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4-28 10:45:18 | cr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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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4월 28일입니다. 1938년의 오늘, 신사군(新四軍) 선발부대가 강소성 남부인 소남(蘇南) 항일근거지를 개척, 발전시키기 위해 소남으로 진출했습니다.
전국적인 항일전쟁이 발발한 후 국공 양당은 제2차 협력을 진행했습니다. 양당이 달성한 협의에 따라 경애(琼崖) 종대를 제외한 남방 8개 성과 14개 지역의 홍군 유격대는 국민혁명군 육군 신편 제4군단으로 개편되었습니다. 엽정(叶挺)이 군단장을 담임하고 항영(项英)이 부군단장을 담임했으며 군부를 안휘(安徽)성 남부인 환남(皖南)에 설치했습니다. 중공중앙과 모택동의 지휘하에 신사군은 제1, 제2, 제3 지대에서 각기 연대이하의 간부 그리고 각 지대의 정찰중대에서 4백여명을 선출하여 선발대를 구성하고 속유(粟裕)의 인솔하에 소남에 진출하여 전략적인 정찰과업을 수행하게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4월 28일, 선발대는 환남 암사(岩寺)의 잠구(潜口)에서 출발하여 낮과 밤을 이어 선천(宣芜)철도의 일본군 봉쇄선을 넘었습니다. 5월 19일, 선발대는 소남에 들어서서 무장정찰, 일본군 정보 수집을 시작했으며 현지의 사회상황을 조사함으로써 주력부대의 소남진출을 위한 준비를 했습니다.
6월 15일 저녁, 선발대는 용담(龙潭)과 진강(镇江) 사이의 경호(京沪)철도 한 구간을 파괴해 군수물자를 만재한 일본군의 열차 한 대가 궤도를 벗어나게 했으며 경호철도를 여러 시간 중단시켰습니다. 이로하여 일본군은 부득불 병력을 이동하여 운송을 보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선발대는 일본군 지원병이 이튿날 도착한다는 소식을 알게 된 후 매복전을 벌이려고 했습니다. 정찰을 거쳐 속유는 진강의 서쪽에서 30리 떨어진 위강(韦岗) 지역이 매복전을 벌일수 있는 이상적인 전장이라고 판단했습니다. 6월 17일 새벽, 속유가 인솔한 선발대는 도로 양쪽에 매복했습니다. 8시경, 일본군 30여명이 각기 5대의 자동차에 탑승하여 진강 방향으로 다가왔습니다. 일본군은 매복권에 들어서자마자 선발대의 맹렬한 습격을 받았으며 위강 매복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일본군은 황급히 차에서 내려 물웅덩이에 뛰어들지 않으면 차밑에 기어들어갔습니다. 일부는 또 풀숲에 숨어서 완강히 대항했습니다. 신사군은 격전 끝에 일본군 13명을 사살했으며 8명에게 상처를 입히고 자동차 4대를 훼손시켰으며 크고 작은 총 20여자루를 노획했습니다. 선발대는 이렇게 첫 전투에서 첩보를 올렸습니다.
첩보가 신사군 제1지대 진의 사령관에게 전해지자 진의(陈毅) 사령관은 기쁜 나머지 시 한수를 지었습니다.
"활을 당겨 해를 강남에 쏘아 떨어뜨렸네.
장밤 소리쳐 외치니 적들은 간담히 서늘해지네.
진강 성아래에서 처음으로 조우전을 벌이고
적을 베어 승전고를 울렸네."
신사군 선발대가 소남지역에 이른 후 1938년 6월 1일 진의 사령관은 또 신사군 제1지대 주력을 인솔하여 환남남릉(南陵)에서 출동해 소남 적후로 진격했습니다. 6월 8일, 신사군 제1지대는 율수(溧水)의 신교(新桥) 지역에서 선발대와 회합했습니다. 6월부터 8월까지 제1지대는 경호 철도, 경항(京杭) 국도 양쪽에서 근접전과 야간전투에 능한 특장을 살려 일본군과 연속 야간습격, 매복전, 돌연습격 작전을 벌였으며 선후로 크고 작은 수십차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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