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3-26 13:14:35 | cr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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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3월 26일입니다. 1932년의 오늘, 영국과 미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5개국 대표로 구성된 국제연맹조사단이 중국대표 고유균(顧維鈞)의 수행하에 남경(南京)에 도착했습니다.
1931년 9월 18일, 일본제국주의가 공공연히 9.18사변을 발동했습니다. 1931년 9월 21일, 국제연맹 주재 중국대표 시조기(施肇基)가 국제연맹이사회에 일본이 중국영토를 침략했다고 고소하고 국제연맹이사회가 효과적인 방법을 취해 "일본에 제재를 가할 것"을 청구했습니다.
9월말, 국제연맹이사회가 9개 결의를 채택해 일본의 철병을 요구한 내용을 증가했지만 기한을 규정하지 않아 지상공문이 되었습니다.
그후 일본군이 금주(錦州)를 폭격하고 이어 통료(通遼)도로를 차단폭격하고 할빈을 폭격했습니다. 일본군이 중국을 독점하려는 야심이 드러나면서 일본의 침략활동은 중국에서의 기타 열강들의 이익에 심각한 손해를 끼쳤습니다. 이에 따라 국제연맹의 태도도 일부 변화를 보였습니다.
1931년 12월 10일 국제연맹이사회는 국제연맹극동조사단을 파견할데 대한 결의를 만장일치로 통과했습니다. 그 이듬해 1월 국제연맹 중국파견조사단이 설립되었습니다. 이 조사단은 전 영국 인도총독대리 대표 리턴이 단장을 담임해 "리턴조사단"이라고도 불리웠습니다.
1932년 2월 3일 조사단이 유럽에서 출발했고, 2월 29일 일본 도쿄에 도착해 일본천황과 기타 군정요인들을 만났습니다. 조사단은 3월 14일 상해(上海)에 도착해 중국대표 고유균과 합류한후 두주일간 1.28사변의 상황을 조사했습니다. 3월 26일 조사단은 남경에 도착해 장개석(蔣介石), 왕정위(汪精衛) 등과 회담했으며 그후 또 무호 (蕪湖), 구강(九江), 한구(漢口), 제남(濟南), 북평(北平) 등지를 방문했습니다.
4월 21일 리턴조사단이 심양(沈陽)에 도착했을 때 일본침략자는 이미 동북 전역을 완전히 정령하고 장악했으며 또한 조사단 도착 전에 위(僞) "만주국"을 설립하여 기성사실로 조사단의 승인을 받도록 시도했습니다.
리턴조사단은 동북에서 한달반동안 활동하다가 6월 5일 북평으로 돌아갔습니다. 9월 5일 리턴조사단은 중국을 떠났으며 1932년 10월 2일 조사단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보고서는 일본의 중국 동북 독점에 대한 불만에서 출발해 일본의 침략을 폭로하고 규탄했으며 동북은 중국영토의 일부분이라고 인정했습니다. 또한 9.18사변은 일본이 획책한 것이며 위 "만주국"은 일본이 조작한 괴뢰정권이고 일본의 도구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와 함께 보고서는 또한 일본이 "만주는 일본의 생명선"이라고 선동한데 동정을 표시하면서 동북을 원상 회복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보고서는 또한 중국동북문제의 해결 방법은 "국제적 공동관리" 실시이며 "국제협력"을 통해 "동북의 자치"를 실현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국제연맹의 양보와 무원칙 관용의 태도는 일본의 중국동북 침략을 제지시키지 못했으며 아울러 국민당정부가 국제연맹에 의뢰해 일본침략을 제지하려던 기대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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