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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시골 최초의 성-곽욕촌
2014-04-18 15:37:15 cri

중국 시골 최초의 성으로 불리는 곽욕(郭峪)촌은 중국 산서성 진성(晉城)시 양성(陽城)현 북류(北留)진에 위치해 있다.

당(唐)나라때 축조된 보루식 건물군락인 곽욕촌은 산발에 기대서 웅장함을 과시한다.

성안에는 높이 솟은 예루(豫樓)와 고풍스러운 절, 호화스러운 관저, 우아한 저택들이 늘어서서 "산위에 산이 있고 절안에 절이 있는" 기이한 경관을 형성한다.

곽욕과 시랑채(侍郞寨), 흑사파(黑沙坡) 세 부분으로 구성된 곽욕촌에는 노사원(老獅院)과 소사원(小獅院), 진씨 십이택(陳氏十二宅), 왕가 십삼원(王家十三院)을 비롯해 명(明)나라때 저택 40개, 1100여개 방이 남아 있다. 그밖에 예루와 탕제묘(湯帝廟), 무대 건물을 비롯한 공공 고건물도 적지 않다.

간주

600여년전 명나라때 도적떼를 막기 위해 거주와 방어기능을 갖춘 곽욕성을 쌓았다. 성벽의 옆에는 보조용으로 3층 높이에 628개 창을 둔 움을 파서 사람이 살기도 하고 방어시설로도 사용했다. 이런 움은 멀리서 보면 마치 벌둥지 같다고 해서 곽욕성은 일명 봉와성(蜂窩城)으로도 불리운다.

곽욕성에는 성문 3개에 망루 10개, 움막 18개가 설계되어 있고 성의 귀퉁이에는 정자가 아담하게 솟아 있다. 그 중 물가에 위치한 동문은 곽욕촌의 정문으로 세 성문 중 지세가 가장 낮다.

성문위에 경양(景陽)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곽욕성은 경양성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진다. 오늘은 한 구간만 남아 있지만 높이 솟은 곽욕성은 아아하고 웅장할 뿐만 아니라 아주 견고하다. 전하는데 의하면 과거에는 말을 타고 성위를 달릴수 있었다고 한다.

곽욕촌의 서남쪽에는 홍수 방지용으로 낸 수문(水門) 서수문(西水門)이 있다. 그리고 곽욕촌의 길은 이 서수문을 기점으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면서 후가(後街), 전가(前街), 중가(中街)로 나뉜다.

세 갈래의 길을 관통하는 상가(上街)와 하가(下街)가 곽욕촌을 바둑판처럼 만든다. 모든 거리의 양쪽에는 회백색의 벽돌로 지은 명나라때의 2층 건물이 줄지어 있다.

간주

곽욕촌은 예로부터 경제가 번창한 상업중심이어서 많은 객상들이 이 곳을 거쳐 가면서 이 곳에 다양한 시설이 갖추어지고 화물을 실은 차량이 들끓는 거리는 더 없이 흥성거렸다.

명나라때 지은 노사원은 황성상부(皇城相附)의 주인인 진정경(陳廷敬) 의 조상의 생가이다. 진씨가문이 중도장에 황성상부라는 새로운 거처를 마련하기전에 진씨가문은 이 곳에서 살았던 것이다.

3층에 달하는 목조 간판과 청석을 깔아 만든 계단, 검정색의 문틀과 대들보는 세월의 빗바람속에서 진씨가문의 찬란한 어제와 풍상고초를 말해주는 듯 하다.

도적으로부터 촌민을 보호하기 위해 1640년의 명나라때 지은 방어적인 군사 시설물인 예루는 수백년동안 드팀없이 그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미리 예(豫)자가 방어를 의미하는 미리 예(預)자와 통하기 때문에 예루는 사전에 위험을 방지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수직으로 솟은 예루는 높이가 30m에 달하는 7층 건물이다. 건물의 하단 벽두께는 2m에 달하고 1층은 암실로 돌절구와 맷돌, 우물, 비밀 통로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비밀 통로는 모두 성밖으로 통한다.

예루라는 간판이 걸려 있는 2층에는 포신구멍이 4개 있고 3층부터는 위로 올라가면서 거주시설로 되어 있다. 옥상에는 양쪽에 담을 쌓고 그 위에 지붕을 얹었는데 그 위에 올라가면 멀리까지 다 볼수 있다.

간주

800여년전의 원(元)나라때 지은 탕제묘는 무대건물과 방 아홉칸 너비의 대궐만 남아 있다. 웅장한 규모와 숙연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이 절은 상하 두 뜰로 구성되어 있다.

돌 난간을 따라 돌계단을 오르면 상원(上院)에 이르는데 정면에는 아홉칸 너비에 여섯칸 깊이의 대궐이 당당하게 솟아 있다. 대궐의 동쪽과 서쪽에는 방 세칸을 가진 건물이 마주한다.

하원(下院)의 동쪽과 서쪽에는 2층 건물이 있는데 1층에는 주택이나 객실로 사용되는 방 열개가 있고 넓은 2층은 무대로 사용된다. 건물의 귀퉁이는 창고로 사용되고 문밖에는 종루(鐘樓)와 고루(鼓樓)가 있다. 탕제묘는 곽욕촌의 절로써 마을의 대사는 모두 이 곳에서 결정된다.

양호한 생활환경으로 인해 곽욕촌은 문화적인 분위기가 아주 짙다. 당나라때부터 청나라때에 이르기까지 이 마을에서는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80여명에 달한다.

벼슬길에 오른 이런 사람들이 다시 고향에 돌아와 유교의 예법을 건물과 마을에 접목시키면서 곽욕촌의 건물은 두터운 문화적 함의와 높은 역사적 가치를 가진다.

곽욕촌의 먹거리로는 묵볶음인 초량분(炒凉粉)이다. 부드럽고 고소하면서도 매운 이 묵볶음은 1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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