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3-19 09:36:47 | cr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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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3월 19일입니다. 1941년의 오늘, 중국민주정치단체동맹이 중경시에서 정식 설립되었으며 황염배(黃炎培)가 상무위원회 주석직을 담임했습니다.
전국적인 항일전쟁이 폭발한 이후, 국민당 내 왕정위(汪精衛)를 위수로 하는 투항세력들은 "망국론"을 고취하면서 적에게 투항하고 매국하려 획책했습니다. 1938년 11월, 일본과 왕정위측 대표가 상해에서 정식 협상을 가지고 왕정위 집단이 국민정부에서 탈리해 따로 괴뢰정권을 세우며 "평화운동" 을 추진하는 등 문제와 관련해 협의를 달성했습니다. 같은 해 12월 29일, 왕정위는 국민당 중앙에 보내는 "평화건의" 전문(일명 "염전<艶電>")을 발표해 "평화를 되찾기 위해 일본정부와 진심을 나눌 것"을 국민정부에 요구했습니다. 이에 대해 국민 참정회의 참정원을 담당한 장란(張瀾), 황염배 등은 1939년 1월에 "왕정위를 성토하는 전문(討汪通電)"을 발표했습니다. 전문은 "왕조명(汪兆銘)의 염전은 일본 총리 고노에의 성명을 곡해해 그 건의를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는데 우리는 이를 절대 반대한다 "고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1939년 10월 13일, 국민 참정회의 부분적인 무당파와 중간파 참정원인 장란, 황염배, 심균유(沈均儒), 라융기(羅隆基), 장백균(章伯鈞) 등은 중경에서 통일건국동지회를 결성했습니다.
1941년 환남(晥南)사변 후 국민당 완고파는 중국공산당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는 한편 민주당파와 애국인사에 대한 박해를 가속화했습니다. 이는 항일을 견지하는 민주당파와 민주인사들의 불만을 자아냈습니다. 3월 19일, 장란, 황염배, 심균유, 라융기, 장백균 등은 "동일건국동지회"를 기반으로 중경에서 비밀리에 중국민주정치단체동맹을 설립했으며 황염배가 중앙상무위원회 주석직을 맡았습니다. 얼마후 황염배가 사직하고 장란이 주석직을 맡았습니다. 중국민주정치단체동맹은 설립 후 량수명(梁漱溟)을 홍콩에 파견해 신문을 창간하도록 했습니다. 이 결정은 주은래와 중국공산당조직의 한결같은 지지를 받았습니다.
5월 20일, 량수명은 홍콩에 도착한 후 홍콩 주재 팔로군 판사처와 구국회 해외조직의 도움을 받아 신문출판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9월 18일, 중국민주정치단체동맹의 기관지인 "광명보"가 홍콩에서 정식 출판되었습니다. 10월 10일 광명보는 "공고"를 발표해 중국민주정치단체동맹이 중경에서 설립되었음을 선언하고 중국민주정치단체동맹의 정치주장과 투쟁목표를 전국 인민에게 공개했습니다. 중국공산당은 중국민주정치단체동맹의 설립에 열정적인 지지를 표시했습니다. 10월 28일, "해방일보"는 중국민주정치단체동맹의 선언과 정치주장을 열정적으로 지지한다는 사설을 실었습니다.
중국민주정치단체동맹은 설립 후 항일전쟁과 민주, 단결의 기치를 높이 들고 중국공산당과 긴밀히 협력해 국민당통치구역의 민주운동에 대해 추동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공고히 하고 발전시켜 항일전쟁의 최후 승리를 쟁취하는데 적극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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