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봇나무 껍질에 숨은 70년 전의 비사
2015-08-15 11:24:31 cri

1940년, 홍기하(紅旗河)의 기슭에서 역사에 회자되는 큰 전투가 발생했다. 일본 마에다(前田) 토벌대가 항일부대의 매복습격을 당해 많은 사상자를 내는 것이다. 홍기하는 두만강 상류에 있는 작은 지류이다.

연변박물관 김철수(金哲洙) 전 부관장은 연변지역의 항일투쟁사에 연구가 깊은 사학자다. 그는 홍기하전투는 아주 성공적인 매복전이었다고 힘을 주어 말했다.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은) 일본토벌대가 추격한다는 정보를 얻고 24일 홍기하에 도착합니다. 정보에 따르면 내일쯤 토벌대가 홍기하에 도착할 예정이었습니다. 부분 대원들이 다시 대마록구(大馬鹿溝)로 되돌아가면서 눈 위에 수많은 발자국을 남겼습니다. 유인술이었지요. 주력부대는 반대방향인 화라자(花砬子) 부근으로 산등성이에 올라 매복했습니다."

1940년 3월 25일 새벽, 제2방면군은 대마록구 협곡 북쪽의 고지에 매복한다. 해가 구중천에 걸릴 쯤 마에다 중대장이 인솔한 토벌대가 나타났다. 토벌대는 항일연군 전사들이 일부러 남긴 발자국을 따라 내려오다가 매복권에 들어섰다. 급기야 사격명령이 떨어졌고, 토벌대는 폭우 같은 총탄의 세례(洗禮)를 받았다.

("마에다 중대의 격전 터 비석"/사진:연변박물관 제공)

 

홍기하기슭의 매복전

토벌대의 대장 마에다 중대장은 당장에서 숨졌다. 이때 항일연군은 토벌대 140여명을 사살하고 경기관총 5정과 보총 140여 자루, 권총 18자루, 탄알 만여 발 그리고 무전기 한대를 노획하는 큰 전과를 올린다.

훗날 일본군은 전장에 "마에다 중대의 격전 터"라는 글을 새긴 비석을 세웠다. 비석에 새겨진 비문은 이곳에서 벌어졌던 매복전을 입증하고 있다. 비문에는 이렇게 씌어있다.

"강덕(康德,1934) 7년, 3월 25일 16시, 만주국 간도성 안도현 마록구에서 서쪽으로 약 25km 떨어진 숲 속에서 토벌작전을 수행하다가 갑자기 김일성 부대의 2백 명과 조우하였다. 마에다 중대장 이하 전체 장병들은 적들의 포위공격과 지형의 불리함을 무릅쓰고 몇 시간 동안 용감히 격전을 벌였다. … 마에다는 불행하게도 적탄에 맞아 쓰러졌다."

이에 앞서 1940년 3월 11일, 제2방면군이 대마록구 임산작업소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토벌의 왕자" 로 불리던 마에다가 이 소식을 듣고 작업소를 습격한 항일부대의 추적에 나섰던 것이다. 이때 그는 일본군과 신선대(神仙隊,장백산 일대의 치안숙청을 위해 세워진 친일무장조직) 170여명으로 구성된 화룡현(和龍縣) 토벌대를 이끌고 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매복전에 걸려 홍기하의 "물귀신"으로 된 것이다. 연변대학 민족역사연구소 소장인 김춘선(金春善)교수는 홍기하전투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홍기하전투는 계획적으로 매복해서 일본토벌군을 습격한 사건입니다. 일본의 강한 토벌대를 홍기하에서 매복전으로 순식간에 100여명을 소멸할 수 있었다는 것은 간단한 전투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제2방면군은 하루 전에 벌써 홍기하의 해당 지역에 도착하여 유인전 등을 계획, 진행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로부터, 또 어떻게 토벌대의 행적을 미리 알게 된 것일까?

장장 60여 년 동안 의문으로 남았던 이 비사(秘事)는 엉뚱하게도 홍기하와 동쪽으로 수십 리나 떨어진 팔가자(八家子)의 한 무덤에서 밝혀진다.

2000년 청명절, 룡정시 개산툰진(開山屯)에 살고 있던 김문필(金文弼, 88세) 옹은 화룡시 팔가자진 상남촌(上南村) 1대에 있는 아버지 산소를 찾았다. 비석을 세우지 않아 부근의 무덤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제물을 차리려고 보니 상석(床石)이 떨어져 있었다. 주변에서 방목하던 소가 밟아놓았던 모양이었다. 상석을 바로 잡을 때 갑자기 손끝에 닿는 그 무슨 물건이 있었다.

(60년만에 김철운 열사의 묘지에서 발견된 봇나무껍질 편지/사진:김문필 제공)

 

무덤에서 나온 봇나무 껍질 속의 편지

"한 뼘의 크기였는데요, 봇나무 껍질을 돌돌 말아서 베실로 동여 놓고 있었습니다. 앞뒤를 막고 위에 초를 발라 놓았는데 썩지 않고 그대로 있었지요. 마개를 뜯으니까 종이말림이 떨어졌어요."

종이에는 조선어와 중국어가 섞여 빽빽하게 적혀있었다. 김문필 옹은 돋보기를 몸에 지니지 않았던 탓에 편지 내용을 읽을 수 없었다. 마침 아래쪽에서 일하던 마을 아줌마들을 불러 글을 읽어달라고 청을 들었다.

"김철운의 아들 김문국, 김문학, 김문필에게…"

이 첫 구절을 듣는 순간 김문필 옹은 갑자기 가슴이 쿵쿵 세차게 뛰놀았다. 김철운(金鐵雲)이란 바로 60년 전 작고한 아버지의 성함이었기 때문이다.

"김철운 동무는 민국(民國, 1912~1949) 19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노당원이며 적후 투쟁에서 우리 당 동만항일유격대에 정확한 정보를 제공한 우수한 정보원이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홍기하전투의 대승리는 김철운 동무의 정보와 갈라 놓을 수 없다. 그 외 우리의 전투 성과는 (김철운의) 크고 작은 정보들과 갈라 놓을 수 없다…"

여직까지 몰랐던 아버지의 진실한 신분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김문필 옹은 불덩이처럼 솟구치는 격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는 아줌마들이 자리를 뜨기 바삐 상석 앞에 엎디어 꺼이꺼이 황소울음을 터뜨렸다.

"내 나이 70이 넘도록 아버지가 뭘 하는 사람인지 몰랐는데… 그 편지가 나오니 억이 떡 막혔습니다. 아버지가 이런 중요한 일을 하면서 그 모진 고생을 한 것을 전혀 몰랐지요."

[봇나무껍질에 들어있던 편지 (복사본)앞면/사진:김문필 제공]

[봇나무껍질에 들어있던 편지 (복사본)뒷면/사진:김문필 제공]

 

편지에는 민국 29년 10월 29일, 동북항일연군 제2군 유격대원 류경수(柳京洙)와 강위룡(姜渭龍)이 김철운을 만나러 왔다가 그가 이미 사망했다는 것을 알게 됐고, 비통한 심정으로 글쪽지를 김철운의 무덤에 묻어놓고 간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2000년 5월 29일, 김만석(金萬錫)과 김철수, 이영철(李永哲), 김문필 등 4명으로 무어진 탐사조가 화룡시 팔가자진 상남촌 1대에 위치한 김철운의 묘지에 도착했다. 탐사조 성원이었던 김철수 연변박물관 원 부관장 겸 연구원은 그때의 상황을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현장에 가보니 무덤에 확실히 구멍 난 자리가 있었습니다. 제가 (문물을) 갖고 성(省)에 가서 감정을 하게 됐습니다. 일본 노트에서 종이를 찢어 연필로 쓴 편지였는데 섬유분석을 통해 확실히 지난 세기 30, 40년대에 사용되던 종이로 판단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편지 내용으로 볼 때 서술된 내용들이 일반 백성들이 알 수 없는 내용인 만큼 조작이 어렵다고 판단되었습니다."

최종적으로 해당 부문의 감정을 거쳐 봇나무껍질 속의 편지는 그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2급 문물로 지정됐다. 김철운은 2001년 9월 25일 길림성정부에 의해 항일혁명열사로 추앙되었다.

"누가 편지를 썼나 하면 류경수와 강위룡 두 혁명가가 쓴 것인데요, 우리 아버지의 전우였지요. 이 두 분 다 면목이 있어요."

 

(김철운 열사의 묘지를 찾은 탐사조 성원들.  오른쪽 한가운데 구멍이 봇나무껍질 편지가 나온 곳이다./사진:김문필 제공)

 

 

방문객 키다리 아저씨

김문필 옹의 어린 기억에 류경수와 강위룡은 집에 자주 찾아오던 키다리 아저씨로 남아있었다.

봇나무껍질의 편지에 나오는 류경수와 강위룡은 조선 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림춘추 (1912~1988,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전 부주석)의 회고록 "청년전위"에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 노전사로 밝혀진 인물이다.

"사람의 인연이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참으로 묘한 것 같아요…"

속담에 옷깃을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류경수와 강위룡은 모두 김문필 옹이 한때 지척에서 만났던 인물이다.

조선전쟁 때 김문필 옹은 조선인민군 제105사단에 있었다. 류경수는 바로 이 사단의 사단장이었다.

"내가 부대에서 일을 잘하고 모범군인이었는데 류경수 사단장이 나를 상당히 사랑해 줬습니다. 사단 모범근무자 대회 때 당신 집에 청해 밥을 먹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와 어떤 관계인지를 몰랐지요…"

사실상 류경수도 밥상에 함께 앉았던 이 어린 전사가 바로 그가 한때 애타게 찾았던 전우의 아들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봇나무껍질 편지의 다른 한 주인공인 강위룡도 광복(8.15)이후 연변검찰원 검찰장 직무를 맡는 등 한때 연변 주정부의 요직에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강위룡과 김문필 옹의 인연 역시 어깨를 스치고 지났던 것이다.

(김철운 열사 생전 사진/사진:김문필 제공)

 

"건달"부친이 남긴 60년의 응어리

옛 기억의 편린들은 봇뚝을 터진듯 김문필 옹의 눈 앞에 하나 둘씩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이런 기억의 조각은 퍼즐처럼 나중에 한데 맞춰져 드디어 하나의 완정한 그림을 그렸다.

부친의 정체가 베일을 거두고 참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김문필 옹은 부친의 예사롭지 않았던 행적들이 이제야 비로소 이해가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때 그 당시 부친을 "건달"이라고 얼마나 욕했는지 모른다고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우리가 죽물을 겨우 먹고 사는데 어떤 때는 2-3일을 굶을 때도 있었어요. 아버지는 돈벌이를 나간다고 나가서는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들어오는 법이 없었지요. 몇 달만에 돌아올 때는 늘 빈손이었어요. 집에 와서 멀건 죽물을 마시다가 또 돈 벌러 나간다고 (미장)공구 망태기를 메고 나가면 몇 달이고 돌아오지 않았지요…"

그쯤은 약과였다. 부친은 시도 때도 없이 불쑥 나타난 후 또 가족들을 닥달해서 이사를 강행했다. 그런데 번마다 이삿짐을 푼 지 몇 달 되지 않아 또 다른 곳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정말 난봉을 부리고 돌아다니는 "건달" 행세였다. 팔가자와 개산툰 등 지역을 전전하던 부친은 또 큰 사단을 일으키기도 했다. 1937년, 개산툰 팔프공장에서 일본 십장(什長)을 두들겨 반죽음을 만들었던 것이다.

부친은 청진감옥에 투옥되며 미구에 피투성이의 몸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얼마 후 또 집을 나갔고, 몇 달 후에는 반송장이 되어 홑 담요를 쓴 채 들 것에 들려왔다. 어디선가 하복부에 사발만큼의 큰 상처를 입고 있었다. 꿈틀거리는 창자가 보일 정도로 심했다. 벌건 인두에 지진 상처라고 한다. 결국 그 상처가 탈이 되어 부친은 1940년 6월 유명을 달리했던 것이다.

또 어디에 가서 사단을 일으켰을까… 부친의 "건달" 행적은 풀 수 없는 응어리가 되어 김문필 옹의 어린 기억에 줄곧 어둔 그림자를 드리웠다.

병상에 몸져누운 부친은 거동이 몹시 불편했다. 그래서 그는 어린 김문필에게 자주 심부름을 시켰다. 늘 김문필에게 "부적"을 써주면서 국사당(國師當)의 섬돌 밑에 넣어두라고 일렀다.

어쩌면 부친의 병환을 고치기 위한 "부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국사당은 팔가자 고개를 넘어가는 편벽한 곳에 있었다. 기실 국사당은 어린 김문필에게 귀신이 드나드는 곳처럼 몹시 두려운 존재였다.

 

(김철운 열사의 묘지/사진:김문필 제공)

 

"부적"을 만든 부친

"국사당에 납작 돌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 넣고 오라고 했습니다. 뒤를 돌아보지 말고 와야 된다고, 안 그러면 귀신이 따라 온다고 했습니다. 경찰이 봐도 안 되고 자위단이 봐도 안 된다면서 가만히 사람이 없을 적에 넣으라고 했습니다. 저는 부들부들 떨면서 가서 넣고 돌아서서는 죽어라고 뛰어왔지요. 산을 다 내려오면 온 몸이 땀에 푹 젖었습니다."

훗날에도 어린 김문필은 "부적" 같은 이런 편지를 자주 날랐다고 한다. 아버지가 시킨 대로 "부적"을 받는 사람을 만나면 "팔간 집 아들입니다."라고 통성명했다. 그러면 그들은 김문필을 급히 집안에 불러들이고 "부적"을 확인했다. 그들은 "부적"을 읽은 후 당장에서 소각하고 또 네모꼴로 접은 다른 "부적"을 만들어 부친에게 전하라고 했다. 1년 동안 김문필은 이런 "부적"을 30여차나 날랐다고 회억한다.

사망 몇 달 전, 부친은 김문필에게 함께 "부적"을 나르러 가자고 말했다. 그때 운신조차 어려웠지만 부친은 기어이 본인이 가야 한다고 고집했다고 한다.

"아버지를 소수레에 모시고 소를 끌고 소수레 주인과 같이 내처 걸었지요. 아버지는 병환이 심했는데 소수레에 앉아 갔어요. 상처에서는 피물이 줄줄 흘러 내렸지요. 덜컹거릴 때마다 무척이나 힘들어 했습니다. 걸으면서 저도 울고 아버지도 울었지요. 아버지를 잃을까봐 정말 두려웠습니다."

이때 부친은 여러 곳을 들렸다. 날이 어두워지면 누군가 기다렸다는 듯 부친을 찾아왔고 서로 무슨 얘기인가를 밤늦도록 나눴다. 이때면 김문필은 부친의 분부대로 밖에 나가 망을 보았다.

모름지기 부친은 죽음이 임박하자 그만이 알고 있던 정보망과 정보수집, 전달 등 작업을 인계하지 않았을까…

(김문필 옹이 봇나무껍질속 편지 내용을  읽고 있다. )

 

"우리 아버지는 정말 철저한 혁명가였다고 생각합니다. 집식구가 굶어죽을 지경이 되어도 나가서 혁명사업을 했던 분이지요. 특히 홍기하전투의 정보를 날랐다고 하는데, 아버지에 대한 존경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김문필 옹은 마침내 60년 동안 쌓이고 쌓인 원망과 슬픔, 불평을 단번에 날려 보낼 수 있었다. 부친의 "건달 이야기"는 더는 김문필 옹의 부끄러움이 아닌 가문의 영광으로 되고 있었다.

김철운 열사의 생전 사진과 봇나무껍질 편지 사진은 김문필 옹의 집에 정히 모셔져 있었다. 이 문물의 원본은 연변박물관의 동북항일연군의 몇몇 안 되는 귀중한 소장품으로 되고 있다.

봇나무껍질의 편지는 70년 전 홍기하의 격전지에 숨어있었던 이야기를 그렇게 생생한 실물로 전하고 있었다.

 

(글:중국국제방송국 강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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