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원(柳宗元)의 자는 자후이며 원적은 오늘 산서성 영제인데 후에 장안에 자리를 옮겼다. 유종원을 유하동, 유유주라고도 부른다. 유종원은 관리가정에서 태어났다. 유종원의 아버지 유진은 전중시어사 등 관직을 맡았었다.
유종원의 소년시절은 당나라 중기 각종 사회폐단과 당쟁으로 동란이 형성되던 시기였다. 유종원의 아버지는 관직이 자주 바뀜에 따라 자리를 옮겼는데 유종원은 아버지를 따라 여러 곳을 다닐 기회를 가지게 되였다. 그 과정에 유종원은 사회와 접촉하고 시야를 넓혔다.
정원 9년(793년) 21살인 유종원은 과거에 급제해 진사로 되였다. 이 시기 유종원은 유우석(劉禹錫)을 절친한 친구로 사귀였다. 정원 19년 장안에 돌아온 유종원은 입조해 어사의 견습원으로 있으면서 왕숙문 등과 친교를 맺었다. 왕숙문을 대표로 하는 신정세력은 국가통일과 황권을 수호하기 위해 개혁운동인 영정혁신을 진행했다. 왕숙문이 정치 대권을 잡자 유종원은 혁신을 추구하는 핵심성원으로 되였다. 유종원은 혁신운동의 결책자의 한 성원으로 영정혁신의 앞장에 섰다. 영정혁신 기간 유종원은 유물주의 철학사상을 보여준 저서를 집필했는데 저서 중 "천설", "천대", "비국어" "봉건론" 등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영정혁신이 귀족, 관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기에 귀족, 관료들은 힘을 합세해 혁신세력에 반기를 들었다. 영정원년 5월 왕숙문은 직위를 박탈당했고 그 이듬해 살해당했다. 유종원도 변경지방으로 좌천되었다. 이러한 좌절과 13년간에 걸친 변경에서의 생활은 그의 사상과 문학을 더욱 심화시켰다.
유종원은 관직에 있을 때 한유, 유우석 등과 친교를 맺고 당나라 시기 고문운동을 창도했다. 유종원은 고문의 대가로서 한유와 병칭되었으나 사상적 입장에서는 서로 대립을 이루었다. 한유가 전통주의인데 반하여 유종원은 유교, 도교, 불교를 참작하여 신비주의를 배격한 자유롭고 합리적인 입장을 취했다.
유종원은 또 우언 형식을 취한 풍자문과 산수를 묘사한 산문에도 능해 당송시기 8대 산문가의 한사람으로 되였다. 그는 작품을 통해 관료를 비판하고 현실을 반영하는 한편, 자신의 우울과 고민을 술회하였는데 문장의 완숙미와 표현의 간결, 정채함은 특히 뛰어났다. 시는 산수시를 특히 잘 지어 도연명과 비교되었고 왕유, 맹호연 등과 당시의 자연파를 형성하였다. 유종원은 송별시, 우언시에도 뛰어나 우분애원의 정을 표현하는 수법은 굴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웅대하면서 깊고 우아하면서 기운차다." 이는 유종원 작품에 대한 한유의 평가이다. 왜냐하면 유종원의 문장이 사람들에게 주는 가장 두드러진 인상은 "준결함"이니까 "깊으면서 명료하고 우아하면서 기운차다"는 한유의 평가가 적중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유종원은 혁신가로 전통 관념에의 속박을 거의 받지 않았다. 비록 그도 "문이명도"라는 주장을 제기했지만 "도"에 관해서 그 나름대로 독립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는 "도에 다다름은, 사물에서 이루어지는 것일 따름이다." 문장의 작용은 바로 "시대에 도움이 되고 만물에 혜택을 준다.", "시대에 이로움이 있게 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내용을 경시하고 형식을 중시하며 오로지 사조의 화려함만을 추구하는 것에 반대했다.
유종원은 "무릇 글을 하나 짓는데 문채를 풍부하게 하는데 힘쓴다. 사실을 돌아보지 않고 꾸미고 과장되고 터무니없는 것으로 펼쳐놓아 그 빛나는 것으로 후생을 유혹하여 치우치는 것으로 끝맺게 되니 이는 무늬가 아름다운 비단으로 함정을 덮어놓은 것과 같다."고 했다.
유종원의 저서에는 시문집 "유하동집(45권)", "외집(2권)", "보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