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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비문서에 기록된 한 조선인
2014-05-06 15:22:24 cri

(길림성 문서보관국에서 공개한 이기수 관련 헌병대문서)

(길림성 문서보관국 문서보관실 일각)

(헌병대 문서에 잔존한 이기수 사진)

(731부대 본부 옛터)

(731부대 동력부 옛터)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 일부의 옛 사진)

 

1941년, 이기수(李基洙)는 체포된 후 하얼빈 일본군헌병대에 "특별이송(特別移送)" 되었다. 그는 지금까지 헌병대의 극비문서에서 심문기록은 물론 사진이 발견된 극소수의 인물이다. 이런 기록과 사진은 이기수가 세상에 남긴 제일 마지막 흔적일지 모른다.

올해 4월, 길림성 문서보관국은 일본이 중국을 침략했던 시기의 증거자료로 관동(關東)헌병대 사령부의 문서 87건 등 도합 89건의 극비문서를 전격 공개했다. 이때 이기수는 조선인이라는 특수한 신분 때문에 다시 수면위에 떠오르게 된 것이다.

"실은 2001년에 이미 이기수의 자료를 발견했습니다." 길림성 문서보관국 도연(陶然) 연구원은 이렇게 문서를 공개한 경과를 밝혔다.

도연 연구원은 문서보관국에서 일본군 731부대 "특별이송인원" 과제와 관련하여 연구가 깊은 관원(館員)이다.

"그때 공개된 문서는 지금처럼 구체적이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이기수가 체포된 후의 심문자료, 신병처리 의견 등 문서가 잘 갖춰져 있습니다."

1945년 8월, 관동헌병대는 자신들의 만행을 덮어 감추기 위해 대량의 문서를 소각했으며 미처 소각하지 못한 문서는 비밀리에 땅에 파묻었다. 이 문서는 그로부터 8년 후인 1953년 관동헌병대 사령부 옛터의 도관매설 시공현장에서 우연하게 발견되었다. 그때 발굴한 문서는 트럭 한 대 분량이나 되었지만 대부분 훼손되어 부동한 정도로 결여된 상태였다. 그 후 공안국과 문서보관국은 오랜 시일동안 이 문서에 대해 계통적인 복구와 정리 작업을 진행했다.

천만다행이라고 할까, 이기수의 문서기록은 상당히 완전하며 이 때문에 그의 불행한 인생의 여정을 대충 그려볼 수 있다.

이 문서는 소화(韶和) 16년(1941) 9월 16일자 연길헌병대 제752호 보고(통보)이다. 문서의 기록에 따르면 연길헌병대 아베 키키치(阿部起吉) 대장이 관동헌병대 하얼빈헌병대에 이 보고(통보)를 보냈다.

그는 세 나라 국적을 소유한 "조선인"이었다

보고(통보)에는 첫 장부터 약간은 특이한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이기수의 국적 기입란에는 나라 이름이 일시에 세 개나 등장한다.

처음에 문서 작성자는 분명히 국명을 "만주국(滿洲國)"이라고 적고 있다. 그런데 왠지 그 위에 줄을 그어 지워버린다. 그리고 다시 옆에 "일본"이라고 기록하며 또 그것도 부족한 듯 괄호를 치고 "조선"이라고 밝히고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뒤의 본적지의 신고란에는 분명히 "조선 함경남도 신흥군 동흥면"이라고 똑똑하게 기록되어 있다.

모름지기 연길헌병대의 보고(통보) 작성자는 국명을 한꺼번에 세 개나 적을 정도로 우왕좌왕 했던 것이다.

문서의 기록에 따르면 이기수는 두살 때 부모를 따라 강을 건너 중국 동북에 이주했다. 1941년 9월, 즉 연길헌병대에 의해 하얼빈에 특별이송 되던 당시 이기수는 28세였다. 이에 따르면 그가 출생한 연대는 1913년경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기수가 출생할 무렵인 1910년 조선은 이미 국권을 상실하고 일제의 식민지로 강제편입 되어있었다.

이기수는 이주한 후 통화현 장백현에서 15살까지 농업에 종사, 그 후 이 현의 대북두리(大北斗里)라는 고장에서 결혼한다. 그의 결혼을 전후한 시기 중국 동북지역은 만주국(滿洲國)의 치하에 놓이게 된다. 만주국은 일본이 동북지역에 세운 괴뢰국가이다. 일본 관동군(關東軍)은 1931년 "9.18사변"을 일으켜 중국 동북을 점령한 후 1932년 "만주국"의 성립을 선언하고 청나라의 폐위된 선통(宣統) 황제 부의(溥儀)를 집정 자리에 앉혔다. 만주국은 1945년 8월 소련군의 참전으로 관동군이 패퇴하면서 무너졌다.

그러고 보면 이기수의 최종 정착지는 만주국이지만 태를 묻은 본적지는 조선이다. 또 그가 동북으로 이주할 때 조선은 이미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되어 있었다. 문서 작성자가 이기수의 국적을 뭐라고 기입해야 할지 딱히 확신이 서지 않은 이유를 비로소 알 것 같다.

그야말로 문서의 행간에는 그 시기 나라를 잃고 이역 땅으로 이민을 했던 조선인들의 고달픈 삶의 주소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기수는 결혼한 후 안해와 부모와 함께 계속 대북두리에서 농사를 지었다. 22살 나던 1935년 이기수는 마침 통화 지역을 경유하던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을 만난다. 이 제2방면군은 주로 조선인으로 구성된 부대였으며 그 지휘관은 바로 세간에 명성이 자자한 김일성이었다. 연길헌병대의 문서 역시 이를 의식한 듯 제2방면군이라는 이름 뒤에 괄호를 치고 "김일성비적단"이라고 특별히 주해를 달고 있다.

이때 이기수는 제2방면군 참모장 임우성(林宇城)을 만나 그의 인도를 받으며 뒤미처 이 조선인부대에 입대한다.

그는 소련 이름을 가진 "간첩"이었다

이기수는 입대한 후 장백(長白), 몽강(濛江), 안도(安圖), 화전(樺甸), 돈화(敦化) 등 지역을 주름 잡으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연길헌병대는 이 시기의 전투를 비적단(항일연군)이 (일본)토벌대의 토벌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기수는 1940년 7월 연대의 정치지도원 한택수(韓澤洙) 이하 11명과 함께 훈춘현(琿春縣) 청룡암(靑龍岩)으로 갔다. 이듬해 7월 20일 23시 30분, 이기수는 훈춘 춘화촌(春化村) 태마구(抬馬溝)에서 연길헌병대 파견대에 체포되며 이어 훈춘분대(琿春分隊)로 이송되었다.

이때 문서에 기록된 이기수의 신분은 "소련 간첩"이며 공작명은 "미츠치엔이"라는 소련이름이다.

실제로 이기수가 부대원들과 함께 훈춘 청룡암으로 이동하기 전인 1940년 초, 동북의 항일투쟁은 제일 어려운 시기에 맞닥뜨리고 있었다. 일제는 동북항일연군을 상대로 잔혹한 토벌을 시작했으며 동북항일연군은 초기의 10만여 명으로부터 불과 3천여 명으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동북항일연군은 부득불 전략적 이동을 진행하며 일부 부대가 여전히 현지에 남아 전투를 견지하고 대부분의 부대는 육속 소련 원동지역으로 철수한다.

이기수가 일본군에 체포된 시기나 소련 이름으로 미뤄 볼 때 그는 원동지역에 철수한 후 소련 정보부문의 지령을 받고 훈춘지역에 다시 파견되었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솔직히 문서의 기록에 의거하여 이기수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헌병대의 보고(통보)에 따른 신상정보 자체가 아주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또 공개된 문서도 파손 등 원인으로 전부가 아니며 누락 부분이 있다. 이기수가 극비문서에 남긴 4매의 사진만 보더라도 윤곽이 똑똑한 것은 단지 1매의 사진뿐이다.

그러나 잔존한 기록물의 곳곳에서 여전히 이기수를 만나 그의 이모저모를 엿볼 수 있다. "물방울에 우주가 비낀다."는 속담을 새삼스럽게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다른 건 잠시 제쳐놓고서라도 체포된 후의 이기수의 마음가짐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다. 이기수가 사진에서 아주 안온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티끌만치의 두려움도 나타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진짜 이기수의 심문결과는 일본헌병대에게 별로 이상적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연길헌병대 아베 키키치 대장은 문서에 "이자는 원래 공비(共匪)이며 사상적으로 완전히 이용가치가 없다."고 적고 있다. 헌병대는 이기수에게 약 두 달 동안이나 심문과 고문을 자행했지만 그들이 바라던 것을 끝내 얻지 못했던 것 같다.

결국 이기수는 헌병대에 의해 하얼빈으로 "특별이송" 되는 극단의 조치를 받는다. 현재 길림성 문서보관국의 소장품가운데서 이런 "특별이송" 내용의 문서는 약 200점이며 이와 관련된 인물은 277명으로 대부분 중국인이다. 와중에 이기수는 현유의 보관문서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특별이송" 조선인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731부대의 "통나무"였다

이른바 "특별이송"은 일본군 내부에서 사용되던 전문술어이다. 그때 이기수 등 수감자가 "이송"된 곳은 단 하나로 바로 악명이 자자한 731부대이다.

731부대는 일본군의 대표적인 세균전 부대로 1936년부터 1945년까지 하얼빈에 주둔하며 생체해부, 인간냉동, 세균감염, 독가스 실험 등을 자행했다. 인간 생체실험을 하기 위해 731부대는 관동헌병대와 결탁했다. 관동헌병대는 체포한 간첩과 항일전사 등을 심판을 거치지 않고 비밀리에 731부대의 특설감옥에 이송하여 사용하게 했다.

이기수처럼 "특별이송"된 사람들은 731부대 부대원들에게 "마루타(原木)"로 불렸다. "마루타"는 일본말로 "통나무"라는 뜻이다. 인간 아닌 "마루타"로 인식된 생체실험 수용자들은 더는 본래의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으며 숫자로 기록되었다. 731부대의 규칙상 이런 "마루타"는 살아서 절대 731부대의 마굴을 떠날 수 없었다.

731부대는 1945년 8월 철거직전에 실험현장을 대거 파괴하고 관련문서를 파기, 은닉하였다. 그리하여 731부대의 생체실험 대상자가 도대체 얼마 있었는지 지금까지 세간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

"제가 731부대에서 복역했던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최소 3천여 명이 여러 가지 생체실험 대상자로 되어 살해되었습니다." 731부대 가와시마 기요시(川島淸) 전 생산부장이 예전에 소련 백력(伯力) 국제군사법정에 출두하여 기술한 내용이다.

오늘날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최종적으로 신원이 확인된 731부대 생체실험 대상자는 1467명에 달한다. 이 희생자들의 이름은 그제 날 그들이 특설감옥으로 이송할 때 통과하던 731부대 본부 건물의 중심복도 "순난자 명부"에 전시되어있다.

와중에 지금까지 밝혀진 "특별이송" 조선인은 이기수를 제외하고 다섯 명이 더 있다. 이들의 이름은 아래와 같다.

한성진(韓成鎭, 조선 함경북도 경성 출생, 1943년 6월 25일 체포)

김성서(金聖瑞, 조선 함경북도 길주면 출생, 1943년 7월 31일 체포)

고창률(高昌律, 조선 강원도 회양군 난곡면 출생, 1943년 7월 25일 체포)

이청천(李淸泉, 1944년 체포)

심득룡(沈得龍, 1943년 10월 1일 체포)

지금까지 발견, 정리된 "특별이송" 문서에 따르면 상기 조선인들은 모두 항일 혹은 반파쇼 운동을 하다가 체포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 가운데서 이기수 등 2명은 "특별이송" 문서에서 드물게 사진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럴지라도 이기수가 731부대에 "특별이송" 된 후 구경 어떤 형식의 생체실험을 당했으며 또 언제 어떻게 숨졌는가 하는 것은 혹여 영원한 미스터리가 될 수 있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여름날이지만 731부대의 유적지에는 여전히 음침한 한기가 떠돌고 있는 듯하다. 어디선가 맴돌고 있는 희생자들의 울부짖음이 시공간의 터널을 지나 계속 찌릿찌릿한 공포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글/김 호 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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