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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7년 7월 7일, 노구교사변 발발
2015-07-06 16:50:29 cri

오늘은 7월 7일입니다. 1937년의 오늘, 일본제국주의가 의도적으로 노구교사변을 조작했고 중국군이 극력 저항해 나서면서 전국적인 항일전쟁이 발발했습니다.

노구교는 북평(北平) 부근에 위치해 있습니다. 노구교 사변 전에 북평 천진지역에 중국군과 일본군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일본군측은 북쪽에 관동군 1부가 열하와 찰동에 배치되었고 서북쪽에 관동군이 통제한 위몽골군 약 4만명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한편 중국 주둔(駐屯)군 일본군 5천여명이 북평과 산해관(山海關)를 잇는 철도연선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중국군측은 기찰 두 성과 평진지역에 제29군 약 10만명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일본군 중국 주둔군은 9.18사변을 재현하기 위해 완평성(宛平城) 북쪽 교외에서 완평성 탈취를 목표로 한 군사훈련을 여러차례 진행했습니다. 중국군은 일본군의 군사적 도발에 대비해 작전준비를 진행했습니다.

1937년 7월 7일 밤, 일본군 중국주둔군 제1연대 제3대대 제8중대는 전신무장을 하고 노구교 근처의 중국 수비군 주둔지로 가서 거리낌없이 도발성 군사훈련을 진행했습니다.

이날 밤 22시 40분, 일본군은 노구교 군사훈련에서 병사 한명이 "실종"되었다는 핑계로 중국 수비군 주재지인 완평성에 진입해 수색을 감행하려다 제29군 제37사단 제110여단 제219 연대의 강력한 거부를 당했습니다.

24시경, 북평 주둔 일본 특무기관 기관장인 마쓰이 타쿠로가 중국 기찰당국과 전화통화를 갖고 즉시 완평성에 들어가 수색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중국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얼마후 마쓰이는 또 중국 기찰당국에 전화를 해 중국측이 허용하지 않으면 일본군은 무장 진입해 수색을 강행할 것이며 완평성을 포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중국 기찰당국은 사태의 확대를 막기 위해 일본측과 협상해 인원을 파견해 협동조사하는데 동의했습니다. 교섭과정에 일본측은 실종된 병사가 이미 복귀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완평성 내 중국 주둔군이 서문 밖으로 철퇴할 것을 요구하는 무리한 요구를 제기했고 중국측의 거절을 받았습니다.

7월 8일 새벽 5시경, 일본침략군은 갑자기 완평성을 폭격했습니다. 이에 중국수비군이 분연히 일떠서 저항하면서 전국적인 항일전쟁이 발발했습니다.

노구교사변은 우발사건이나 국부적인 충돌이 아니라 일본 대륙정책의 필연적인 발전이며 계획적이고 준비있는 행동입니다. 일본 파시즘그룹은 중국 정복을 기정목표로 했고 이를 세계 제패의 관건적인 절차로 간주했습니다.

따라서 일본이 발동한 전면적인 중국침략전쟁은 독일, 일본, 이탈리아 파시즘 축이 초보적으로 형성되고 세계 인민들간 모순이 주요모순으로 된 정세에서 중일 양국의 범주를 벗어나 제2차 세계대전의 발단으로 되었습니다.

중화민족이 생사존망하는 결정적인 시기에 국민당과 공산당은 정책을 한층 조절해 신속히 협력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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