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강 소흥의 여씨 저택
중국의 중부에 위치한 절강성 소흥(紹興)시에는 강남에서 보기 드문 명나라시기 대형 관저 건물군이 있습니다. 이 건물군은 전반 외관이 장엄하고 매 뜨락마다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 건물군이 바로 3갈래의 세로 거리와 5갈래의 가로 거리에 의해 형성된 13개의 뜨락을 가진, 각자 독립적인 공간을 유지하고 있는 "여(呂)씨네 저택 13홀"입니다. 전문인사들은 "북에는 자금성이 있고 남에는 여씨 저택이 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럼 오늘은 저와 함께 특색이 있는 민가-소흥 여씨 저택으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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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흥시의 아늑한 골목 깊숙이 위치한 여씨 저택은 부지 면적이 무려 3만 2천여평방미터가 되는 거대한 건물군입니다. 여씨 저택은 거대한 돌기둥에 검은 대문이 높고 흰 벽과 청회색의 기와를 자랑하면서 우아함과 소박함, 장엄함을 두루 갖추고 있어 강남특유의 뜨락식 건물군의 대표로 꼽힙니다.
지금의 여씨저택에서 가장 잘 보전된 건물은 영은당(永恩堂)입니다. 여씨저택의 대표건물인 영은당은 13홀 중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데 높이가 8.5m, 길이 17m, 너비 36.5m입니다. 따라서 이 건물에서 여씨저택의 규모를 한 눈에 볼수 있습니다.
영은당을 떠 인 기둥도 두 사람이 팔을 벌려서야 안을수 있는 굵은 원목을 사용했고 지금도 대들보에는 채색의 그림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영은당의 중앙에 자리잡은 명당(明堂)은 이름처럼 넓고 환하게 밝습니다. 현지 유명한 사학전문가인 하신은씨의 소개를 들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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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씨 저택은 일명 여씨 13홀이라고도 불립니다. 명나라때인 1549년부터 1583년까지사이에 신축된 여씨저택의 주인은 명조의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 여도입니다. 1532년에 과거시험에서 진사(進士)에 합격된 여씨는 46세때 가정(嘉靖)황제의 높은 평가를 받는 상주문을 쓰고 나서 청운의 일로를 달려 이부좌시랑(吏部左侍郞)겸 동각(東閣)대학사, 예부상서(禮部尙書), 이부상서를 거쳐 최고의 관직인 대학사에 10년간 머물렀습니다. 여씨 저택은 강남지역에서 아주 보기 드문 명나라시기 대형 관저건물군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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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흥시에서는 예로부터 가족의 번영정도를 저택으로 보여주는 풍속이 있어 한 가문의 저택을 보고 그 가문의 위상을 알수 있습니다. 소흥에서는 역사상 많은 유명인사들이 났지만 여씨처럼 한 때 중앙정부의 최고관직에 머물렀던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때문에 여씨 저택의 기개와 호화함은 더 이상 말이 필요없습니다.
전하는데 의하면 여씨저택이 13개 홀을 가지게 된데는 일화가 있다고 합니다.소흥시 문물국 부건화 전문가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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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시 저택의 13홀은 사실 여씨의 80세 생일에 과거시험에서 장원급제한 그의 제자 13명이 생일선물로 홀 하나씩 선물해서 형성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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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씨저택에 들어서면 중심선과 동쪽코스, 서쪽코스에 의해 골목 하나가 물길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물길은 화재방지가 주요 목적이었고 또 저택내부 도난방지용과 교통용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영은당 옆에는 또한 말이 달릴수 있을 정도로 넓은 골목도 있습니다.
여씨가 죽고나서 40년뒤에 명나라가 망하고 청(淸)나라에는 여씨 가문에서 관리가 나오지 않는 바람에 여씨저택은 다른 성씨의 사람들에게 분할되어 소흥 최대의 서민주택구역으로 되었습니다.
바로 백가지 성씨의 다양한 사람들이 이 저택에 모여 산 것이 400년전의 명조 건물이 오늘날까지 보전된 원인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오늘날도 이 저택에서는 여씨 후손을 망라해 400여가구의 서민이 모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동생 노인은 이곳에서 오래 살아온 여씨 후손의 한사람입니다. 현재 그와 같이 나이가 지긋한 여씨 후손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여동생 노인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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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곳에서 태어나 줄곧 이곳에서 살아왔습니다. 저는 여씨 18대 손으로 장손입니다. 지금 저는 86살입니다. 이곳에서 살면서 여씨 저택을 보호하는 일을 할 수 있어 아주 뿌듯합니다. 계속 이곳에 남아있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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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분리에 사용된 물길 골목과 말이 달릴수 있는 골목은 오늘날 자연스럽게 여씨저택을 외부와 연결시키는 중요한 교통통로로 되었습니다. 도로 양쪽에는 건물한채에 한 가구씩 대대손손 서민들이 살아오고 있습니다. 이곳은 소흥의 번화가에서 아주 가깝지만 상대적으로 페쇄되어 있기 때문에 번잡함이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이 조용하고 아늑합니다. 때문에 세월의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도 이곳은 거의 영향받은 적이 없습니다.
세월의 풍상고초를 겪어 여씨 저택의 찬란함과 휘황함은 빛을 잃었지만 높이 솟은 검은 대문앞에서, 어마어마한 규모의 영은당앞에서 어제날의 모습을 엿볼수 있습니다. 소흥을 찾은 여행객들은 노신선생의 조부거처, 대우능을 많이 찾아보지만 여씨 저택을 찾는 여행객들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단지 지난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만이 잊지 않고 이곳을 찾아 조용히 지난 역사의 모습을 찾아봅니다. 소흥시 문물국 국장은 여씨 저택에 대한 보호가 바로 중국전통건축문화에 대한 보호이자 고양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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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들이 이곳에서 살고 있다는 자체가 일종의 문화이며 흡인력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굳이 이주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서민들도 이곳이 비좁고 생활조건이 낙후하지만 결코 이곳을 떠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씨 저택을 보호하기 위한 초보적인 계획을 세웠습니다. 국가문물국도 이미 여씨 저택 중추선에 대한 보수방안을 비준했습니다. 다음 단계 우리는 보수실시방안에 대해 구체적으로 토의할 것입니다. 최근 년간 우리는 일정한 자금과 인력, 물력을 투입하여 여씨 저택을 보호할 것입니다. 주로는 일부 구급성 보호와 파손방지를 위한 조치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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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세가 방대한 여씨 저택은 지금도 지난 역사를 소리 없이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행객들은 여씨 저택을 보면서 과거의 휘황함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아름다운 미래를 한층 그려보게 될 것입니. 그럼 오늘 여행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