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장강삼각주지역에서 무석시는 역사가 유구한 고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시면모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오늘, 무석시는 옛날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고진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그 중 영항고진은 약 6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명한 명소입니다. 그럼 오늘은 저와 함께 강소성 무석시에 있는 영항고진으로 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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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항고진은 무석시 서쪽 교외의 호수가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곳은 중국 근대 많은 민족상업가들의 요람이기도 합니다. 고진은 가장 일찍 상영(上榮), 중영(中榮), 하영(下榮) 3개의 자연촌락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원 강남대학 영씨(榮氏)연구센터 주임 진문원(陳文源) 교수는 이렇게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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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씨 일가는 호북성에서 남경 금릉(金陵)으로 이사한 후 명나라 초년 15세기초에는 또 금릉에서 우리 이곳 무석으로 이사왔습니다. 당시 영씨의 어른이었던 영청(榮淸)은 80살이 넘었는데 세 아들과 함께 이사왔습니다. 이 세 아들이 살던 곳이 나중에는 상영, 중영, 하영으로 되었습니다. 대략 19세기 중엽에 영항일대는 아주 번창했고 20세기 민국초기에 와서는 영항진이 정식 건설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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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영항진에는 길이가 380미터되는 근대풍모를 유지한 옛 거리와 157개의 시대낙인이 찍히고 지방특색이 있는 근대 건축물들이 있습니다. 이런 건축물들은 형태가 모두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절대부분이 영씨 일가에 속했었다는 점입니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한 가족이 모여살고 또 번창해진 현상은 중국의 강남과 나아가서 더욱 큰 범위내에서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고 인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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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계로(梁溪路)에서 영항 옛 거리에 이르기까지, 멀리서 보면 그 옛날의 작은 골목은 이미 대량의 주민아파트에 의해 포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골목 입구로 들어가면 순간 마치도 지난 세기로 돌아간듯한 느낌을 느끼게 됩니다. 졻디 졻은 길목과 이미 낡아서 얼룩진 층집들…영항 옛 골목의 고풍스러운 모습이 한눈에 펼쳐집니다. 백여년이래 영항 옛 골목의 건축은 크게 변하지 않았으며 골목 양켠의 집들도 대체로 원 면모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옛날의 번화한 모습만은 이젠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영항의 본토배기인 영요상(榮曜祥)씨는 퇴직한 교원입니다. 그는 영항가(榮巷街)가 가장 번창했을 때는 이곳에 약 100개의 점포가 있었다고 하면서 반경 수십리내에서 이곳은 상업중심이었다고 소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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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집들은 거의 모두가 이발소와 같은 점포였습니다. 비록 이곳은 길이가 얼마 안됬지만 서너개의 이발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침식사를 할 수 있는 점포도 있었는데 전병 등을 팔았습니다. 그리고 또 찻집, 철물점, 두부가게, 약방 등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당시 집집마다 점포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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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항의 오랜 건축들은 그 풍격이 모두 다른데 대체로 3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 부류는 전통적인 중식 벽돌 목재 구조로 이런 건축들은 흔히 벽돌로 대문을 만들었는데 아주 고풍스럽고 정교합니다 두번째 부류는 중서결합의 건축으로 외벽은 서양식을 본따고 안은 중식 벽돌 목재구조였습니다. 세번째 부류는 완전한 서양식의 건축인데 모두 철근과 콩크리트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 세가지 부류의 건축들은 모두 민국초기 중국 민족상업가들의 심미관념과 정취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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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항 옛 골목에서 나와 서쪽으로 돌아들어가면 좁고 긴 작은 골목이 나옵니다. 이곳이 바로 영항서쪽 나룻터로 옛날 영항인들이 배를 타고 성으로 들어가거나 외지에서 온 배들이 머물던 곳입니다. 원 강남대학 영씨연구센터 진문원 교수는 당년 민족실업가 영종경(榮宗敬), 영덕생(榮德生) 형제가 바로 이곳에서 배를 타고 출발해 상해로 가서 견습공이 되었다고 소개했습니다. 그럼 그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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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종경, 영덕생 형제는 바로 이곳에서 배를 타고 상해로 갔습니다. 당시 상해로 갈려면 2박2일이 걸려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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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항 서쪽나루 근처에 있는 영항중심소학교내에는 1915년에 건설된 <청우(淸雨)운동장>이 있습니다. 운동장의 부지면적은 약 400평방미터인데 독특한 풍격의 철근 콩크리트로 된 2층 건물입니다. 1층은 강당과 운동장으로 겸해 쓰고 있고 2층은 순전한 운동장입니다. "청우운동장"이란 말 그대로 개인 날이나 비가 오는 궂은 날이나 모두 운동장에서 활동할 수 있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입니다. 운동장은 보기에 마치도 대형의 정자와도 같은데 위에는 해빛과 비를 막을 수 있는 갓이 있고 주변에는 지탱역할을 하는 기둥외에 바람을 막을 수 있는 벽은 없습니다. 퇴직교원 영요상씨는 이 청우운동장은 일식건축인데 건축설계도는 중국 근대 유명한 수리전문가이며 교육가였던 호우인(胡雨人)이 제공한 것이라고 하면서 현재 국내에서 유일하게 사용중에 있는 조기 실내체육활동장소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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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양식은 일식입니다. 호우인은 일찍 일본에서 유학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 설계도를 가지고 귀국했습니다. 조사에 의하면 중국 국내에는 청우운동장이 두개뿐이었는데 하나는 베이징사범대학에 있었는데 지금은 이미 없어졌고 다른 하나는 지금 보시는 우리 이곳 청우운동장입니다. 이 운동장은 보존이 기본상 잘 되어 있기 때문에 지금도 사용하고 있으며 중국 국내의 유일한 청우운동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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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항에 또 특별한 볼거리가 있다면 그곳은 바로 애국실업가 영덕생 선생이 창시한 대공(大公)도서관 유적지입니다. 대공도서관은 1915년에 공사를 시작해서 1916년에 준공되어 오픈했습니다. 도서관은 2층으로 된 반듯한 건축으로 중서결합의 풍격을 띠고 있습니다. 지금 벽체는 흰색이고 기둥은 회색입니다. 역사기재에 따르면 영덕생과 그의 형님은 도서관과 같이 교육사업에 대량의 자금을 투입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공익학당(公益學堂)과 대공도서관 두개 사업에만 무려 백만 은화를 투자했다고 합니다. 1921년에 <장서목록>을 출판할 당시, 장서는 이미 11만 7100여권에 달했고 그 중 대부분의 도서가 선본(善本)이었습니다. 1952년 영덕생이 세상을 떠날 때 그의 유훈에 따라 그 가족들은 대공도서관의 전부 장서를 무석시 도서관에 기증해 도서관의 장서규모를 크게 늘였습니다. 지문원 교수는 영덕생이 대공도서관을 만든 것은 사회교육에 대한 그의 사상을 체현했다고 하면서 그 당시로는 아주 소중한 것이었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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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은 사회교육의 하나로 학교에 대한 일종의 보충이었습니다. 영덕생은 아주 많은 아이들이 가난때문에 학교에 갈수 없다고 하면서 이런 아이들은 도서관와 와서 저절로 책을 볼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때문에 책을 사서 사람들에게 보일 것이며 그 누구도 마음대로 도서관에 올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도서관에 소장된 책들은 아주 많았고 또 아주 진귀한 것들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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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건설이 도시의 면모를 부단히 변화시키고 있을 때, 세월의 흔적을 기적처럼 보존한다는 것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영항은 그것을 해냈습니다. 영항고진에서 우리는 역사와 문화, 기억과 혈통, 지혜와 아름다움이 이 오랜 도시의 건축들에 그대로 슴배여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영항고진은 무석시 서쪽교외에 있으며 면적은 1평방킬로미터도 안됩니다. 무석시는 교통이 편리하게 때문에 기차나 버스, 항공편 그 어느것을 이용하셔도 됩니다. 만약 여러분들도 그 숨결, 그 느낌을 직접 체험하시고 싶다면 영항고진을 찾아가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