있던 나는 다시 서울로 올라가서 처음으로 한국 국회의사당에 들어갔고 호금도주석의 연설을 현장에서 듣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청와대에서 가진 두 나라 정상의 공동기자회견장에도 기자신분으로 참석했다. 그리고는 부산으로 내려가는 기차에서 원고를 작성하였다.

에이펙정상회의, 원고들이 수없이 쏟아져나오고 하루에도 기자회견이 몇번씩 열린다. 시민들을 취재하고 주최도시 관원들을 취재하고 자원봉사자들을 취재하고…본사에서 요구하는 원고는 끝이 없고 국내 다른 언론매체들에서도 원고청탁전화가 줄을 잇는다. 방송원고를 보내고나면 텔레비죤방송의 전화련결프로를 하고 그러면 또 신문사에서 원고독촉을 해온다. 몸이 하나뿐인것이 야속하고 하루가 24시간인것이 한스러울뿐이다. 그 유명하다는 부산 광안리의 야경을 감상할 시간도 없었고 부산명물이라는 생선회를 맛볼 시간도 없었다.

대형행사취재는 특파기자에게 있어서 소중한 기회이고 경험이다. 때문에 모든 기자들이 특종을 찾아서, 더 빠른 뉴스전송을 위해 촌각을 다투는 경쟁을 한다. 그 경쟁에서 이기는 길은 하나뿐이다. 더 많은 발품을 팔고 더 많은 취재대상을 만나고 더 빨리 원고를 작성하는것이다. 기자들은 언제나 특종에 목마르다. 허나 특종은 언제나 있는게 아니고 또 준비된 기자에게만이 차례지는 "특혜"라고나 할가. 지금도 특종을 찾아 한국을 누비던 외국 특파기자들의 모습이 선하다.

간혹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몇몇 기자들끼리 명절이나 휴일에 지방에 갈 때가 있다. 원래는 휴식을 취하면서 "재충전"을 하려는 목적이나 떠날 때부터 특파기자는 다르다. 우선 투숙하는 방에 인터넷이 잘되는지, 유사시에 되돌아올 시간은 얼마나 되는지 등등을 체크한다. 취재용 록음기나 노트북, 카메라를 챙기는건 몸에 밴 습관이고 가는 길, 오는 길에서도 핸드폰으로 인터넷에 접속해 뉴스를 살펴본다. 길을 떠났다가도 사건이 터졌다고 하면 즉시 되돌아오기도 한다. 그래서 "재충전"의 시간이 결국은 "방전"으로 끝나고마는 경우가 많다.

해외기자 생활, 그 화려함속의 외로움

특파기자들의 "단조로운" 일상속에서 친구들이 든든한 버팀목역할을 한다. 그중에는 명절때 찾아와주고 집에도 초대하고 좋은 체험을 할수 있는 곳들에 동행해주는이들이 있었다. 객지생활의 "나그네설음"을 한국에서 사귄 친구들과 어울리며 더 재미있게 보낼수 있었다. 허나 혼자 하는 특파기자 생활에 명절때면 허전함과 외로움이 밀려올 때가 많다.

매년 한가위때가 되면 한국은 민족대이동이 시작된다. 아는 친구들은 다 고향에 가고 텅 비다싶이 한 서울에 우리만 남은 기분이다. 그럴 때면 친인과 가족들이 한결 그립고 손에 일이 잡히지 않는다.

2005년 한가위, 당시 노무현대통령이 외국인들에게 보내는 한가위선물중에는 우리 외국기자들의 몫도 있었다. 몇십만명 외국인들중 몇천명에게만 보낸다는 대통령선물, 지방특산물 세트와 한국 명주 한병, 너무도 과분해서 사진도 찍어 본사에 보내고 기사로도 쓰고 "방정"을 많이 떨었다. 친구들한테 자랑도 하고 함께 나누어먹으면서 어깨도 으쓱해졌다.

그런데 정작 한가위날이 되니 친구들은 며칠 후 다시 보자 하고는 고향에 내려간다. 혼자 남은 외톨이신세로 울적한 심정이였는데 마침 지국장이 전화를 걸어온다. 명절인데 어디 좋은 식당에 가서 점심식사를 하자고. 얼싸 좋다 하고 두사람이 식당을 찾아나섰는데 그렇게 많은 식당들이 명절을 쇤다고 문을 닫고있을줄이야. 사무실 주변의 단골식당을 다 뒤졌으나 결국 두손을 들고말았다. 이제 화려한 식사는 포기하고 제발 구멍가게 식당이라도 나타나주십사 하고 빌 지경이였다. 한참을 헤매다가 다행스럽게도 길가의 기사식당을 발견했다. 저도 모르게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그런데 주문을 하다보니 또 발견한 하나의 기쁨, 식당 주방장이 할빈출신 조선족이란다. 이런 인연이 있을줄이야. 그 아주머니가 중국에서 가져왔다는 월병을 특별히 우리들에게 내주는데 아, 그때의 심정이란 고향의 누님을 만난 기쁨 이상이였다. 반찬도 더 많이 담아주고 소주도 한잔 함께 마셔주던 그분, 한가위때면 어김없이 내 회억의 갈피속에 떠오른다.

해외기자 생활을 하다보면 반가운 손님들이 많다. 바로 국내에서 오는 동료들이나 친구, 대표단이다. 기다림에 마음이 설레고 만나면 반갑고 회포를 풀다보면 시간이 짧게 느껴지고 헤어질 때가 되면 아쉽다. 국내소식, 회사소식 시시콜콜 얘기 나누다보면 말하는 사람은 지치나 듣는 우리는 갈수록 정신이 또렷해진다.

한번은 국내에서 방문온 재정부대표단을 동행하게 되였는데 이분들이 들어보지도 못한 재미난 얘기를 어찌나 많이 하던지 며칠간 방문일정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떠나기 전날에는 수고를 많이 했다며 너무 술을 권하는통에 혼나기도 했다. 내가 들려주는 평범한 일상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여주고 힘내라고 토닥토닥 어깨를 쳐주던 그들, 나를 동생처럼 대해주던 방문단 성원들과 공항에서 헤여질 때는 정말 마음이 짠했다. 그리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던 길은 왜 그리도 외롭고 쓸쓸하던지.

다행히도 인터넷이 발달해 메신저가 많은 힘이 되여주었다. 친구들, 동료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가상공간에서 너무나 진심어린 따뜻한 관심을 베풀어주고 나의 고독과 외로움을 시원히 날려주었다. 그래서 항상 든든했고 이튿날이면 새로운 각오로 아침을 맞이하군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분망했던 해외근무 생활에서 고독과 외로움은 하나의 통과의례였고 피해갈수 없는 과정이였던것 같다. 또 그런 과정이 나를 한층 성숙하게 만들고 더 자신있게 홀로서기를 할수 있게 만든게 아닐가.

2년간의 한국 파견근무기간은 길고도 짧았다. 수많은 사건보도로 하얗게 밤을 지새고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 인연을 쌓았고 수많은 곳들을 내 기억에 담았다. 허나 귀국행 비행기안에서 내 기억의 편린들을 모으면서 보니 2년이 정말 한순간이였던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들은 금쪽같은 시간들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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