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대신 해서(海瑞)의 자는 여현이다. 광동 경산사람이다. 그는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모친의 슬하에서 자랐는데 가정이 매우 구차하였다. 20살에 해서는 현의 학당에서 학생을 가르쳤는데 학생들에 대한 요구가 엄하기로 소문이 났다. 얼마 안 되여 그는 절강성 순안지현에 부임했다. 해서는 순안에 도착하자 밀린 소송사건을 진지하게 심리했다. 아무리 복잡한 사건이라고 그는 하나하나 똑똑히 조사한 후 처리하군 하였다. 해서는 무고한 사람을 억울하게 처분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하여 현지 사람들은 그를 "청천"이라 칭송하였다.
해서의 직계 상전인 절강 총독 호종헌은 도처에서 약탈을 일삼았는데 그의 눈에 나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봉변을 당했다. 한번은 그의 아들이 순안을 지나다가 순안에서 잘 대접을 하지 않는다고 연회상을 뒤집어엎고 시중들던 사람을 대들보에 달아맸다. 이 소식을 들은 해서는 사람을 보내 호종헌의 아들을 잡아와 심문을 들이댔다. 호종헌의 아들이 애비를 턱 대고 펄펄 뛰었지만 해서는 그를 가짜 공자라고 딱 잡아떼면서 엄벌을 들이대겠다고 했다. 해서는 호종헌의 아들 행장에서 들추어낸 은 천 냥을 모조리 몰수해 국고에 넣고 그를 호되게 꾸짖은 후 현 경계 밖으로 쫓아버렸다.
강직하기로 소문난 해서는 부패를 일삼는 관리들에게는 눈에 든 가시였다. 후에 해서는 무함을 받아 순안지현 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를 무함했던 관리들이 파직된 후 해서는 관직을 회복하고 그 후 서울로 전임하였다.
서울에 올라온 해서는 명세종의 무능함과 조정의 부패상을 더 똑똑히 알게 되였다. 당시 조정대신들은 누구도 감히 황제에게 간언을 올리지 못했다. 해서는 비록 큰 관원이 아니지만 상주문을 황제에게 올렸다. 그는 상주문에서 이렇게 썼다.
"지금 관리들은 탐오를 일삼고 제멋대로 행패를 부리며 백성들은 고난v속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천하의 백성들이 페하에게 불만을 품은지 오랩니다."
상주문을 올린 해서는 목숨이 붙어있기 힘든 줄 알고 미리 관을 마련했다. 과연 해서가 올린 상주문을 본 명세종은 명을 내려 해서를 잡아 가두었다. 그는 해서를 금의위에 넘겨 가혹한 고문을 들어대게 하였으나 해서는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명세종이 죽은 후에야 해서는 옥에서 풀려나왔다.
전제주의가 극단에 이르고 부패가 크게 만연된 명나라 중기에 해서는 청렴한 관리로, 또한 백성위해 황제에게 감히 간언하는 관리로 널리 소문이 났다. 권세에 굴하지 않고 법에 따라 처사하고 우국우민한 해서의 정신은 지금도 귀감으로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