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거이는 자는 낙천, 호는 향산거사이고 본적은 태원이다. 백거이는 소 관료 가정에서 태어났다. 백거이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였는데 태어나서 6개월 만에 갈지(之)자와 없을 무(無)를 분간할 줄 알았고 5살부터 시 쓰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청년시기 전쟁으로 하여 유랑생활을 하게 된 백거이는 빈곤한 생활을 겪는 과정에 백성들과 접근하였고 현실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백거이는 16살 때 이미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시를 지었다. 그는 29살 때 진사과거에 뽑혀 한림학사, 좌습유 등 벼슬을 하였다. 그는 성격이 강직하여 815년 절도사들이 환관들과 결탁하여 재상 무원형을 암살한데 격분한 나머지 자기 직권범위를 초월하여 상소를 올리고 집권자들을 통책했다. 이 때문에 그는 강주사마로 강직되었지만 그 후에도 계속 통치계급 집단내부의 부패상을 폭로 규탄했기 때문에 누차 강직되어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유가, 도가, 불가의 사상이 다 백거이에게 미친 영향이 컸지만 결정적 작용을 논 것은 유가사상이다. 806년에 쓴 "책림"에서 그는 "천하 백성들은 빠짐없이 구제하자"는 정치주장을 서술하였으며 통치계급이 가렴잡세로 백성을 약탈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백거이는 일찍 자신의 시를 풍유시, 감상시, 한적시, 잡율시로 분류하였다. 그가 지은 시중 사상내용과 예술기교면에서 높은 성과를 거둔 것은 풍자시이다.
"진중음", "신악부", "경비", "매탄옹" 등 풍자시에서 백거이는 백성들의 고통스러운 생활을 폭넓게 반영하였으며 백성에게 가렴잡세를 안겨 부화 사치한 생활을 누리는 황제와 지방 관리들의 죄악을 통책하였다.
이 뿐만 아니라 백거이는 여성들의 비참한 운명을 시에 담았다. "상양백발인"에서는 궁녀들의 비참한 운명을 동정하였으며 장시 "비파행"에서는 비파 타는 여인의 불우한 생활에 깊은 동정을 표시했다.
"비파행"을 지을 때 백거이가 무고하게 강직되어 우울한 심정으로 나날을 보낼 시기였다. 하루는 백거이가 강주의 분포구에서 손님을 바래다가 강가에서 울려오는 구슬픈 비파소리를 듣고 사람을 시켜 알아본즉 세상을 방랑하는 늙은 가기(Ê°Ðõ)가 비파를 타는 소리라고 하는 것이었다. 가련한 가기를 만나 그의 하소연을 들은 백거이는 동정이 감과 동시에 자신의 처지를 돌이켜보게 되었다. 그는 집에 돌아와서 유명한 서사 장시 "비파행"을 지었다.
백거이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진 "장한가"에서는 당명왕과 양귀비의 황음 무치한 생활을 비난하면서 이런 생활이 나라를 망치고 그들의 애정도 비극으로 종말 짓게 된 근본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예술기교면에서 백거이의 시는 높은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전형 형상을 부각함에 있어서 그는 하층 백성들의 외모와 심리활동을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묘사함으로써 시의 생동성을 담보하고 있다. 이밖에도 시인은 서사와 서정을 잘 결합시키면서 격동된 감정을 억누를 수 없을 때 주정토로를 폭발시켰다. 그의 시 언어는 매우 통속적이며 시어의 형상성은 예리한 풍자에 의해 도드라지고 있다. 백거이는 당나라시기 신악부 운동을 창도한 시인중 한 사람이다. 그는 새로운 문학이론을 제기하여 시의 내용과 형식을 혁신할 것을 제창했다. 그는 "글은 반드시 시대를 위해 써야 하며 시가는 반드시 사실을 가지고 창작해야 한다.", "사실을 통하여 감수를 받으면", 꼭 "감정을 토대로 싹을 틔우게 된다."고 하면서 문학이 현실생활에 뿌리박을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또 시가의 내용과 형식을 통일시킬 것을 주장하면서 시의 "감정은 뿌리와 같고 언어는 싹과 같으며 운율은 꽃떨기와 같고 사상은 열매와 같다."고 했다.
백거이의 진보적인 문학주장과 풍유시 창작은 당나라시기 진보적 사실주의 시가창작으로 하여금 고봉을 이루게 하였고 중국 사실주의 시가발전을 크게 추동하였다. 백거이는 일생동안 도합 2800여수의 시를 지었는데 이 시편들은 중국 문학보물고중의 아주 소중한 유산으로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