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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 당사(黨史) 90년 대사기 (大事記)
2011-06-15 20:31:31 cri
 一、중국공산당 창건

1921년7월23일부터 8월초까지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상해에서 진행되었다. 모택동, 하숙형, 동필무, 진담추, 왕진미, 등은명, 리달, 리한준, 장국도, 류인정, 진공박, 주불해 등 13명의 대표가 전국 50여명의 당원을 대표해 대회에 참석했다. 제3국제공산당 대표 마링과 니크르스키가 대회에 참석했다. 7월30일 회의장이 사복경찰에 발각되어 하는수 없이 휴회했다. 마지막 날 회의는 절강성 가흥 남호의 유람선으로 옮겨 진행되었다. 중국공산당 제1차전국대표대회의 핵심 과업은 중국공산당 설립 문제를 토론하는것이였다. 대회에서는 중국공산당 강령을 채택했으며 당의 명칭을 "중국공산당"으로 확정하고 아래와 같은 당의 분투목표를 확정했다. 무산계급의 혁명군대로 자산계급을 전복시키며 계급차별을 소멸할때까지 노동계급에 의거해 국가를 재건하며 무산계급독재를 수단으로 계급을 소멸하여 계급투쟁의 목적을 이루며 자본가소유제를 폐지하고 모든 생산자료를 몰수해 사회소유로 한다. 당의 강령은 노동자,농민, 군대를 조직 동원해 공산주의를 선전하고 사회혁명을 당의 최우선 정책으로 한다고 명확히 지적했다. 당의 강령은 또한 민주집중제의 조직원칙과 당의 기율을 규정했다. 회의는 또한 <현 실제사업에 관한 결의>를 채택하고 당창건이후의 주요과업은 노동자계급을 조직하고 노동자운동을 영도하는것으로 확정했다. <결의>는 또한 군벌과 관료와의 투쟁에서 언론, 출판, 집회 자유를 쟁취하는 투쟁에서 독립적인 정책을 실행하면서 무산계급의 이익을 수호한다고 규정했다. 이때로부터 중국에는 공산주의를 목적으로 하고 맑스레닌주의를 행동지침으로 하는 새로운 형식의 통일된 노동자계급정당이 탄생했다. 대회는 진독수와 장국도, 리달로 구성된 중앙국을 선출했으며 진독수가 중앙국 서기직을 담임했다.

  二、 제1차국공(國共)합작

1924년1월20일부터 30일까지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손중산의 주재로 광주에서 열렸다. 전국각지와 해외에서 온 165명의 대표가 대회에 참석, 이중에 20여명의 공산당원이 포함됐다. 이대소가 대회 주석단 성원으로 지정되었다. 대회는 진지하고 치열한 논쟁을 통해 <중국국민당제1차전국대표대회선언> 등 중요한 의안을 채택했다.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의 소집은 국민당 개각의 완성과 제1차 국공합작의 형성을 상징한다. 이는 신생의 중국공산당이 민주혁명강령과 통일전선정책 실천에서 이룩한 중대한 승리이다. 또한 손중산 선생이 중국혁명을 추동한 역사적 공적으로서 그의 일생에서 제일 중요한 전환으로 된다. 국공합작의 형성으로 중국공산당은 공개적으로 군중을 선동,조직하고 노동자와 농민운동을 영도하고 추동할수 있게 되어 새로운 혁명고조의 내림에 기초를 마련했다.

  三、(1)토지혁명전쟁의 승리  

제2차 국내혁명전쟁은 "10년내전" 또는 "토지혁명전쟁"으로도 불리우는데 1927년부터 1937년까지 중국인민이 중국공산당의 영도하에 진행한 국내혁명투쟁을 말한다. 1927년 장개석이 혁명을 배반한후 대외적으로 제국주의에 투항하고 대내적으로는 파쑈통치를 실행하여 중국공산당원과 혁명군중을 무참히 학살했다. 8월1일 주은래를 주도로 하는 중국공산당 전선위원회가 남창봉기를 영도했다. 8월7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한구에서 비상회의를 소집하고 진독수의 우경투항주의 착오를 바로잡았다. 토지혁명을 실행하고 국민당반동통치에 무장으로 반항하는 총적인 방향과 지침을 확정했다. 9월9일 모택동이 호남성과 강서성 인접지역에서 추수봉기를 영도했으며 10월 추수봉기부대가 정강산에 도착, 첫 농민혁명근거지를 창설해 중국혁명이 농촌으로부터 도시를 포위하고 궁극적으로 도시를 장악하는 정확한 도로를 개척했다. 1930년말부터 1931년9월까지 홍군은 모택동 등 지도자들의 영도하에 중앙근거지에 대한 장개석의 1차, 2차, 3차 반혁명 "포위토벌"을 분쇄했다.1931년11월 강서 서금에 중앙공농민주정부가 설립되었다. 같은해 일본제국주의가 중국 동북을 침략, 점령한 "9.18"사변이 발생했다. 왕명의 "좌"경 착오로 하여 홍군은 5차 반"포위토벌"에 실패, 1934년 10월 중앙근거지에서 철수해 장정을 시작했다. 1935년 당중앙은 준의에서 정치국확대회의를 소집, 중앙에서의 왕명의 "좌"경 모험주의의 통치를 결속하고 모택동을 대표로 하는 새로운 중앙의 정확한 영도를 확립했다. 이후 홍군은 국민당군대의 포위추격과 차단을 분쇄하고 장국도의 우경분열주의를 극복하고 승리적으로 장정을 완성했다. 1935년 일본제국주의가 화북을 침입하면서 민족적 위기가 날로 가심해졌다.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는 "81선언"을 발표하고 내전을 중지하고 공동으로 항일할것을 호소했다. 12월 당중앙위원회는 정치국회의를 소집해 항일민족통일전선 구축에 관한 방침을 확정했다. 12월9일 학생애국운동이 발발, 항일구국운동의 새로운 고조를 일으켰다. 1936년12월12일 서안사변 발생, 장개석은 어쩔수 없이 내전 중지, 연공(聯共)항일의 조건을 수용했다.

  (2)제2차 국공합작 및 항일전쟁의 승리

항일전쟁이란 1937년7월부터 1945년8월까지 중국인민이 일본제국주의 침략에 반항하여 8년간 진행한 위대한 민족혁명전쟁을 말하며 또한 100여동안 대외 적들의 침입을 반대하는 전쟁에서 중국인민이 완전히 승리를 이룩한 첫번째 민족해방전쟁을 말한다. 이 전쟁은 국공합작을 기초로 사회각계, 여러 민족, 여러 민주당파, 항일단체, 사회 각계층 애국인사와 해외 교포들이 널리 참여한 전 민족적 항일전쟁이다. 중국의 항일전쟁은 제2차세계대전에서 중요한 구성부분으로 된다.

1931년 일본제국주의가 9.18사변을 일으켰다. 민족의 위기에 직면해 중국공산당은 과거에 맺힌 감정과 원한을 버리고 국민당과 공산당이 내전을 중지하고 공동으로 일제침략자와 맞서 중화민족을 구원할것을 주장했다. 1935년 8월1일 중국공산당은 "81선언"을 발표, 항일민족통일전선 구축에 관한 주장을 제기하고 이와 관련해 국민당과 수차 담판을 진행했다. 1937년8월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는 섬서성 낙천에서 정치국확대회의를 개최하고 "항일구국10대강령"을 채택, 전국인민을 이끌고 항일전쟁의 승리를 쟁취하는 근본적인 방침을 확정했다. 중국공산당의 제창과 촉구하에 1937년 9월 국공 양당 항일민족통일전선이 정식으로 결성되었다.

四、중국공산당제7기 2중전회 소집 및 새중국의 창건

1949년3월5일부터 13일까지 중국공산당제7기 2중전회가 중국 하북성 평산현 서백파에서 열렸다. 회의에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34명과 후보위원 19명이 참가했다. 모택동이 회의를 사회하고 중요한 보고를 했다. 모택동은 보고에서 전국이 승리를 이룩한 기초에서 당의 사업중점은 반드시 농촌으로부터 도시로 옮겨야 한다고 지적했다. 승리후 중국공산당의 정치, 경제, 외교 분야의 기본정책과 농업국가로부터 공업국가로 전변하며 신민주주의사회로부터 사회주의사회로 전변하는데서의 총적인 과업과 기본 방도를 천명했다. 보고는 당시 중국의 여러가지 경제성분을 중점적으로 분석했으며 전국이 승리를 이룩한후 국내의 주요한 모순은 노동계급과 자산계급간의 모순이라는데 대해 지적했다. 대회에서는 승리를 이룩한후 교만정서가 생길수 있는데 경각성을 높여야 하며 자산계급의 달콤한 속임수에 중시를 돌려햐 한다고 호소했다. 또한 전당이 겸허하고 신중하며 교만하지 않고 조급정서를 극복하며 계속 간고분투의 태도를 유지할데 대해 지적했다. 대회에서는 중국공산당이 발기해 소집한 새로운 정치협상회와 민주연합정부를 창립할데 대한 건의를 비준했다. 7기2중전회는 중대한 역사적 의의를 가지는 회의였다. 이번 대회는 민주혁명이 전국에서 신속히 승리를 취득하는 과정에 또한 신민주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전변에 충분한 정치, 사상, 이론적 준비를 마련해주었다.

1949년 10월1일 오후 2시, 모택동이 사회한 중앙인민정부위원회는 수도 베이징에서 제1차 전체회의를 열었다. 중앙인민정부 주석, 부주석, 위원 전원이 회의에 참석하고 취임을 선포했다. 대회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중앙인민정부 창건을 선포했으며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공동강령'을 정부의 시정강령으로 할데 대해 일치하게 결의했다. 임백거를 중앙인민정부위원회 비서장으로 선출했으며 주은래를 중앙인민정부 정무원 총리 겸 외교부장으로, 모택동을 중앙인민정부 인민혁명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주덕을 중국인민해방군 총사령관으로, 신균유를 중앙인민정부 최고인민법원 원장으로, 나영환을 중앙인민정부 최고인민검찰국 국장으로 임명했다. 아울러 이들이 신속히 정부기관을 구성해 여러가지 사업을 해나갈것을 위임했다. 오후 3시, 베이징의 30만 군민들은 천안문광장에 모여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창건을 경축했다. 임백거가 대회의 시작을 선포했으며 주석, 부주석과 위원들은 모두 천안문성루에 착석했다. 모택동 주석은 '중화인민공화국중앙인민정부가 창건되였습니다'라고 선포했다. 국가의 주악소리속에서 모택동은 친히 전동스위치를 눌러 첫 오성붉은기를 게양했으며 54발의 예포가 28번 울렸다. 모택동은 정부 공고를 선독해 전세계에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을 선포했다.

五、과도시기 중국공산당 총노선 제출, 사회주의 3대 개조 완성

새중국이 창건된후 전국 여러민족 인민들은 중국공산당의 지도하에 질서있게 신민주주의로부터 사회주의에로의 전환을 실행했다. 1952년 말, 당중앙은 모택동의 건의에 따라 과도시기 당의 총노선을 제출했다. '중화인밈공화국이 창건되여서부터 사회주의 개조를 완성하기까는 한개의 과도시기이다. 이 시기 당의 총노선과 총 임무는 비교적 긴 시간동안 점차 국가의 사회주의 공업화를 실현하며 아울러 국가는 점진적으로 농업, 수공업과 자본주의 공상업에 대한 사회주의 개조를 실현'하는것이다. 총 노선의 요구에 따라 1956년말까지 중국공산당은 중국 특성에 맞는 과도형식을 취했으며 농업, 수공업과 사회주의 상공업에 대해 사회주의 개조를 진행했다. 짧은 기간동안 생산자료소유제의 큰 변혁을 실현했으며 사회주의 개조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이룩했다. 사회주의 개조를 거쳐 착취제도를 기본상 없앴으며 전민소유제와 노동대중집체소유제 이 두가지 사회주의 공유제 형식은 이미 국민경제에서 주도적 지위를 차지했다. 이로부터 사회주의 기본제도가 초보적으로 건립됐으며 중국은 사회주의 초급단계에 진입했다.

六、당의 제11기3중전회, 역사적인 위대한 대전환 실현

1978년12월에 소집한 중국공산당 제11기3중전회는 '4인방'을 짓부신후 2년간 당 사업이 배회하면서 전진하던 국면을 끝낸 회의였으며 새중국이 창건된후 당의 역사에서 심원한 의의를 가지는 위대한 전환을 실현하는 회의였다. 이번 회의에서는 '두가지 무릇'이란 방침을 철저히 부정했으며 사상해방과 실사구시의 지도사상을 다시 확립했고 사상노선의 혼란상태를 수습하고 바로잡았다. '계급투쟁을 강령으로 한다'는 구호의 사용을 다시는 쓰지 않게 되였으며 사업 치중점을 전이할데 대한 결책을 내림으로써 정치노선의 혼란상태를 수습하고 등소평을 핵심으로하는 당중앙의 지도집단을 형성했으며 조직노선의 질서를 바로잡는데서 중요한 성과를 이룩했다. 또한 중국공산당의 민주집중제도의 훌륭한 전통을 회복했으며 민주제도화와 법률제도화의 중요한 임무를 제출함으로써 역사적으로 남아내려온 일련의 중대한 문제와 일부 중요한 지도자의 공과 시비문제를 심사하고 계통적으로 역사적인 시비문제에서 혼란된것을 바로잡는 중대한 작업을 시작했다. 회의에서는 또 모택동의 역사지위와 모택동사상의 과학체계를 정확히 대할것을 제출했다. 전체회의에서 제출한 개혁개방을 실시할데 대한 결책은 중국을 '계급투쟁을 강령으로 하던'데로부터 경제건설을 중심으로 하는데로, 경직 또는 반경직 사회로부터 전면적인 개방에로 나아가게 했으며 페쇄 또는 반페쇄로부터 대외개방의 역사적인 전변을 시작하도록 했다. 일련의 근본적인 전변을 실현함으로써 이번 회의에서는 중국사회주의 개혁개방의 서막을 열었다. 이는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길을 개척하는 시작이였으며 중국이 새로운 사회주의 사업발전 시기에 진입한 표지이기도 하다.

  

  七、"한 나라 두 제도"구상과 홍콩, 마카오의 조국 귀속

"한 나라 두 제도"는 당과 국가가 새로운 역사조건에서 조국통일대업을 실현하는 기본 방침이다. 이는 대만문제를 상대로 제기된 것이며 당중앙에서 기나긴 준비를 거치고 인식이 점차 심화된 결과물이다. 1981년 9월 30일, 엽검영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은 연설을 발표하고 조국평화통일문제와 관련해 9가지 방침정책을 제출했다. 그중에는 국공 양당이 대등담판을 소집하고 제3차 협력을 실시할데 관한 제의와 국가가 통일을 실현한 후 대만은 특별행정구로서 고도의 자치권을 향유하며 현행 사회와 경제제도는 변하지 않고 군대를 보류할수 있는 등 내용이 포함되었다. 그후 얼마지나지 않아 등소평은 상술한 방침을 "한나라 두제도"라고 명확하게 개괄했으며 이로써 조국통일대업을 완성하기 위한 정확한 길을 제시해주었다. 이어 등소평은 또 "한나라 두제도"방침은 마찬가지로 홍콩과 마카오 문제에도 적용될수 있다고 제출했다. 1995년 1월 30일, 강택민은 "조국통일대업의 완성을 추진하기 위해 계속 분투하자"라는 제목의 중요한 연설을 발표하고 현 단계 양안관계발전과 조국평화통일행정을 추동할데 관한 8가지 주장을 제출했으며 "한나라 두제도, 평화통일"의 기본방침을 더 한층 천명했다. "한나라 두제도"의 구상은 먼저 홍콩, 마카오문제해결에 운용되었다. 중국정부는 1997년 7월 1일과 1999년 12월 20일, 선후 홍콩과 마카오 행사주권을 회복했다.

  八、"세가지 대표"중요사상의 제출

2000년 2월, 강택민은 광동 시찰기간 새 시기 당 건설사업을 둘러싸고 조사연구를 진행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우리 당의 70여년 역사를 총화하면서 이런 결론을 내렸다. 바로 우리 당이 인민들의 옹호를 받을수 있는 것은 우리 당이 노동계급 선봉대로서 혁명과 건설, 개혁의 여러 역사시기에 중국 선진사회생산력의 발전요구를 대표하고 중국선진문화의 전진방향을 대표했으며 중국의 가장 광범한 인민들의 근본이익을 대표했기 때문이다." 5월, 강택민은 강소, 절강, 상해를 시찰하면서 이를 "세가지 대표"라고 더한층 귀납했다. 그는 우리 당은 반드시 "세가지 대표"의 요구에 따라 집권수준과 영도수준을 보다 제고시켜야 한다면서 이는 우리 당 당 창건의 기본이고 집권의 기본이며 역량의 원천이라 지적했다. 그는 인민군중의 근본이익을 대표하는 것은"세가지 대표"에서 제일 근본적인것이라고 지적했다. 6월, 강택민은 녕하, 감숙을 시찰하면서 "세가지 대표"의 사상을 재천명했다. 그는 당 조직과 전 당 당원들이 우리 당의 영원한 승리를 위해"세가지 대표"의 요구에 따라 당의 건설을 전면적으로 강화하고 개진할 것을 호소했다. "세가지 대표"사상은 당 건설의 위대한 강령을 전면적으로 강화했을뿐만아니라 새 시기 당 건설을 위해 방향을 제시했다. "세가지 대표"사상의 제출은 전 당의 옹호를 받았고 전국에서 "세가지 대표"정신을 학습하고 실천하는 열조를 불러일으켰다.

  九、과학발전관 수립

당의 1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호금도 총서기는 "중국특색의 사회주의의 위대한 기치를 높이 들고 중등권 수준의 사회의 새로운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분투하자"라는 제하의 보고를 했다. 그는 과학발전관의 첫째가는 임무는 발전이고 핵심은 인본주의이고 기본요구는 지속가능발전의 전면적인 조절이고 근본방법은 계획적으로 총괄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중국 경제개혁과 발전을 더 한층 추동할데 관한 사고방향과 전략을 지적했다. 과학발전관은 경제사회발전을 지도하는 근본지도사상임을 명확히 했고 사회주의건설규칙과 사회발전규칙, 공산당집권규칙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인식이 새로운 높이에로 상승했음을 의미하고 맑스주의 중국화, 맑스주의와 새 중국 국정의 결합이 새로운 고도와 단계에로 진입했음을 상징한다고 지적했다. 과학발전관은 인민대중이 역사의 창조자라는 유물론의 기본원리를 견지했으며 한마음한뜻으로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당의 근본취지를 견지했다. 또한 "대중을 위해 당을 창건하고 인민을 위해 집권하는" 확고한 신념을 수립하고 인민에 의거하는 것을 발전의 전제로 하고 인간의 지위를 제고시키는 것을 발전의 근본 도경으로 삼으며 인간을 존중하는 것을 발전의 근본준칙으로, 인간을 위함을 발전의 근본목적으로 삼으면서 가장 광범한 인민들의 근본이익을 잘 실현하고 잘 유지하고 잘 발전시키는 것을 당과 국가의 모든 사업의 출발점과 입각점으로 삼아 인민군중들이 제일 관심하는 제일 직접적이고 가장 현실적인 이익문제를 잘 해결해 발전은 인민을 위해, 발전은 인민에 의거해, 발전성과는 인민들과 공유하는 경지에 이르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十、사회주의 영욕관 수립

  2006년 3월 4일, 호금도 총서기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제10기 4차회의 민주연맹, 민진계 위원들의 토론에 참가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요구를 제출했다. 광범한 간부 군중들, 특히는 청소년들을 인도해 "조국을 사랑하는 것을 영광으로, 조국을 해치는 것을 치욕으로 삼고,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것을 영광으로, 인민을 배반하는 것을 치욕으로 삼으며, 과학을 숭상하는 것을 영광으로, 우매무지함을 치욕으로 삼고, 신근한 노동을 영광으로, 편한 것만 좋아하고 게으름을 피우는 것을 치욕으로 삼으며, 단결호조를 영광으로, 타인의 이익에 손상주는 것을 치욕으로 삼고, 성실하고 신용을 지키는 것을 영광으로, 사리사욕에 눈이 먼 것을 치욕으로 삼으며, 규칙과 법을 잘 지키는 것을 영광으로, 법을 어기고 규칙을 무시하는 것을 치욕으로 삼고, 간고분투를 영광으로, 거만하고 사치스러우며 음란하고 안일한 생활을 치욕으로 삼는"사회주의 영욕관을 수립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호금도 총서기의 중요한 논술은 내용이 함축되고 강한 민족성, 시대성, 실천성을 띠고 있으며 중화민족의 전통미덕과 시대정신에 대한 유기적인 결합을 구현했고 사회주의기본도덕규범과 사회기풍의 본질적 요구를 구현했으며 사회주의 가치관의 선명한 방향을 나타냈고 양호한 사회풍기를 형성하고 사회주의 조화로운 사회 구축을 추동하는데 중요한 의의가 있다.

사회주의 영욕관은 인심을 모으고 사회의 조화로움을 추진하는 강인한 뉴대이다. 조화로운 사회건설과 사회의 안정은 전반 사회성원들의 사상도덕소질과 큰 관계가 있다. 공동의 이상과 신념이 없고 양호한 도덕규범이 없다면 사회주의 조화로움을 실현할수 없다. "8가지 영광, 8가지 치욕"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사회주의 영욕관은 사회주의시장경제에 부합되고 사회주의 규률규범과 조화를 이루며 중화민족의 전통미덕을 이어받는 사회주의 사상도덕체계에 대한 전면적이고 체계적이며 정확하고 통속적인 표현이다.

사회주의 영욕관을 수립하는 것은 공동의 가치척도로 사람들로 하여금 자아약속을 실현하고 경지를 높이도록 인도하고 도움을 제공함으로써 여러가지 이익관계를 조절하고 여러가지 사회모순을 화해함으로써 사회주의 조화사회 구축을 위해 양호한 도덕기초를 다지는데 이로우며, 사람들의 소질제고, 특히는 사상도덕소질을 제고시킴으로써 전 민족의 사상도덕소질을 한층 제고시키고 사람들의 전면발전과 사회의 전면적인 진보를 추동하는데 이로우며 전체 인민들의 옳고 그름을 명확하게 판단하고 선하고 악한 행위를 구분하며 아름답고 추한 모습을 구분하는 능력을 제고시킴으로써 전 사회적으로 영욕을 알고 바른 기풍을 세우며 조화로운 풍기를 추진하는데 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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