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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묘향산에서 찾아라! (김훈)
2010-07-22 16:40:56 cri
백두산,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과 더불어 조선반도의 5대 명산으로 꼽히는 묘향산. 묘향산은 조선의 서북부—평안남도와 평안북도, 자강도의 경계점에 자리잡은 명산이다. 산 이름은 이전에 연주산, 태백산으로 불려오다가 11세기 때부터 기묘하고 향기 풍기는 산이라 해서 묘향산으로 불렸다 한다.

평양에서 묘향산까지의 거리는 160킬로메터 정도이다. 아직 오염이 뭔지 모르는 청천강 상류를 따라 올라가니 깊은 골이 나진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막힌 곳에 이르니 여기가 바로 묘향산 입구인 향산읍이란다. 향산읍은 묘향산에서 흘러내리는 묘향천이 청천강과 합류하는 합수목에 자리잡고있었다.

우리일행은 승용차로 향산읍에서 묘향천을 따라 8킬로메터 정도 달려 향산호텔에 이르러 려장을 풀었다. 여기서부터 묘향산관광이 시작된다고 하지만 저녁무렵이 다 되여 우리는 묘향산관광을 이튿날로 미룰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번까지 두번째로 묘향산을 찾는다. 1992년에 청년대표단 일원으로 관광차로 묘향산에 왔지만 이번은 촬영차로 왔다. 이번 촬영의 주되는 목적은 묘향산에 남긴 서산대사의 발자취를 추적하려는데 있었다.

서산대사는 4대 명산을 평하는 시에서 이렇게 쓰고있다. "금강산은 수려하나 장엄하지 못하고 지리산은 장엄하나 수려하지 못하고 구월산은 장엄하지도 수려하지도 못하고 묘향산은 장엄하고 또 수려하다."

묘향산에서 제일 높은 봉은 비로봉이다. 불교에서 비로불은 태여나기전의 전생을 책임지고 석가여래불은 현세를, 아미타불은 래세의 극락을 책임진다고 한다. 그중에서 제일 높은 불은 비로불이라고 하는데 비로란 높다는 뜻, 그래서 묘향산에서 가장 높은 봉을 비로봉이라고 이름지었다 한다. 법왕봉, 오선봉, 향로봉, 천왕봉, 석가봉, 돗대봉들을 거느린 비로봉의 표고는 1,909.6메터이다.

묘향산은 절승의 명산이기도 하지만 높은 산, 깊은 골마다 암자가 있고 불도수행에 나선 불교신자들의 사리가 처처에 묻혀있어 말 그대로 불교의 성지이기도 하다. 묘향산에서 가장 큰 절은 보현사이다.

보현사는 조선 5대 사찰의 하나이다. 보현보살의 이름을 따서 보현사라고 했다고 한다. 기재에는 묘향산에는 360여개나 되는 사찰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 남아있는것은 보현사를 내놓고 대체로 작은 암자들이다. 묘향산의 현존하고있는 암자들 30여개가 모두 보현사에 속한다.

우리는 보현사를 첫 촬영지점으로 택했다. 한것은 보현사가 묘향산에서 가장 큰 절이고 서산대사의 영정을 모신 수충사가 보현사안에 있기때문이였다.

보현사의 첫 문은 조계문이다. 문안에 들어서면 보현사비가 맞아준다. 보현사비는 1141년 김부식이 비문을 지었는데 비문에 새겨진 제목은 인종의 필적이라고 한다. 비문에는 황해도 황주에 살던 탐밀이라는 스님이 1028년에 묘향산에 와서 안심사를 세우고 그의 조카인 광학이란 사람이 1042년에 243간 규모의 보현사를 세웠다고 적혀있었다. 비문에는 1067년에 문종이 보현사에 땅을 하사했다는 기록도 새겨져있었다.

"보현사는 5만여평방메터 문화유물 보존구역을 가진 로천력사박물관입니다. 보현사는 고려 정종 8년(1042년)에 처음 세워진후 천여년의 력사를 내려오면서 여러번 고쳐 세웠는데 전쟁시기 대웅전과 만세루가 미군 폭격에 불탔습니다. 지금 보시는 이 비석도 비행기 기총탄에 맞아 저렇게 전쟁의 상처를 남기고있습니다."

안내를 맡은 묘향산 강사지도원의 말을 들으면서 우리는 청정한 불교경지에 남긴 전쟁의 상처를 가슴아프게 바라봤다. 반도땅 그 어디에 가나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다는 말이 참으로 실감이 갔다.

보현사의 두번째 문은 해탈문이다. 문안에 들어서니 성불한 부처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보살로 화신했다는 문수보살과 부처를 도와 중생을 제도한다는 보현보살이 석가여래를 보좌하고있었다. 불교에서는 문수보살이 여래의 왼편에서 지덕과 체덕을 담당하고 보현보살은 여래의 오른쪽에서 리덕, 정덕, 행덕을 담당한다고 한다. 보현사의 세번째 문은 천왕문인데 이 문에 들어서면 동서남북 네 방위를 지키는 호법신인 호세천, 호세사천왕, 사천대왕, 사대천왕에 의해 모든 악귀가 없어진 청정한 경지라고 한다. 이 경지에는 념주나무가 한그루 서있었다. 보리수나무아래에서 석가여래가 세상을 깨달았다고 해서 그 보리수나무의 상징으로 심은것이 념주나무다.

9층 다보탑과 만세루, 대웅전을 지나면 관음전이다. 관음전옆에 만수각이 있는데 이 각은 민비가 1888년 일신의 안녕을 빌어 지은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보현사의 주지스님으로 있는 청운스님의 거처로 리용되고있는데 유감스럽게도 청운스님이 집을 비우고있어 우리는 청운스님한테서 법도를 깨칠 기회를 놓쳤다.

영산전을 거쳐 우리는 수충사에 이르렀다. 원래 수충사는 충의문을 비롯해 수충사, 비각, 연교류, 동재, 서재, 필각, 영당으로 이루어졌었는데 1915년 큰 홍수에 의해 그중 네개 건물이 파괴되여 지금은 충파문, 수충사, 비각만 남아있었다. 지금의 수충사는 1794년, 평안도감찰사 김병모의 제의에 의해 서산대사의 제자들이 그의 우국충정을 길이길이 우러르려고 지은 사당이다.

앞면이 3칸, 옆면이 2칸으로 된 사당안에는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처영대사의 영정이 모셔져있었고 서산대사의 륙환장지팽이고리와 사명당의 검과 투구가 진렬되여있었다.

기재에 의하면 서산대사는 45살에 묘향산에 와서 40여년을 기거했다고 하여 묘향산을 서산이라고도 불렀다 한다. 그가 73살에 나던 해인 1592년, 선조 25년 4월 12일에 임진왜란이 터졌다. 서산대사는 제자들인 관동의 사명당, 호남의 처영, 충청도의 영규 등에게 일러 승병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도 몸소 평안도에서 승병 1,500명을 일으켰다. 선조가 내린 8도 16종도를 관할하는 대선사직에 림한 서산대사는 7년 동안 승병을 령솔해 왜적과 싸웠다. 서산대사의 공이 컸던 사실은 당시 원군을 령솔해가지고 반도에 왔던 명나라 장수 리여송이 서산대사에게 보낸 시만 봐도 알수 있다.

나라를 위해 도적을 치매

충성이 해를 꿰뚫었으니

우러러 공경해마지않는바이다.

수충사에서 촬영을 마치고 우리는 서산대사가 묘향산에 와서 40여년간 기거했다는 금강암으로 찾아갔다. 금강암은 하늘의 신선이 내려왔다는 전설을 가지고있는 전망 좋은 강선대아래에 자리잡고있다. 금강암은 높이가 3메터, 너비가 13메터, 길이가 10메터인 바위를 지붕 삼아 지은 암자인데 건물면적이 28.85평방메터이다. 이 암자는 고려말기에 세워졌는데 암자 오른쪽에는 한번 바르면 두눈이 밝아진다는 명안수 샘이 있다. 전해내려오는 말대로 명안수 샘물이 두눈을 밝게 해준다면 혼탁한 인생살이에서 물욕이나 권세욕에 두눈이 흐려진 사람들을 죄다 여기에 불러와 눈을 씻게 했으면 얼마나 좋으랴싶었다. 서산대사는 바로 여기서 매일 명안수로 두눈을 씻고 어지러운 세상의 풍운조화를 꿰뚫어보면서 우국충정의 마음을 다듬고 다듬었으리라. 서산대사가 어지러운 세상을 한탄하여 묘향산의 향로봉에서 읊었다는 시 한수를 여기에 적어본다.

만국의 도성은 개미굴과 같고

고금의 호걸들은 하루살이 같구나.

창에 비낀 밝은 달은 청호의 벽에 비끼고

밤새도록 솔바람소리 고르지 않구나.

1589년에 읊은 이 시로 하여 서산대사는 그를 시기하는자들의 모함을 받아 옥살이를 했다고 한다. 서산대사가 옥살이를 마치고 묘향산에 돌아온후 얼마 안되여 임진왜란이 터졌는데 서산대사는 결연히 조정의 뜻을 받들어 승병을 일으켰다. 비록 그를 한해 동안 옥살이하게 한 조정이지만 서산대사는 나라와 민족의 운명앞에서 개인의 원과 한을 삭일줄 아는분이였다. 금강암에는 "청운방장"이란 편액이 걸려있었다. 안내자의 말에 의하면 금강암의 편액은 원래는 "금강방장"이였는데 서산대사의 호가 청운이기에 김일성주석의 지시에 의해 "청운방장"이라고 고쳤다 한다.

금강암은 원래 묘향산의 래원암의 한 암자이다. 래원암은 4굴 5적으로 된 암자인데 4굴이란 반야굴, 관음굴, 라한굴, 금강굴이고 5적이란 오적암, 묘적암, 향적암, 은적암, 우적암을 말한다. 래원암이 유명하여 한때는 "래원암이 없으면 묘향산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래원암은 1915년에 있은 큰 홍수 피해를 입어 지금은 서산대사가 기거했던 금강암만 남아있다.

금강암에는 서산대사의 영정이 모셔져있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서산대사는 만년에 이 암자에서 자기 화상을 그렸는데 화상을 다 그린후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오늘은 네가 나지만 후일엔 내가 너일것이다."

금강암에서 눈을 들어 앞을 보니 묘향산의 연봉이 한눈에 들어왔다.

"정면에 보이는 산은 하얗게 보인다는 백산이고 그뒤에 솟은 산은 문칠봉, 칼봉, 탁기봉, 왕모봉인데 왕모봉은 고주몽의 어머니 류화가 와서 놀았다는 전설을 가지고있어 왕모봉이라고 불리게 되였습니다. 왕모봉뒤에는 은행나무 한그루가 있는데 그 은행나무는 서산대사가 타계하기전에 꽂아놓은 은행나무지팽이가 자란것이랍니다. 전하는데 따르면 서산대사는 은행나무지팽이를 왕모봉뒤에 꽂아놓으면서 ‛네가 이 땅에 뿌리박고 살 때면 내가 다시 태여나리라.'고 했답니다. 지난해에 가보니 그 은행나무는 구새먹은 고목이였는데 고목에 생생한 새 가지가 나왔습디다."

"고목에 새 가지가 돋았으니 서산대사가 다시 태여난다는 조짐이 아닐가요."

"서산대사 같은분이 이 땅에 다시 태여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서산대사나 리순신장군 같은 란세의 영웅이 다시 태여난다면 두동강 난 반도땅의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가가 궁금해진다. 외적을 몰아낸 불세출의 영웅은 자기가 지킨 강토가 두동강이 난 현실을 두고 그저 통탄만 하고있지 않을것이다. 서산대사가 다시 태여나서 외적을 쓸어눕히던 륙환장지팽이로 강토를 두동강 낸 군사분계선의 철책을 죄다 거두어낸다면 얼마나 좋을가. 불세출 영웅의 탄생이 안타깝게 기다려진다.

우리는 금강암에서 촬영을 마치고 불교의 법보인 ≪팔만대장경≫을 소장하고있는 "팔만대장경보존고"로 찾아갔다. ≪팔만대장경≫을 고려대장경이라고도 한다. 여러차례 외세의 침략을 받은 고려는 부처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려고 두번에 걸쳐 1,511부 6,802권 81,258판으로 된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는데 그 원판은 지금 한국 합주군의 해인사에 있다. 강화도에 대장도감을 두고 16년이란 시간을 거쳐 완성한 대장경 목판으로 ≪팔만대장경≫을 세부 찍었는데 그중 한부가 이곳 "팔만대장경보존고"에 보존되여있다고 한다.

"팔만대장경보존고"안에는 묘향산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보존하는 보존고가 따로 있었다. 일반관광객들은 들어갈수 없는 곳이였다. 유물 보존고에는 주로 3국시기, 고려시기, 리조시기의 불상들이 보존되여있었다. 이목을 끈것은 서산대사가 타계를 한해 앞둔 84살 고령에 손수 글을 짓고 새겼다는 석가모니사리비였다. 사리비는 절반이 잘려진 상태였다. 안내자의 말에 의하면 이 사리비는 몇해 전 홍수가 지나간 강바닥에서 발굴된것이라고 했다.

"절승의 명산에 와서 력사인물의 발자취를 추적하면서 력사문화유적답사만 해서야 되겠습니까? 묘향산의 절경도 구경해야지요."

하긴 그랬다. 위인을 낳은 명산의 절경을 구경하지 않고는 발길을 돌릴수 없어 우리는 묘향산에서 절경중의 절경이라는 상원동구역을 택했다. 상원동어구에서 우리는 서부도를 잠간 구경했다. 보현사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부도라고 하는 이곳에는 16세기 이후의 44개 부도와 14개 비석이 운집해있었다. 이 부도와 비석들은 묘향산 안심사의 부도와 비석이란다.

묘향산의 금강문을 지나 금강폭포, 대하폭포, 룡연폭포를 차례로 구경하면서 우리는 인호대에 이르렀다. 인호대는 갈길을 몰라 헤매는 길손에게 호랑이가 길을 알려주어 낭떠러지우로 오르게 했다는 전설에서 이름이 지어진것이란다. 인호대에서의 폭포구경은 예로부터 묘향산 팔경의 하나라고 한다. 묘향산에서 가장 아름답고 웅장하기로 손꼽히는 84메터 높이의 룡연폭포, 구슬같이 아름다운 물방울을 뿌린다고 해서 이름 지어진 산주폭포, 하늘에서 내려오는것 같다고 해서 이름 지어진 천신폭포가 한눈에 들어왔다.

우리일행은 "향산제일암"으로 불리는 상원암에서 락조를 맞았다. 상원암은 수각, 칠성각으로 이루어졌는데 수각은 부처의 젖이라는 샘물을 위해 지은 건물이였다. 이 샘물을 마시면 병도 고치고 평생소원도 이룰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2킬로 정도 더 올라가면 릉인암이 있는데 릉인암은 묘향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암자인데 그곳에서 묘향산의 봉우리들과 청천강을 따라 펼쳐진 열두 삼천리를 부감할수 있습니다. 묘향산의 암자에서 불영암도 아주 유명한데 불영대에서 달구경은 묘향산 팔경의 하나로 되고있습니다. 불영암부근에는 석가여래 사리를 묻은 사리탑이 있습니다. 불영대 주변에는 묘향산의 특이한 꽃인 두봉화가 피는데 꽃피는 계절에 가보면 정말 장관입니다."

마음 같았으면 가보고싶었지만 락조에 발목을 묶인 우리는 아쉬운대로 포기하는수밖에 없었다. 안내자의 말에 의하면 불영암은 임진왜란때 ≪리조실록≫을 보관했던 곳이라고 한다. 임진왜란때 평민출신인 송흥록, 한춘이 20여명을 휘솔해가지고 강화도에서 리조실록을 150여바리에 나누어 싣고 묘향산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그때가 바로 서산대사가 평양전투를 금방 끝낸 뒤였는데 리조실록을 불영대에 보관하다가 1601년에 다시 묘향산에서 내가 네부를 찍었는데 네부의 리조실록을 각기 오대산, 태백산, 전족산, 서울 춘추관에 보관하다가 1606년에 다시 묘향산으로 들여왔다고 한다. 그러고보면 묘향산은 귀중한 문화유물의 보존고이기도 하다.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서 안내자는 우리들에게 밤에 좋은 꿈을 꾸라고 했다.

"오늘 좋은 구경을 했으니 꿈도 길몽을 꾸게 되겠지요."

"그럼요. 경치가 절승인데다 위인을 낳은 명산이니 명산에서 꾸는 꿈은 무조건 길몽이지요. 리성계도 묘향산에 와서 왕이 될 길몽을 꾸었답니다."

전하는데 따르면 리성계가 묘향산에 와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리성계가 양 한마리를 만나 양의 두뿔을 잡으니 뿔 두개가 빠져나가버렸고 양꼬리를 잡으니 양꼬리마저 빠졌다고 한다. 리성계가 해몽을 무학대사에게 의뢰하니 무학대사가 하는 말이 양(羊)자에서 뿔모양의 "∨"가 빠지고 꼬리모양의 "|"가 빠졌으니 왕(王)자가 된다. 그러니 왕이 될 꿈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후 리성계는 해몽한대로 왕좌에 올랐는데 왕이 될 꿈을 얻게 한 묘향산에 보은하느라고 오백 라한상을 만들어 매일 하나씩 묘향산에 시주했다고 한다.

"혹시 우리도 오늘밤 왕이 될 꿈을 꾸게 될지 모르겠군요."

"김선생이 왕이 될 꿈을 꾸시면 우리는 하는수없이 신하될 꿈이나 꾸어야겠군요. 하하하…"

그날밤 나는 꿈 한번 꾸지 않고 달게 잤다. 천하명산에서 꿈 한번 가져보지 못한것이 지금도 아쉽기만 하다.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다시 묘향산에 가서 좋은 꿈 한번 청하고싶다. 서산대사를 만나 그와 함께 우국충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꿈이 아니면 하다못해 보현사에서 목탁을 두드리는 꿈이라도 좋다. 세속에 물젖은 마음을 꿈속에서나 청정한 경지에서 다듬고싶다. 서산대사는 맑고 깨끗한 마음에 대해 이렇게 읊었다.

그대 거문고를 안고 소나무에 기대였으니

소나무처럼 마음 변치 않겠네.

내 노래 부르며 푸른 물가에 앉았으니

푸른 물처럼 마음 맑고 깨끗하네.

마음이여, 마음이여

그대와 나의 깨끗한 마음이여

소나무처럼 변치 않을 마음, 푸른 물처럼 맑고 깨끗한 마음, 그런 마음을 가지고싶은 이 마음, 묘향산아 어서 나한테 꿈을 주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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