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진란만하던 어린시절 무한한 우주의 밤하늘을 바라보며 미지의 우주를 탐구하는것이 아마 나의 첫번째 꿈이였을겁니다. 지금도 북경 동물원부근의 천락궁을 지나게 되면 어릴적 기억이 새록새록 나와 가슴이 설렙니다.
지식을 루적하고 세상을 알기 시작하면서부터 나의 꿈은 보다 현실적이 되였습니다. 어릴적부터 가문의 영향을 받아 그림그리기에 남다른 흥취가 있었지만 집안사정으로 포기해야 했던 안타까운 예술가의 꿈도 있었고 꿈과는 거리가 먼 트레이닝코치를 하다가 내친김에 그 방향으로 발전할가 고민한적도 있었습니다.
대학교를 졸업하면서 나는 방황했습니다. 응시교육의 "배려" 아래 보호에만 습관되여왔는데 매몰찬 사회에 발길을 내딛으려 하니 당혹스럽고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정치학부를 졸업한 나한테 있어서 방송사업을 하게 된것은 얼마나 꿈같은 일인지 모릅니다.
방송은 대학교시절 학교 방송활동에 참여한것 빼고는 사실상 미지의 세계였습니다.
입사 첫날,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이때 나한테 튼튼한 버팀목이 되여준분은 우리 인터넷팀의 리교수님과 김선생님이였습니다. 리교수님은 입사 첫날 나한테 사무에 필요한 사무용품을 사주면서 "필요한것이 있으면 이야기하고 의문되는 부분이 있으면 제때에 제기하세요."라고 미소를 지으며 따뜻하게 고무해주셨습니다. 방송업무에 천천히 입문시킨것은 김선생님이였습니다. 원고번역의 주의사항으로 부터 인터넷 특별기획의 제작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부분을 차근차근 설명해주었습니다.
조선어부 선생님과 선배님들은 모두 "신입생"인 나한테 따뜻한 고무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나는 우리 조선어부의 가족같은 따뜻한 정을 점점 가슴깊이 느낄수가 있었습니다.
이런 따뜻한 환경에서 나는 서서히 방송업무를 익혀가기 시작했습니다. 원고번역, 원고편집, 홈페지제작에 이르기까지 한걸음한걸음씩 내디뎠습니다. 어릴적 회화를 조금 배운적이 있어서 시각적인 효과를 내는 부분을 다루는것이 참으로 즐거웠습니다. 선배한테서 특별기획 제작방법을 배우게 되였는데 나만의 감각으로 제작할수 있다는 자체가 신기했고 즐거웠습니다.
나는 기량을 힘껏 발휘하려고 관련된 서적들을 열심히 탐독했습니다. 입사한지 얼마 안되여 조선어부 인터넷사이트는 동영상코너를 증설하게 되였고 나는 또 한번 행운스럽게도 그 코너를 맡게 되였습니다.
그때 나는 영상촬영에 대해 아는것이 없었습니다. 더우기 촬영카메라를 다루게 될줄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것이였습니다. 하지만 두려움 반, 신기함 반으로 촬영카메라 강습을 받았습니다. 촬영카메라의 각종 버튼의 작용, 카메라화면의 움직임의 표현, 카메라화면을 컴퓨터에 입력하고 편집하는 부분까지 하나하나 배워나갔습니다.
실제로 카메라를 가지고 연습촬영을 나가게 된것은 국제방송국 맞은편에 있는 국제조각공원에 다녀온것뿐인데 갑자기 첫번째 촬영임무를 맞게 되였습니다. 한국 중국주재문화원의 중한미술전을 찍어오라는것이였습니다. 어리둥절한채로 미술전현장에 갔는데 어디서부터 찍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촬영을 다 끝내고도 어떻게 찍었는지를 모를 정도로 긴장했으니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너무 긴장한탓에 음향을 제대로 록음하지 못하는 커다란 실수를 저지르고말았습니다. 하지만 동행한 선배님은 처음이여서 그렇다면서 위안해주셨습니다. 앞으로 더 잘할수 있을것이라고 고무격려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촬영에 있어서 현장 영상촬영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것은 후기제작을 잘해야 좋은 영상물을 만들수 있습니다. 그날 찍어온 내용을 숙련되지 않은 초보자가 편집하려니 까마득하게 느껴졌습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랐고 설상 손을 대려니 마땅치 않고 참으로 안타까운 심정이였습니다. 새벽녘이 되여서야 나의 첫번째 영상작품이 겨우 제작되였습니다. 화면을 보니 일방향 촬영때문에 눈이 막 어지러웠습니다. 하나의 교훈인셈이죠. 화면은 너무 움직여도 좋은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는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였습니다. 서툴게 편집된 나의 첫번째 작품이였지만 여러 선생님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따뜻한 배려하에 새롭게 접촉한 영상물제작이지만 꼭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잘해나아가야겠다는 다짐이 저절로 생겼습니다.
2009년 7월 16일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60주년을 맞아 CRI에서 특별기획한 중외기자 변강행―길림, 료녕행이 시작되였습니다. 나는 변강행에 참가하게 되는 행운을 지녔습니다. 물론 나의 임무는 전반 변강행의 행사와 일정을 카메라에 담는 일이였습니다. 전국적으로 폭넓게 진행되는 이번 중외기자 변강행을 위해 성대한 발대식을 가졌습니다. 처음으로 이런 대규모적인 합동취재를 떠나게 되니 긴장되면서도 한결 부풀어오른 심정이였습니다.
취재팀의 첫 목적지는 장춘이였습니다. 장춘은 중국의 자동차와 영화의 요람으로 불리는 길림성 소재지입니다. 장춘에 대한 취재는 두 부분으로 진행되였습니다. 때마침 제6회 중국장춘국제자동차박람회가 개최되여 오전에는 박람회를 취재하고 오후에는 한장부 길림성 성장 인터뷰로 일정이 배치돼있었습니다.
처음으로 자동차박람회 취재를 하게 된 나는 취재보다도 세계 각지에서 전시하러 온 자동차의 매력에 푹 빠져있었습니다. 취재를 하게 된 날은 이미 개방일이여서 박람회 전시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사람들이 많다보니 촬영도 여간만 힘들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많고 너무나 많은 곳들을 다니면서 촬영해야 했기에 나는 아예 삼발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치명적인 실수였습니다. 촬영의 제1수칙이 화면의 안정성이였는데 그땐 이 점을 미처 깨우치지 못했던것입니다. 유럽, 미국, 일본의 호화자동차전시장에는 많은 사람들로 붐비였습니다. 따라서 그 사람들을 비집고 촬영하기란 여간만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때 나는 화면언어에 대해 깊은 료해를 하지 못하고있는 상황이였습니다.
그날 오후에는 한장부 길림성 성장 특별인터뷰가 있었습니다. 인터뷰촬영을 진행하며 나에게 다른 하나의 과제가 주어졌습니다. 바로 화면 주제에 대한 파악이였습니다. 전반 인터뷰는 거의 2시간 가량 진행되였는데 사실상 편집후 방송시간은 10분 정도였습니다. 여기서 나는 정지 촬영의 따분함을 피면해야 할뿐더러 전반 인터뷰의 주제를 잘 파악하여 화면채집을 선별해야 했습니다. 이 부분은 아직 아마츄어인 나한테 커다란 도전이였습니다.
북경을 떠난지 나흘째, 내 고향 연변에 도착했습니다. 장춘에서 연길까지 작년에 새롭게 고속도로가 부설되여 4시간이면 도착할수 있었습니다. 돈화시에 들어서면서부터 넓고 푸른 산과 벌이 펼쳐졌습니다. 그냥 기차를 리용해 고향을 다니던것이 이렇게 고속도로를 리용하게 되니 과거에 보지 못했던 내 고향 아름다운 산천이 한눈에 안겨왔습니다. 우리일행은 모두 대자연의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했고 나 또한 내 고향 산천의 모습에 도취되였습니다. 연변에 들어가는 시간은 그렇게 행복했고 감미로왔습니다.
연길시에 도착해 저녁에는 "연길찬가"라는 제목으로 된 문예공연을 관람하게 되였는데 나는 관람보다는 촬영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화려한 무대조명, 현란한 음악, 조선민족의 전통복장과 전통악기들이 관객들의 갈채속에서 공연되였습니다. 나는 관계자의 허락을 받고 전반 공연을 촬영할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중앙무대를 제대로 촬영할수 없었습니다. 무대의 변두리에서 진행한 촬영은 어쩐지 내키질 않았습니다. 전반 공연의 다채로움을 제대로 표현할수 없었기때문이였습니다. 너무나 다채로운 공연이다보니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아쉬운 부분이라면 혼자서 진행한 촬영이라 전반 공연의 전체와 부분의 조화를 잘 체현하지 못한것입니다. 그리고 관광공연이다보니 화면각도 배치에서 공연 주최측의 눈치를 살피면서 했기때문에 화면각도가 리상적이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다채로운 공연을 카메라에 닮을수 있다는 자체가 뿌듯했습니다.
중한 미술전시회를 시작으로 나는 선후하여 "조선예술품 소장애호가 위배평", "김연준청취자 중국행", "김철시인과 그의 시", "동방의 빛―제1기 중한당대예술교류전", "CRI 변강행", "건국 60주년, 중한 수교 17주년 중국 대음악회", "베이징(북경) 현대자동차―현지화로 승부", "한국 피아니스트 오현정 중국국가교향악단 협연", "인순이 베이징 콘서트", "중한 교류의 창으로 되고있는 공자아카데미", "중앙민족대학 모닥불동아리 5주년 기념공연―얼" 등 작품을 촬영, 제작했습니다. 촬영, 제작하면서 나는 현장촬영 기술경험도 필요하지만 많은 리론적인 지식이 받쳐주어야 한다는것을 깨달았습니다.
하여 나는 영상물에 관한 서적들을 탐독하기 시작했습니다. 촬영의 각도로부터 화면색채가 사람한테 주는 영향, 이동촬영법칙, 후기프리미어 제작방법 등 닥치는대로 배워나갔습니다. 촬영공부를 자습하면서 이렇게까지 내가 몰두할수 있다는것이 신기했습니다. 공부가 싫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하나 배워나간다는게 재미있고 성취감을 만긱할수 있었습니다. 영상촬영은 사진촬영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감독친구의 조언에 사진 촬영서적들을 대량으로 구입해 읽어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자라면서 이렇게 재미있는 공부를 하게 된것이 처음이 아닐가싶습니다. 배워나가면서 나에게 꿈이 생겼습니다. 훌륭한 촬영감독이 되는 꿈 말입니다.
CRI의 조선어부에 입사하면서 나는 나의 꿈을 찾았고 또한 나의 꿈을 위해 열심히 뛸수 있게 되였습니다. 소중한 기회와 인연으로 만난 CRI, 언제나 감사한 마음입니다. 또 CRI와 함께할 래일이 더욱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