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칙서 (林则徐) 자는 소목이고 복건성(福建省) 후관현 출신이다. 1811년 진사가 된 후 공자진, 위원 등과 함께 경세치용의 학문을 제창했다. 임칙서는 선후로 동동하도총독과 강소순무(江苏巡抚), 호광총독(湖广总督)에 역임했다.
임칙서가 벼슬하던 시기 청나라는 은의 부족으로 백성들은 곤경에서 허덕였다. 그 원인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영국과의 아편무역으로 인한 것이었다. 당나라 때 조공품의 한 품목으로 중국에 들어온 아편은 황실, 귀족, 급기야는 민간의 부유층에까지 급속히 확산되었다. 1820년, 아편 수입량은 4000여 상자(한 상자 무게 100근 내지 120근 달했고 1838년에 와서는 아편 수입량이 4만여 상자에 달했다. 18년 사이 중국의 백은이 2억여 원이나 아편 무역에 탕진되었다.
호광총독을 담임하던 시기 임칙서는 도광제(道光帝)에게 아편을 금지할 데 관한 "조진아편금연소"를 올려 이미 상주된 황작자의 엄금론에 찬동하면서 구체적이고 강경한 방법을 제시했다. 임칙서의 제의는 즉각 황제에게 받아들여졌다. 황제는 그를 흠차대신(钦差大臣)으로 봉하고 광동에 파견해 아편 흡연을 근절시키도록 했다.
임칙서는 광동에 도착한 후 먼저 아편 밀수, 흡연 장소 ,아편을 운송하는 영국 선박 등에 대해 비밀리에 조사를 진행한 후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웠다. 그는 아편 금령을 선포함과 동시에 아편 판매상들은 3일내에 그들이 소유한 아편을 바쳐야 하며 외국 상인들은 앞으로 영원히 중국에 아편을 팔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라고 강경히 요구했다.
임칙서는 아편을 피우는 사람, 흡연자에게 기구나 설비를 제공하는 사람에게도 엄벌을 내리는 한편, 중국과 영국의 무역을 전면 중지시키고 군대를 파견하여 영국 상관을 포위했다. 1839년 임칙서는 영국 상인들에게서 몰수한 아편20,238 상자를 호문(虎门) 백사장에서 소각시켰다. 당시 이 아편을 소각하는데 20여일이 걸렸다고 한다.
아편을 소각한 임측서의 장거는 중화민족의 존엄을 수호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편 소각사건으로 중국과 영국 관계가 팽팽하게 긴장된 상태에서 영국의 한 수병이 중국인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임측서는 살인한 영국 수병의 인도를 요구했으나 영국 측은 이를 거절했다. 이 분쟁을 계기로 영국은 자국 상인들의 이익을 더욱 확대하려고 전쟁을 선포했다. 1840년 영국원정군이 광동에 파견되었는데 임측서가 바다 방어에 전력했기에 영국군은 광동을 포기하고 연해를 따라 북상해 베이징을 위협했다. 이에 크게 놀란 조정은 임칙서를 해임했다. 1841년 임칙서는 이른바 "아편전쟁을 도발"했다는 죄명으로 신강에 유배되었다.
임칙서는 벼슬하던 기간 중국도 새롭게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여 그는 해당 인사들로 하여금 외국의 역사와 지리를 연구하게 하는 한편 외국의 동태를 알기 위해 신문, 잡지, 서적 수집과 번역을 적극 추진해 "사주지", "화사이언" 등을 편찬했다.
그가 남긴 저서로는 "임문충공정서", "운좌산방문초", "운좌산방시초"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