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부의 안휘성 합비(合飛)의 아름다운 대촉산(大蜀山)기슭에는 고색이 창연한 안휘특색의 휘파(徽派)건물이 우아하게 위치해 있습니다. 그 건물이 바로 안휘성 최초의 민영박물관인 안휘문화를 보여주는 원천휘(源泉徽) 문화박물관입니다. 그럼 오늘은 저와 함께 안휘성 원천휘 문화 개인박물관으로 여행을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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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직한 박물관의 문을 밀고 박물관에 들어서면 깊이를 알수 없는 안휘역사의 심오한 경지에 들어선듯 합니다. 박물관의 주인 선번추(宣繁秋)씨는 원래 안휘상인을 대표하는 휘상(徽商)이었고 사업을 하였는데 그 과정에 점차 안휘문화에 매료되어 관련 유물을 소장하게 되었습니다.
선번추가 소장업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우연한 기회때문이었다고 합니다. 1981년 그는 동료들과 함께 안휘의 한 시골마을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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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몇명과 함게 시골에 낚시하러 갔다가 우연히 이쁘고 큰 독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그 가치가 얼마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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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그 독은 한 농가의 탈곡장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습니다. 선번추도 그 때는 그 독의 가치를 전혀 몰랐고 다만 그 독이 밝은 불빛처럼 주변을 환하게 비춘다고 느꼈습니다. 이 독에 꼭 무슨 사연이 깃들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한 선번추는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면서 수소문했습니다. 결과 그 독은 한 노인이 1950년대에 상해로부터 이 곳 안휘 시골로 올 때 가지고 온 것으로써 수십년동안 완정하게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주인은 독이 물을 담기에도 편리하다는 이유로 팔기를 거부했습니다.
후에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그 독은 400년전 청나라 건륭(乾隆)황제 때의 유물임이 밝혀졌습니다. 선번추는 그 때로부터 시간만 있으면 그 할머니를 찾아뵙고 할머니의 몸이 편치 않으면 병원까지 모시고 다녔습니다.
선번추의 성의에 감동된 할머니는 그 독을 선번추에게 선물했고 선번추는 노인에게 억지로 50원을 드렸습니다. 그 때 당시 50원은 선번추의 두달 노임이었습니다.
그 독이 청나라 때의 청화자기임을 알게 된 후 선번추는 더더욱 소장욕망이 생겼습니다. 이렇게 선번추는 두터운 역사문화를 가지고 있는 안휘성 남부의 휘주(徽州)지역에서 휘주문화유물의 소장을 시작했습니다. 그 때가 바로 1981년이었습니다. 선번추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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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저와 일부 예술가들이 안휘성의 환남지역 즉 휘주문화의 발상지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도중에 우리는 휘주에서 오래동안 전해내려온 고대의 저택과 사당, 다리, 사찰 등 휘주문화를 보여주는 건물들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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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번 여행에서 감동을 받은 선번추는 휘주의 구석구석을 훑다싶이 돌아다니면서 고건물 중의 건자재, 석각, 목각, 벽돌조각, 교량부품 등을 소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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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가장 일찍 수집한 것이 주로 고대 민가를 보여주는 물건들이었습니다. 예하면 고대민가건축에 씌였던 건자재, 석각, 목각, 벽돌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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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흐르면서 선번추는 안휘성의 남부인 휘주지역만 돌아다닌 것이 아니라 안휘성의 북부지역과 중부지역에도 문화재 소장의 발걸음을 남겼습니다. 끊임없는 노력으로 지금까지 그는 6만여점에 달하는 문화재를 모았고 모든 소장품에는 사연이 깃들어 있습니다.
원천휘문화 박물관에서 가장 중요한 소장품은 천록(天祿)이라고 하는 상서로운 짐승을 조각한 석각물입니다. 2001년 선번추는 안휘성 북부의 한 시골 나무밑에서 이 문화재를 발견했습니다. 이 석각은 줄곧 몇 세대가 함께 살아가는 한 저택의 입구에 놓여 있었습니다. 처음 박물관 소장을 제출했을 때 이 가문에서는 동의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상서로움을 대표하는 이 석각이 집문을 떠나면 가문에 불행이 찾아올까 저어해서였습니다.
나중에 수차의 설득을 거친 후 끝내 주인집의 동의를 받아 석각물은 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는데 그 때 온 동네 사람들이 폭죽을 터뜨리면서 석각을 환송했고 문화의 전승을 위해 문화재를 기부한 사람들의 사적은 박물관의 문서에 기록되어 역사로 남게 되었습니다. 선번추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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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마지막으로 갔을 때 현지 주민 2백여명이 모두 나와서 폭죽을 터뜨리면서 이 돌조각을 환송했습니다. 그때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지금 이 소장품은 아주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문화재 보호에 큰 지지를 준데 대해 아주 감사하게 생각하며 이런 이들은 모두 자료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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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사람들이 안휘문화의 매력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 선번추는 1991년부터 휘문화 박물관 설립을 정부에 신청했습니다. 선번추는 1991년 미국방문 시 수백년의 역사밖에 없는 미국이 전 세계의 보물을 가져다 많은 박물관을 만든 것을 보고 자신도 안휘문화 박물관을 세우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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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에 미국을 방문했을 때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시 미국박물관에는 아시아전시관만 있고 중국전시관은 없었습니다. 수백년의 문화역사를 가지고 있는 미국은 우리와 비할바도 안되지만 전세계의 많은 보물을 소장해두고 있었습니다. 각 나라의 많은 문화재가 그곳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 때 나는 일종의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그 책임감은 우리도 우리의 문화와 문화재를 보호하고 계속 고양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기업운영의 방식으로 돈을 벌 수 있으면 투자를 했는데 나중에는 일종의 사명감을 가지게 되었고, 더는 단순한 애호나 소장이 아니라 사유가 승화하는 과정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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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번추의 노력을 거쳐 2003년 6월에 안휘성 문물국은 휘문화박물관의 설립을 동의하는 서류를 내려보냈습니다. 2006년 합비 촉산구에서 농업시범단지내의 토지를 원천휘문화 박물관의 영구입지로 결정했고 그로 인해 원천휘문화박물관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선번추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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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민영박물관의 대번영, 대발전의 시기를 맞이했습니다. 특히 역사적으로 지금 중국처럼 문화를 중시한적이 없었습니다. 지금 각급 정부는 모두 명확한 태도표시를 하고 문화발전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발전추세로 볼때 우리 같은 사람들은 문화보호와 발전에 있어서 더는 아무런 우려가 없이 대담하게 생각을 펼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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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원천휘문화박물관의 전시관 면적은 3천평방미터가 넘으며 타지에서 보존용으로 옮겨온 휘주파 고건물이 6채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런 건물안에는 다양한 전시품들이 있습니다. 이곳 박물관이 다른 박물관과 다른 점이라면 전시물들이 유리로 된 전시부스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모양대로 복원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 박물관에 들어서면 박물관이라는 분위기보다는 진실하고 생동한 안휘의 생활환경과 문화분위기속에 들어선듯 착각하게 됩니다. 선번추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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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사람들이 이런 조각을 만들 때 마음은 아주 경건했을 것입니다. 때문에 조각물 하나하나에서 모두 그들의 진지하고 경건한 마음을 엿볼수 있습니다. 이런 조각물들은 원가를 계산할수 있는 상품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러 나온 문화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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