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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의 종소리 (김훈)
2010-07-22 16:54:32 cri
천년의 왕업을 자랑하는 신라의 고도—경주를 알게 된것은 노래를 통해서였다. 바로 나의 아버지가 즐겨부르던 "신라의 달밤"이다.

아 신라의 달밤이여

불국사의 종소리 들리어 온다

지나가던 나그네야

걸음을 멈추어라

고요한 달빛 어린 금옥산 기슭에서

노래를 불러보자 신라의 밤 노래를

거대한 자연박물관으로 불리는 국제관광도시 경주를 찾은것은 찬바람이 락엽을 이리저리 굴려대는 초겨울이였다. 고색창연한 천년의 고도를 찾아가는 기분에 알맞은 계절이였다.

우리 내외는 작은외할아버지의 승용차에 앉아 부산을 떠났다. 바다를 낀 부산의 색갈이 늘 푸른색이라면 경주의 색갈은 노오란색이였다. 부산 부두의 배고동을 멀리 하니 경주의 불국사 종소리가 발목을 잡아끈다. 말 그대로 불국사의 종소리는 경주의 부름소리였다.

경주에서 해발고가 가장 높다는 토함산(吐含山)이 앞을 막아선다. 신라때에는 동악이라고 하여 동해로부터 침범하는 왜적을 막는 호국의 진산(镇山)으로 신성시해왔다는 토함산은 바다의 바람과 습기, 하늘의 구름과 안개를 뱉고 머금는 마력의 산이라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한국관광의 제1번지로 각광받는 불국사는 토함산 서쪽기슭에 자리잡고있었다. 불국사는 현세불인 석가모니, 법신불인 비로자니불, 극락정토를 주재하는 아미타불을 함께 모시고있어 완벽한 불국의 세계라고도 불린다.

불국사는 웅장한 네개의 석교를 내리드리우고 우릴 반겼다. 우측에 있는 청운교는 대웅전으로 통하고 좌측에 있는 련화교와 칠보교는 극락전으로 통한다고 했다. 그 어느 석교나 다 불국의 세계로 통한다면서 우릴 안내하던 운전기사가 절 문앞에 있는 석대를 가리키며 우릴 보고 잠간 서있어보라는것이였다.

"석대아래는 속세이고 석대우는 불국이예요."

그럼 우리는 이미 석대우에 섰으니 속세를 떠난셈이다. 우리 내외는 심신을 피곤하게 하는 속세를 떠나 불국의 관문이라는 자하문안에 들어섰다. 인젠 아주 불국에 들어온셈. 먼저 우릴 맞아준것은 다보탑과 석가탑이였다. 지금까지도 인간의 기술만으로는 쌓아올릴수 없는것으로 인정되여 세계의 불가사의로 남아있다는 다보탑은 직선과 곡선 그리고 강약이 환상적으로 조화된 세계 석조건축미술사상 그 류례를 찾아볼수 없는 기상천외의 탑으로 불려지고있다고 한다. 높이 10여메터나 되는 탑은 그 모양이 어찌보면 돌로 쌓아올린 루각 같아보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석가여래가 법화경의 세계를 이야기하는데 듣는 사람들이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하자 땅속에서 이 탑이 솟아올랐대요. 탑속에서 다보여래가 나와 석가여래의 설법을 알아듣기 쉽게 해석해주었대요."

"다보여래란 누군가요?"

안해가 운전기사한테 물었다.

"저도 딱히는 모르지만 석가여래의 말을 해석해주는 부처님이라더군요."

그러니까 석가여래가 설법자이면 다보여래는 해석자이다.

"어쩌면 통역일지도 모르지."

다보여래탑이 맞은편에 있는 석가여래탑을 모시고있는셈이였다. 261개의 돌을 목각보다도 정밀하게, 도자기보다도 부드럽게 빚어낸 다보탑이 기교미의 절정을 자랑한다면 아무런 조각도 없이 직선적조립에 의해 8메터 높이로 솟아있는 석가탑은 장엄한 간결미를 보여주고있었다.

석가탑을 일명 무영탑이라고도 한다. 그림자가 없는 탑, 여기엔 널리 전해진 아사달과 아사녀 전설이 깃들어있다. 한국의 소설가 현진건선생에 의해 아사달과 아사녀사의 전설이 소설화되였는데 그 장편소설 제목 역시 ≪무영탑≫이다. 1980년에 북경영화학원에서 씨나리오 연수를 받을 때 나는 그 소설을 읽고 씨나리오로 옮겨볼 충동까지 느꼈었다. 지금도 그 누가 자금만 대준다면 영화나 텔레비죤드라마로 만들고싶다. 소설이 너무나 인상깊었기에 아래에 대충 그 줄거리를 적어본다.

삼국시대 유명한 석공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비할데없이 아릿다운 안해가 있었다. 어느날, 석공은 석가탑을 만들라는 엄명을 받고 안해곁을 떠난다. 석가탑을 다 만들기전에는 부부간 상봉을 못한다는 엄명에 그들 부부는 그리움으로 애간장을 태운다. 고향에서 남편을 기다리던 안해는 오랜 기다림을 견디다 못해 그리운 랑군을 찾아오는데 탑이 완공되지 않아 남편을 만나지 못한다. 절밖엔 호수가 있었는데 탑이 완공되면 탑과 남편의 그림자가 호수에 비칠것이라는 말에 안해는 밤이고 낮이고 호수가를 맴돈다. 그러던 어느날, 호수에 완공된 탑과 그리운 남편의 모습이 비치자 기다림과 그리움에 지쳐있던 녀인은 너무나 반가운나머지 호수에 뛰여든다. 뒤미처 달려온 석공이 안해의 이름을 부르며 호수에 뛰여들자 그 순간부터 호수엔 다시는 탑그림자가 비끼지 않았다. 그들 부부의 사랑이 너무 갸륵하여 또한 그 사랑의 끝남이 너무 눈물겨워 절세의 걸작이라는 탑도 장엄하고 아름다운 자기 모습을 조용히 호수가에서 거둬갔다는 이야기다.

불국사에서 석가탑을 보면서 무영탑에 깃든 아름다운 이야기를 다시금 음미해보고나니 날 쳐다보는 안해의 얼굴이 그 어느때보다 더 이뻐보인다. 석공네 부부처럼 그렇게 아름답게, 그렇게 처절하게 사랑할수 있냐고 단박 확인을 받고싶어진다. 하긴 사랑은 주고받는것이긴 하지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주재한다는 불국의 삼존불을 모신 대웅전에서 나는 성불하는 불교신자들을 바라보면서 우리 가정에 영원한 사랑이 깃들게 해주소서 하고 속으로 빌었다. 안해는 그때 무엇을 기원했는지…

옛말에 금강산을 구경한 사람은 지옥했을 면한다는 말이 있다. 금강산을 가볼수 없는 한국사람들에게는 신라 천년에 걸쳐 불교문화의 꽃을 피웠던 경주가 있어 불행중 다행이란다. 경주를 천년고도라고 하지만 력사책에 나오는 년대로 보면 정확히 992년이다. 992년이란 길고도 아득한 세월에 걸쳐 신라의 서울이였던 경주는 신라 천년의 옛꿈을 간직하고있어 발닿는 곳마다 력사를 마주하게 된다.

불국사를 떠나 경주 시내에 들어서니 맨먼저 눈에 띄는것이 거대한 고분들이였다. 얼핏 보면 나무 한그루 없이 잔디만 입힌 자그마한 산 같아보인다. 많은 고분들이 밀집해있는 곳에 이르러 운전기사는 차를 세웠다.

"여기가 대릉원이라고 불리는 고분공원이예요."

소개에 의하면 대릉원내에는 평지우에 산봉우리처럼 솟아있는 릉이 20여개 있는데 봉분이 무너졌거나 평지에 묻혀있는 고분들을 합치면 수백기가 될것으로 짐작된다고 했다.

"하기에 어떤 관광객들은 경주를 무덤의 도시라고도 해요."

고분은 경주의 얼굴이란다. 력사를 알자면 무덤을 파란 말이 있다. 바꾸어말하면 고분에서 력사를 읽는단다. 고분들이 없다면 천년고도만이 가질수 있는 력사의 시간과 공간을 찾아볼수 없을것이다.

신라의 령혼이 잠들고있다는 대릉원내에 솟아있는 20여기 릉가운데서 유독 천마총만이 가슴을 헤쳐 단절된 천수백년 전의 력사의 신비를 드러내보이고있었다. 하늘을 나는 천마도가 나와 천마총이라고 이름지은 이 봉분에서 가장 크고 가장 장중한 신라의 금관이 출토되여 한때 온 한국을 흥분시켰다고 한다.

머리에 금관을 쓰고 목에 6천개가 넘는 유리구슬과 금방울, 은방울로 된 목걸이를 걸고 허리엔 44개 금판이 붙은 과대와 요패를 띠고도 성차지 않아 열손가락에 금반지를 낀 무덤의 주인이 대체 어느 임금인지를 지금까지 확인을 못하였다고 한다. 금관을 드러낸 날은 정확히 1973년 7월 27일이였는데 그날 오래동안 가물던 날씨가 갑자기 뢰성이 울고 폭우가 쏟아졌다고 하니 무덤의 주인이 혹시 하늘이 낸 천자가 아닌가싶다.

무덤우에 씌운 잔디가 노랗게 말라가는 천마총을 바라보니 문득 세월의 덧없음과 인생의 허무가 느껴진다. 한국의 어느 한 작가는 고분의 부드러운 곡선에서 우리 조상들이 가지고있던 삶의 허무감을 느낄수 있다고 했다. 금, 은, 구슬로 온몸을 휘감은 무덤의 임자가 몸에 잔디를 덮기전에 단 한번이라도 인생의 허무를 느껴봤을는지가 궁금해진

북경의 서북쪽에 있는 명13릉중 지금 관광객을 맞고있는 정릉은 무덤임자가 죽기전에 축조한것이다. 그것도 죽기 몇십년 전이라고 하니 더욱 놀라웁다. 산을 파서 옮기고 릉을 축조한후에는 다시 산을 옮겨다 릉을 덮는 어마어마한 고역이 끝나는 날 무덤의 임자가 될 임금은 무덤안에서 축제를 벌렸다고 한다. 무덤임자가 살아 생전에 자연에서 나와 나중에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인생의 리치를 조금이라도 터득했더라면 부귀영화가 일장춘몽에 불과하다는것을 알았으련만…

무덤에서 력사와 마주서서 조상들의 인생허무를 헤아려보고난 뒤 우리는 경주박물관에서 전설로만 들어왔던 에밀레종을 구경할 여유를 가졌다.

경주박물관 마당에는 갖가지 신라시대 석재들이 널려있었다. 그중 석조불상들이 많았다. 어떤것은 목이 날아났거나 팔이 떨어져나갔고 어떤것은 아예 몸뚱이 전체가 떨어져나가있었다. 한결같이 오랜 세월속에 겪은 력사의 아픔을 하소연하고있었다. 오랜 세월 거듭되는 전란이 후세에 남긴것이란 무덤과 머리, 팔다리가 떨어져나간 불상뿐이겠는가. 좌선하고있는 불상들의 단정한 앉음새를 보면 무상무념의 불국의 세계가 느껴지지만 목이 날아나버린 처참한 모습에서 우리는 또 한번 칼부림에 피가 튀는 전란의 세월을 떠올리게 된다. 극락정토에 좌선하고있던 불상도 전화의 피해를 면치 못했으니 하물며 속세에 사는 인간임에야 더 말할것이 있겠는가.

한국인의 울음을 담은 령혼의 음색이라는 에밀레종의 신묘한 종소리가 울리지 않은지가 오래되였다. 종이 울면 사람도 따라 울었다는 그 세월은 이미 기억의 갈피속에 접어주었으니까.

"에밀레종은 이 종의 별명이고 본명은 성덕대왕 신종이예요. 국보 제29호로 지정된 이 종은 성덕대왕의 위업을 기리려고 구리 12만근을 녹여 주조하였는데 종소리를 한번 들으면 세속에 더럽혀진 마음이 가셔지고 두번 들으면 맑고 깨끗한 마음이 일어난다고 신비한 신종으로 세상에 널리 소문이 났어요."

경주박물관의 해설원아가씨의 말에 우리는 종을 한번 울려보고싶은 충동을 느꼈다.

"국보에 손을 대지 마세요."

아가씨의 말에 우리는 아쉽게도 속세에 더러워진 마음을 가실 기회를 놓치고말았다. 높이가 3.33메터, 밑지름이 2.27메터인 이 종은 주조할 때 한 아기를 쇠물에 넣어 만들었다는 애처로운 전설로도 유명하다.

멀고도 먼 그 어느 옛날…내가 들은 에밀레종의 전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어느 한 절에서 큰 구리종을 만들었는데 종을 쳐보니 깨진 소리만 날뿐 예상했던 맑은 종소리가 나지 않았다. 나라의 중요한 일을 점치는 관리를 찾아 점을 치니 종을 만들 때 속세의 물욕과 때가 묻지 않은 어린애를 쇠물속에 넣어야 맑은 소리가 난다고 했다. 결국 가난한 집의 어린애를 강제로 빼앗아 쇠물에 넣고 종을 만드니 그 소리가 맑고 부드러운데 소리속에서 "에밀레~"하는 애처로운 소리가 섞여 울리는것이였다. 쇠물속에 녹아버린 어린애의 부름소리였다. 에밀레라는 이 부름소리에는 두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어린애가 엄마를 부르는 소리라는 설이고 다른 한가지는 "어미의 말 한마디로"라는 뜻이라고 한다. 한것은 엄마가 자기 자식을 종을 만드는데 시주했기때문이다.

종소리를 곱게 크게 내자면 종을 주조할 때 린성분이 많이 들어가야 한다고 한다. 인체에 린성분이 많이 들어있다고 하니 종소리를 맑고도 크게 내려고 사람을 쇠물속에 넣었다는 전설을 그냥 전설로만 들을수 없다. 그때 신라인들이 이미 린성분의 과학적효능을 알고있었을지도 모른다. 종의 주조자가 미리 그 효능을 계산하여 어린애를 쇠물속에 넣었다면 이것은 한국의 과학기술발전사에서 가장 잔혹한 사건으로 수록될것이다.

에밀레종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나니 서쪽으로 기운 해가 마지막 해살을 거두어들이고있었다. 욕심같아서는 신라의 종교와 자연 그리고 예술의 응결체로 그 극치를 자랑하는 석굴암과 세계에 류례가 없는 왕의 수중 릉인 문무왕 대왕암을 가보고싶었지만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우리는 삼국통일의 대업을 시작한 태종무렬왕 왕릉에서 경주의 락조를 맞았다. 무렬왕릉은 경주지역의 왕릉중에서 가장 확실하게 릉의 임자를 알수 있는 릉이라고 한다. 태종무렬왕의 이름은 김춘추인데 신라의 황금기를 삼국통일의 위업으로 연 신라 제29대 왕이다.

자그마한 부족국가였던 신라가 부족련맹국가로 력사무대에 등장한것은 고구려, 백제 건립후 약 한세기가 지난 뒤의 일이다. 국호 신라를 뜻풀이하면 "신"은 덕업을 일신한다는 뜻이고 "라"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이다. 백제와 고구려가 한참 각축전을 벌이고있는 사이에 신라는 국력을 키워나아갔다. 태종무렬왕대에 이르러 신라는 당나라와 손을 잡고 선후로 백제, 고구려를 멸하고 통일신라시대를 열었다. 삼국통일이 가지는 력사적인 의의는 클것이지만 외세의 힘을 빌어 동족 국가를 멸한 신라식의 통일이 지금 분단의 비극을 안고있는 조선반도에 다시 재현될가 근심스러워진다.

무덤앞에서 한 토막의 력사를 대충 읽고나니 주위가 어둑어둑해온다. 새로이 근심을 안은 나의 마음도 어두워온다. 걸음도 무거워진다. 어두운 적막속에서 영원한 고독을 즐기려는듯 무덤의 임자는 떠나는 우리를 만류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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