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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듣고 계시는 음악은 내몽골 서부에 있는 올도스의 민요 <징기스칸의 두 필의 준마>라는 노래입니다. 내몽골자치구 서부의 올도시 이진호로기에 있는 간델초원에는 세개의 파오식의 웅위로운 전당이 있습니다. 이곳이 바로 국내외에서 유명한 징기스칸능원입니다. 그럼 오늘은 저와 함께 내몽골자치구 징기스칸능원으로 여행을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음악
해마다 수많은 여행객들이 징기스칸능원을 참배하기 위해 내몽골자치구 올도스시를 찾습니다. 올도스란 몽골어로 <많은 궁전>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진호로기는 중국어로 <성군의 능원>이라는 의미입니다. 징기스칸은 몽골민족 역사에서 걸출한 수령이었으며 또 중화민족의 위대한 군사가, 정치가였습니다. 13세기 징기스칸은 몽골족의 각 부락을 통일하고 국토가 광활한 대제국을 건립했습니다. 이는 그의 후세들이 중국의 중원대지에 진입하고 통일된 원나라를 건립하는데 기반을 닦아주었습니다. 징기스칸은 중서양 문화와 무역을 추진하는데서 뛰어난 공훈을 세운 사람입니다.
징기스칸이 사망한 후 구경 어디에 안치되었는지는 줄곧 수수께끼로 남아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주 일찍부터 이진호로지역에는 징기스칸 영령을 모시는 궁전이 있었습니다. 이진호로기에서 제사를 지내는데는 재미있는 전설이 담겨있습니다.
700여년전 징기스칸이 60살정도 되었을 때 대군을 인솔해 최후의 원정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그의 대군은 수초가 풍성하고 아름다운 올도스지역의 간델초원을 지나게 되었는데 이 경치를 본 징기스칸은 이곳은 "부흥의 땅이고 태평성세의 땅이며 매화와 노루가 뛰어노는 정겨운 곳"이라면서 나중에 자신이 죽고나면 이곳에 묻어달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1227년 징기스칸은 서부정벌도중에 별세했으며 그의 부하들은 그가 생전에 입었던 옷과 보검 등을 칠보상자에 넣어 고향으로 가져가려 했습니다. 도중에 한 초원을 지나다가 마차가 갑자기 깊이 빠지게 되었는데 온갖 방법을 다 써도 끌어낼 수 없었습니다. 부하들은 그 자리에서 기도를 올렸고 그때 칠보상자가 갑자기 화려한 광채를 뿜더니 보검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때야 사람들은 징기스칸이 생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고 하여 칠보상자를 그곳에 모시기로 결정했습니다. 나중에 이곳은 지금의 이진호로 즉 "성군의 능원"이 되었습니다. 징기스칸능원 관리위원회의 부주임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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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일본침략군이 능원을 약탈하려 했기 때문에 하는수 없이 능원을 감숙성의 흥륭산(興隆山)으로 옮겼습니다. 나중에 또 청해성의 타르사로 이사했고 1954년에 와서야 몽골족인민의 요구에 의해 다시 올도시고원으로 이사했습니다. 징기스칸이란 이 위대한 몽골족영웅을 기리기 위해 중국중앙정부는 전문자금을 조달해 능원을 다시 복구했으며 지금은 해마다 성대한 제사의식을 지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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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기스칸능의 주체는 몽골민족 전통건축풍격의 세개의 서로 통해 있는 파오식 대전입니다. 중간에 있는 대전의 높이는 26미터에 달합니다. 파오식의 아치형천정에는 상서로운 구름무늬가 조각되어 있으며 옥탑의 이중 비첨은 파란색의 유리기와로 만들었습니다. 징기스칸능원을 둘러싸고 있는 담은 흰색이고 궁전문은 붉은색인데 장엄하면서도 신비롭게 보입니다.
정전에 들어서면 바로 앞에 7미터 높이의 징기스칸 조각상이 있습니다. 조각상은 전포를 입고 허리춤에 보검을 차고 있으며 위풍당당하게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입니다. 그 뒤에 있는 벽에는 유라시아 대륙의 역사지도가 그려져 있습니다. 정전 뒤쪽은 침궁인데 안에 파오 세개가 있습니다. 이 파오들은 각기 징기스칸과 그의 부인, 형제들의 영령을 모시는 파오입니다. 동서향의 궁전을 이어주는 서쪽 회랑벽에는 징기스칸의 출생과 성장, 서정, 동정 마지막으로 통일에 이르기까지 몽골 각 부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으며 동쪽 회랑에는 쿠빌라이를 비롯한 징기스칸 자손들의 위훈과 업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동서 궁전에는 징기스칸의 작은 아들과 부인의 영포(靈包)와 징기스칸의 아홉명의 장군을 상징하는 아홉면의 뾰족한 깃발-구면첨각(九面尖角) 깃발이 있습니다. 능원에는 또 징기스칸이 생전에 쓰던 말안장과 보검, 창 등 물품들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징기스칸의 영구는 당시 몽골 각 부에서 선발한 다르호트라 불리는 오백명의 정예부대가 줄곧 전문 지키고 그들이 제사와 관리를 담당했습니다. 이때부터 다르호트는 아주 특별한 부족이 되었으며 그들은 군에 가지않고 납세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품계도 없이 대대손손 징기스칸만을 위해 일했습니다. 800년이래 다르호트인들은 열악한 환경조건속에서도 남북을 누비며 줄곧 징기스칸능을 완정하게 보존하기 위해 애썻습니다. 그들이 있었기에 역사가 유구한 13세기 몽골족 제사문화는 아직도 보존되어 있으며 이는 세계적으로도 드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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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족의 전통제사의식은 아주 신성하고 장엄합니다. 징기스칸에 대한 다르호트인들의 제사는 매일 있으며 1년중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네번 대형의 제사의식을 가집니다. 특히 음력 3월 21일 봄철에 지내는 제사는 아주 성대합니다. 이날은 징기스칸이 군사적 재능을 과시하고 혁혁한 공훈을 세운 기념일이라고 합니다. 매년 이날이 되면 수많은 유목민들이 먼길도 마다하지 않고 자녀들을 데리고 신선한 우유, 차, 술 등 제물을 능원으로 가지고 와서 신성한 제사를 지내며 축복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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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바야르는 징기스칸능의 침궁 영전앞에서 제사를 지내는 이들에게 축복을 내려주는 몽골족입니다. 올해 30살인 그는 남색의 몽골족도포를 입고 제사를 지내러 오는 사람들에게 하다를 건네주고 장명등을 밝혀주며 성주 징기스칸의 공덕을 찬송하고 그들을 위해 축복해주었습니다. 호스바야르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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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은 지금까지 39대에 이르기까지 징기스칸능원 지키고 있습니다. 16살때부터 아버지에게서 '성주송'등 제문과 제사예법을 배웠습니다. 주로 하는 일은 매년 네차례 진행되는 대형 제사활동을 주재하는 것입니다. 평소 매일 성주 징기스칸을 위해 향을 피우고 장명등에 기름을 첨가합니다. 또 능원 침궁의 청소도 담당하고 있습니다. 능원을 수호하는 다르호트인들은 각기 분공도 다르고 직무도 다릅니다. 모든 직무가 다 세습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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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발전해도 해마다 진행되는 징기스칸에 대한 제사는 중단되지 않았지만 시대의 변화와 함께 다르호트인들의 생활과 일, 관념에도 전대미문의 변화가 생겼습니다. 나추거라고 하는 다르호트인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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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다르호트인의 생활에는 아주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징기스칸능 관리사무소에서 관리직책을 전문 담당하는 50여명의 다르호트인외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축목업, 농업에 종사하며 장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때문에 생활형편이 점점 좋아졌습니다. 정부에서도 몽골족인민의 감정을 아주 존중해서 거금을 들여 징기스칸능원을 보수했습니다. 그리고 전문기구를 내와 징기스칸과 그의 군사전략사상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한때 징기스칸능원을 지키던 다르호트인들은 지금 징기스칸 연구전문가 되어 많은 논물을 발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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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추거의 말처럼 오늘 날 다르호트인들은 더는 도처에서 고생하거나 모금에 의거해서만 생활하지 않아도 됩니다. 지금 그들의 생활조건은 그의 선조들이 꿈에도 생각지 못하던 것이었습니다. 징기스칸능에서 남으로 쭉 뻗은 아스팔트길 양측에는 별장식의 건축이 줄지어 있는데 이는 다르호트인들의 주택입니다. 징기스칸능원 근처에 있는 140여가구의 다르호트인들은 90%이상이 자가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총명한 다르호트인들은 하늘이 내린 좋은 기회와 지리적 우세를 이용해 그리고 자신의 지혜를 충분히 발휘해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도 부지런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늘 여행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