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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건물의 동네로 불리는 대기두(大旗頭)촌은 중국 광동성 불산(佛山)시 삼수(三水)구 낙평(樂平)진에 위치해 있다.
우아한 대기두촌에 들어서면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듯 착각하게 된다.
솥의 손잡이 모양의 지붕벽에 청색의 벽돌로 된 똑 같은 건물 200여채가 바둑판처럼 질서 있게 줄지어 있고 임의의 건물에 들어가 봐도 건물구도 역시 거의 비슷하다.
대기두촌은 일명 정촌(鄭村)으로도 불리운다. 청(淸)나라 병부상서와 광동(廣東) 해군 제독을 지낸적 있는 1834-1896년까지의 정소충(鄭紹忠)의 생가가 있는 동네이기 때문이다.
청나라 자희(慈禧)태후가 정소충을 아끼는 마음에서 1894년 정소충의 60세 생일때 건물을 지어 동네를 만들고 정씨성의 모든 사람이 무료로 살게 했다고 한다.
간주
대기두촌에는 유례정공사(裕禮鄭公祠)와 정씨종사(鄭氏宗祠)를 망라한 사당건물, 진위장군가묘(振威將軍家廟) 등 가문의 절, 상서제(尙書第)와 건위제(建威第)를 비롯한 관저, 탈곡장, 광장, 연못 등이 똑 같은 풍격으로 조화로운 구도를 형성한다.
그밖에 석각과 목각, 벽돌조각, 벽화 등도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정교한 기법으로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대기두촌의 여러 곳에서 앞쪽은 열려 있고 뒷쪽은 막힌 빗 모양으로 된 동네의 구도를 볼수 있다.
동네 자체가 앞쪽이 낮고 뒷쪽이 높으며 집집마다의 뜰도 뒤로 올라가면서 비스듬히 경사를 이룬다. 이는 배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건물과 건물사이의 청석길에도 가끔 동전만큼 크기의 구멍을 내서 빗물이 그 구멍을 통해 지하의 배수로로 빠지게 만들었다.
모든 집의 물은 배수로를 통해 자연스럽게 지세가 낮은 동네 앞쪽 연못에 모였다가 다시 강물로 흘러간다. 돌길은 또한 한 쪽에는 문을 만들고 다른 한 쪽은 막혀 있다. 때문에 외부세력의 침입이 있을 경우 길의 문만 닫으면 온 동네가 철통같은 보루로 변해버린다.
간주
대기두촌의 건물은 모두 모양이 똑 같은 곽이옥(镬耳屋)이다. 지붕이 솥의 손잡이처럼 생겼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규모는 상이하지만 모두 뜰을 하나 두고 가운데 안채가 있고 양쪽에 주방과 복도를 거느린 구도이다.
안채는 병풍으로 거실과 침실로 분류되고 침실의 위에는 잡화를 두는 다락방을 만들었다. 병풍앞에는 불단을 만들고 조상의 위패를 공양한다. 귀처럼 위로 불쑥 올라간 지붕벽은 화재를 막는 동시에 출세한다는 의미도 보여준다.
이런 벽은 또한 가운데 부분이 높고 양쪽이 상대적으로 낮다. 과거 관모(官帽)를 의미하는 이런 지붕벽은 관리저택에만 사용이 가능했는데 후에는 명문이나 부자들도 사용했다.
전하는데 의하면 무인출신의 관료인 정소충은 벼슬길에서 무지식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때문에 대기두촌 곳곳에서 문화에 대한 갈망과 자손들은 공부를 잘 해야 한다는 정소충의 기대를 읽을수 있다.
연못가에 솟은 3층 높이의 문필탑(文筆塔)은 거꾸로 선 붓의 모양이고 탑의 하단에 놓여 있는 두 돌은 벼루와 인감의 모양을 본 땄으며 그 곁의 연못은 종이를 방불케 한다. 문방구를 본딴 이런 구도는 자손들이 공부해서 벼슬할것을 바라는 정소충의 소망을 보여준다.
간주
오늘날 대기두촌에는 주거하는 사람은 없고 동네의 주민들은 모두 대기두촌 인근에 새로 조성된 마을로 이사를 갔다. 하지만 현지 풍속에 의하면 조상들이 지은 사당과 책방, 가문 절 등 건물은 가문의 영혼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막부득이한 상황이 아니고는 절대로 허물지 못한다.
그 때문에 정씨 가문의 자손들은 가문의 기억을 유지하고 가문의 단합력을 키우기 위해 오늘날도 사당 등 건물을 청소하고 명절때나 가문에서 행사가 있을 때면 사당에 모여 의식을 치르고 함께 식사를 한다.
대기두촌을 관광하는데 가장 좋은 시간은 오후 4시 후이다. 저녁노을이 솥 손잡이 모양의 벽을 부드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또한 이 때 정씨종사의 문을 열면 황혼의 햇빛이 정문을 통과해 사당 건물까지 비추며 황홀한 비경을 이룬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