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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에 깃든 이야기] – 지난 세기 60,70년대에 중화대지를 휩쓴 노래
--"연변인민 모주석을 열애하네"
14'53"
사회자: 네. 오늘 역시 석화 선생님 모십니다. 안녕하세요.
석화: 안녕하십니까.
사회자: 오늘은 어떤 노래 준비하셨지요?
석화: 오늘은 전 중국 인민들이 다 즐기는 노래지요. "연변인민 모주석을 열애하네". 이 노래 같이 들어볼까요?
사회자: 네
[노래]
사회자: 네. "연변인민 모주석을 열애하네". 이 노래를 듣고 돌아왔습니다. 이 노래는 역사적 배경이 담긴 노래지요.
석화: 그렇지요. 중국의 1966년부터 1976년. 이 십년을 문화대혁명시기라고 하지요. 어떻게 말하면 대동란시기이고. 중화민족 전체의 시련의 시기였지요. 그러나 이러한 시련의 시기에 이 노래가 가장 많이 불리웠던 노래입니다. 문화혁명기간에 충성이라 할까요. 여러가지 사회적 분위기때문에 "연변인민 모주석을 열애하네" 이 노래가 마침 연변의 대표적인 멜로디로 만들어졌는데요. 사실 이 노래는 문화혁명 이전에 만들어진 노래입니다.
사회자: 그래요?
석화: 문화혁명 이전인 1965년에 만들어졌는데 바로 이듬해 1966년. 문화혁명이 발발했습니다. 그러한 분위기에 맞췄기때문에 그 시기에 굉장히 이슈가 되어 여러분들한테서 많이 불리워졌지만 사실 이 노래 역시 참 곡절많은 노래입니다.
사회자: 그 곡절 한번 들어볼까요?
석화: 네. 이 노래는 1965년 작사 한윤호 선생님. 작곡은 저명한 작곡가 김봉호 선생님입니다. 김봉호 선생님은 이 노래로 인해 전국에서 이름난 작곡가로 되지요. 그러나 1965년 10월. 이 노래가 만들어질때는 두 분다 시골, 화룡문공단의 심바람군? 이렇게 말하면 어떨지 모르겠는데 "보잘것 없는 예술가"였습니다. 이 노래가 전국적으로 울려퍼지고 이 노래때문에 작곡가 김봉호 선생님이 후에는 길림성 문화국 부국장 타이틀까지 받았을꺼예요. 그후 베이징에서 활동하시고… 물론 김봉호 선생님의 음악적 성취가 대단하지만 우리가 지금 얘기하고 있는 것은 65년도의 김봉호 선생님입니다.
사회자: 네. 그 당시 김봉호 선생님이지요.
석화: 네. 당시 처음에 한윤호 선생님이 가사를 먼저 썼습니다. 그리고 가사 노래제목도 "연변인민 모주석을 열애하네"라는 제목이 아니였겠지요. 일단 처음에 작성한 노래 가사를 제가 한번 읽어드릴까요?
사회자: 네. 부탁드립니다.
석화: 처음 제목은 "붉은 태양 모주석"이었습니다. "장백산 봉이마다 보배 많아 보배산 / 기름진 공사벌에 풍년들어 황금산 / 보배산 황금산을 그 누가 주셨나 / 경애하는 우리령수 모주석이 주었지 / 아, 모주석! / 우리네 연변은 살기가 좋아서 / 사람마다 한맘으로 모주석을 노래하네" 이것이 바로 처음 가사의 원형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흔적이 있지요.
사회자: 그렇네요. "아, 모주석! … 한 마음으로 모주석을 노래하네" 지금의 멜로디. 지금의 가사지요.
석화: 그렇습니다. 이 가사를 쓰고 한윤호 선생님 본인도 잘 썼다고 만족했습니다. 그리고 이 가사를 들고 김봉호 선생님을 찾아갔지요. 같은 문공단이고 친구니까. 이렇게 멋있는 가사를 썼는데 당신이 곡을 좀 달아주라고 부탁했습니다. 김봉호 선생님이 가사를 받아보니 구절구절 뜨거운 감정이 살아있는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김봉호 선생님은 어느 회상기에도 이렇게 썼습니다. "보니까 엄청난 가사다. 함부로 다룰 일은 아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알았습니다"라고 말하고 가사를 품고 집으로 돌아왔답니다. 현재 많은 작곡가들은 피아노로 곡상을 잡지요. 김봉호 선생님은 가야금으로 곡상을 잡았어요. 둥기당 둥기당 하면서… 집에 돌아가 가사를 음미하면서 가야금을 튕겼다라고 김봉호 선생님 회억록에 쓰여져 있습니다. "문득 선률이 튕겨나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회자: 참 "문득"이란 단어를 많이 쓰는데요.
석화: 그렇지요. 예술가들은, 물론 작곡가, 시인, 화가도 마찬가지로 "문득"이란 단어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문득"은 영감을 말하는 것인데 그것이 머리속에 들어와 가슴속에 들어와 만들어지는 울림이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거든요. 물론 창작자들도 그렇지만 도를 닦는, 수련하는 분들도 "문득"이란 단어를 아주 중요시합니다. 어느 스님이 말씀하셨지만 10년동안 수련해서 깨우치지 못하는 것을 어느 하루 아침에 빗자루로 마당을 쓸다가 돌맹이가 디굴디굴 굴러 어떤 나무그루터기에 마치는 것을 보는 순간 "득도"했다고 하셨습니다. 이 "문득"이 결코 하늘에서 문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까 스님도 10년을 수련했던 과정이 필요한 것이고 이 곡의 작곡가 김봉호 선생님도 결코 "문득"이 아니지요. 그 전에 가야금을 팅기고 화룡문공단에서 수많은 곡들을 접하고 창작하는 과정에서 이 "문득"이 나온 것입니다.
사회자: 그렇습니다.
석화: 그럼 다시 "문득"으로 갑시다. "문득 선률이 튕겨나왔다. 가야금줄마냥 탄성이 있고 경쾌한 안땅절주를 생각하며 반복적으로 흥얼거리면서 노래의 첫머리(동기)를 찾았다." 이 선률이 바로 첫 구절입니다. "그래서 장백산 봉이마다 보배많아 보배산을 튕겨보았다. 숨김없는 말이지만 당시 이 선률이 세상에서 제일 좋고 아름다운 것으로 생각되었다." 김봉호 선생님의 말입니다.
사회자: 참 만족하셨네요.
석화: 그렇지요. "하여 이를 바탕으로 전개해 이 노래를 완성하였다"
사회자: 김봉호 선생님의 회억록에 이렇게 쓰여져 있었습니다.
석화: 그렇습니다. 계속 들어보도록 할까요. "이튿날 숨가삐 달려가 한창 아침식사중인 윤호동무를 끌어당겨서 ""윤호동무, 곡을 완성하였소"하고는 그에게 1절을 불러주었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으로 "봉호동무, 다시 한번 불러주오"라고 했다. 나는 감정을 돋워 또 다시 노래를 불렀다. 그제야 윤호동무는 나의 어깨를 툭 치면서 한마디로 "참 좋소"라고 긍정하였다." 라고 썼습니다. 이것이 "연변인민 모주석을 열애하네"라는 노래가 만들어진 경과입니다.
사회자: 본인이 밤새 작곡을 하시고 이튿날 급히 작곡한 부분을 들려드리고, 상대방의 승인을 받기까지…
석화: 그렇지요. 작곡가가 작사가를 찾아가 "나는 이런 멜로디를 찾았습니다"라고 하니까 그 어른도 한번이 아니고 "다시 불러보오"라고 말했습니다. 참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노래가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가사도 바뀌고 많이 수정되면서 연변인민 모주석을 열애하네라고 되었습니다. 사실 예술작품이라는 것은 어떤 시대의 산물이라고 하지만 그 시대 자체는 또한 존재이유가 있거든요.
사회자: 그렇지요.
석화: 문화대혁명이라는 10년은 동란의 시기였고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족에게 엄청난 시련을 주었지만 그 과정에서 이런 아름다운 노래가 만들어졌다는 것은 좀 아이러니하겠지만 우리에겐 큰 복을 준 것입니다. 전 중국에 퍼짐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연변조선족이라는 민족이 있고 조선족이 명랑한 선률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노래는 아마 50대 이상, 더 이상인 분들에게 추억이 많은 노래가 아닐가 싶습니다.
사회자: 그렇습니다. 요즘에도 해마다 진행하는 CCTV 음력설 야회때도 소수민족대표로 나올때 조선족 대표음악으로 깔려있잖아요.
석화: 그렇지요. 명곡중의 명곡입니다.
사회자: 네. 맞습니다. 가사는 여러번 바뀌면서 전해왔고 대부분 사람들은 최종 가사를 기억하고 있지만 명곡은 명곡입니다.
석화: 그리고 처음 만들때 에피소드. 작사가 한윤호 선생님. 작곡가 김봉호 선생님 두분의 오고가는 이야기…
사회자: "문득"… 네. 참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다시 한번 생각하시면서 이 노래 감상하시길 바랍니다. 노래 보내드립니다. "연변인민 모주석을 열애하네"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