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4-22 11:22:16 | cr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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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4월 22일입니다. 1943년의 오늘, 일본 침략군은 재차 청하(清河)지역에 대해 연속 "소탕"을 감행했는데 팔로군 청하군구부대는 반격을 가해 반"소탕" 작전을 개시했습니다.
1943년 화북 적후항일근거지(華北敌後抗日根据地) 군민들은 2년간의 간고한 작전을 벌여 일본침략군의 잔혹한 "소탕"과 "잠식"을 분쇄했고 적들의 5차나 되는 "치안강화운동(治安强化运动)"이 실패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이로써 화북 적후항일근거지는 회복과 발전의 새 단계에 진입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침략군은 실패를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1943년 1월 10일 일본군 키타 세이이치(喜多诚一)중장은 7천여명에 달하는 병력을 집중해 소청하(小清河) 이북의 팔로군 청하군구 주둔지인 북수(北隋)일대를 포위했습니다. 일본침략군의 목적은 청하군구부대를 소멸하고 항일근거지를 짓부시려는데 있었습니다. 청하군구기관은 즉시 포대(蒲台), 박흥(博兴) 사이를 경과해 적후로 이동했고 외선부대는 내선부대와 협동작전을 벌였습니다. 이에 큰 타격을 입은 대부분 적군 병력은 진포(津浦)철도연선으로 퇴각했습니다. 새로운 투쟁정세에 적응하기 위해 1943년 3월 팔로군 제115사단과 산동군구 지도기관은 합병해 새로운 산동군구를 설립했습니다. 라영환(罗荣桓)이 산동군구 사령관 겸 정치위원을 담임하고 군구 아래에 로남(鲁南)군구, 로중(鲁中)군구, 청하(清河)군구, 기로변(冀鲁边)군구, 빈해(滨海)군구, 교동(胶东)군구 등 6개 2급 군구를 두었습니다. 팔로군 115사단과 원 산동군구 소속의 여러 여단과 지대(支队) 부대번호를 취소하고 13개 독립연대를 통일 편성해 주력부대의 지방화를 실현했고 통일 영도와 지휘를 강화했습니다.
4월 22일 일본침략군은 독립혼성 5여단, 6여단, 7여단과 괴뢰군 일부를 동원해 2만여명에 달하는 병력으로 재차 청하지구에 대한 대"소탕" 작전을 개시했습니다. 4월 29일까지 일본군은 3차례나 포위작전을 벌였지만 팔로군 청하군부부대에 의해 포위작전이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후 일본군은 청하지구 북쪽의 삼리장(三里庄)을 중심으로 일본 괴뢰군이 황하연안을 장악하도록 군사배치를 했고 남쪽으로는 소청하를 따라 서쪽방향으로 진격하면서 청하군구에 대해 "잠식"해 들어갔습니다. 팔로군 청하군구와 일부 병력은 유격전쟁으로 일본 괴뢰군 "잠식"작전에 대응해 나섰습니다. 또한 직속 연대와 특수대대 병력으로 5월 28일 습격작전을 벌여 삼리장을 탈환했고 괴뢰군 한개 대대 대부분을 섬멸했습니다. 이어 팔로군 청하군구 주력은 리진(利津)이북의 개간지로 이동했으며 7월에 적들이 방어 임무를 교체하는 틈을 타서 수수밭을 이용해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9월까지 괴뢰군 3개 연대를 섬멸하고 적들이 강점했던 중심지역과 소청하 이남 일부 지역을 수복했습니다. 주력부대는 민병과 유격대의 긴밀한 배합 하에 일본 괴뢰군의 대"소탕"을 짓부셔 로중구와 빈해구의 근거지를 확장했습니다. 청화구와 로남구도 적들에 의해 분할된 국면을 타개했고 산동항일근거지 투쟁정세도 뚜렷한 호전을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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