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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3년 3월 18일 유로장(劉老庄)전투
2015-03-18 10:10:37 cri

오늘은 3월 18일입니다. 1943년의 오늘, 신4군 제3사단 제7여단 제19연대 제2대대 4중대 관병들이 강소 회음(淮陰)유로장(劉老庄)에서 일본군과 용감하게 싸우다 전부 순국했습니다.

"섬서(陝西)에서 소북(蘇北)까지 적후 명성이 팔로군에 전해지고 새벽부터 밤까지 전 중대 관병들이 처절한 싸움 끝에 유로장에서 순국했네". 이는 당시 소환(蘇晥)변경지역 정부 주석 이일맹(李一氓)이 쓴 제사입니다. 현재 유로장 82열사릉원 대문 양측에 세겨져 있는 이 글귀는 유로장전투에 대한 기념으로 될 뿐만 아니라 4중대 전체 용사들에 대한 진지한 추모로 됩니다.

1943년 2월, 일본군은 대량의 병력을 동원해 염부(鹽阜)지역에 대한 대규모 "소탕"을 진행했습니다. 번마다 허탕치고 철수할 때 또 신4군의 타격을 입은 일본군은 1943년 3월 재차 소탕을 감행했습니다.

3월 16일, 일본군 제17사단과 괴로군의 총 1천여명이 여러 길로 나뉘어 연수현(漣水縣) 서북 육당하(六塘河) 북쪽기슭의 신4군 회해구(淮海區) 당정지도기관을 포위 습격했습니다. 신4군 제3사단 제7여단 제19연대 1부는 적군에 용감히 맞서 싸우면서 회해구 당정기관의 이전을 엄호했습니다. 3월 18일 새벽, 일본괴뢰군 천여명이 유피진(劉皮鎭)과 유로장 부근까지 추격해왔습니다. 제19연대 2대대 4중대 병사들은 유로장에서 일본군의 발목을 잡으면서 지도기관과 주력부대의 이전을 엄호했습니다.

중대장 백사재(白思才), 정치지도원 이운붕(李雲鵬)이 즉시 전 중대를 인솔해 수송선을 따라 일본군의 진공을 차단했습니다. 갑자기 일본군의 일부 기병부대가 서남방향에서 우회 공격을 해왔습니다. 이에 4중대가 적들에게 한바탕 사격을 가해 일본 기병부대를 짓부셨습니다. 일본괴뢰군 대부대가 총소리를 듣고 포위망을 좁혀왔고 4중대 간부와 전사들이 추호의 두려움도 없이 완강하게 저항했습니다.

오전 8시부터 일본괴뢰군이 연속 5차례 진공을 가해왔지만 번마다 4중대 전사들에 의해 격퇴당했습니다. 점심때 일본괴뢰군이 잠시 진공을 멈춘 틈을 타 4중대 관병들은 신속히 전쟁동원회의를 열고 진지를 정비했습니다. 오후 일본괴뢰군이 모든 포탄과 수류탄으로 4중대 진지에 대한 맹렬한 습격을 진행해 수백미터에 달하는 수송선이 거의 평지로 변했습니다. 중대장과 정치지도원 모두 중상을 입었고 전 중대는 20여명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중대장 백사재는 모든 탄알을 한데 모아 사용하고 지도와 문건들을 소각할 것을 지시해 일본괴뢰군과 최후의 격전을 펼칠 준비를 했습니다.

저녁 무렵, 일본군은 재차 진공을 가해왔습니다. 기관총소리와 함께 4중대 간부와 전사들은 다함께 적군을 향해 돌진했습니다. 가열처절한 전투를 펼쳤지만 수적 차이가 현저해 모든 전사들이 장렬히 순국했습니다. 유로장전투에서 4중대 82명의 병사들은 하루내내 일본군 천여명과 피어린 전투를 해 일본괴뢰군 170여명을 살상했고 엄호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성했습니다. 전후 신4군 제3사단은 제4중대를 재건하기고 결정했고 이름을 "유로장 중대"로 명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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