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송 개국 황제 이름은 조광윤(赵匡胤)이다.
일찍이 후주의 최고 무관직인 황제 친위군의 장수 전전도점검을 역임하다가 후주 현덕 7년(960년) "진교병변"을 일으켜 후주 정권을 장악하고 왕위에 올랐다. 조광윤은 황제로 된후 년호를 송으로 고치고 수도는 그냥 개봉으로 정했다.
송나라의 창시자가 된 조광윤은 963년 무력으로 전국을 통일하기 시작했다. 선후로 형남, 호남, 후촉, 남한, 남당주국 등을 멸했다.
조광윤은 중앙집권제를 강화하기 위해 정권, 군권, 재정, 사법권을 거두어 들여 자신의 손에 틀어쥐었다. 그는 자신의 아래에 추밀사,삼사사를 두어 재상이 장악하던 군정, 재정 권력을 거두어 들였고 중앙 금군 장령들과 절도사들의 군권을 박탈하였다. 이밖에도 지방의 주와 군의 관리들의 권력을 약화시켜 지방의 군권, 재정권, 사법권을 조정에 귀속시켰다. 이러한 조치는 당시 국가통일을 수호하고 사회, 경제발전을 추진함에 있어서 역할이 컸다. 그러나 군대 이동이 빈번하고 장령들이 자주 바뀌었기에 비록 군권이 중앙에 집중되었지만 송나라 군대의 전투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조광윤은 정치 제도 면에서 개혁을 단행해 권정을 분리시키고 문관들을 대거 등용했다. 조광윤은 문관 등용에서 신분의 따지지 않고 평등한 과거 경쟁을 통해 문관들을 대거 발탁했다. 송나라시기 지식인에 대해 중시하고 우대해 주었기에 책을 읽는 풍기가 형성되었다. 하여 송나라는 당시 세계적으로 과학, 문화수준이 가장 높은 나라로 되였다. 활자 인쇄, 지남침, 화약이 선후로 송나라시기에 발명되었다. 이러한 발명은 중국과 세계 문명사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밖에도 조광윤은 가렴잡세를 폐지하고 수리건설, 황무지를 개간, 식수조림을 격려하는 정책을 실시해 농업생산이 빠른 시일 내에 회복되고 발전되게 했다. 조광윤이 진행한 정치, 경제체계 개혁은 당시 역사 실제에 부합되었기에 송조 300년 발전과 생존을 담보할 수 있었다.
송 태조 조광윤은 개보 9년 (976년) 50세를 일기로 돌연히 생을 마감했다. 사망원인에 대해 역사 기재가 별로 없는데 지금까지 송 태조의 돌연 사망은 천고의 미스터리로 되고 있다. 후세 사람들은 그가 동생 조광의에게 독살되었다고 의심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