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9-23 09:11:57 | cri |
9yue22ri.mp4
|
오늘은 9월 22일입니다. 1941년의 오늘, 일본 침략군이 화북 태악(太岳)근거지에 대해 대대적인 소탕을 개시했습니다. 하여 팔로군 제129사단 등 부대와 국민당 제98군이 이에 반격해 나섰습니다.
1941년 5월 중조산(中條山) 전투 후 국민당 제98군 무사민(武士敏)소속 부대는 태악 남부 심하(沁河) 동쪽의 장자(長子)와 심수(沁水)지역에서 항일투쟁을 계속 견지해 나갔습니다. 팔로군 태악종대(縱隊) 겸 태악군구는 8월초 팔로군 본부의 명령을 받고 제129사단 제386여단 제17,18연대 그리고 결사대 제1여단 제59연대로 태악남진 파견대를 구성해 주희한(周希漢)사령원과 섭진(聂眞)태악구 당위원회서기 겸 정치위원의 인솔하에 임분(臨汾)둔류(屯留)도로 남쪽과 심하 서쪽, 공탄(孔灘), 마벽(馬壁)지역에 진입해 항일근거지를 개척했습니다.
일본군 제1군은 심하 강가의 팔로군을 섬멸하고 국민당 제98군을 항복 또는 섬멸하기 위해 여러 갈래로 나뉘어 새로 개척한 악남(岳南)항일근거지를 소탕하면서 태악 남부의 팔로군과 국민당군을 먼저 섬멸한 후 심원(沁源)지역의 팔로군을 섬멸하려 시도했습니다.
9월 22일 일본군 2만여명이 각기 안택(安澤)과 부산(浮山), 둔류(屯留), 장자(長子) 등지에서 남북으로 공탄과 마벽을 협공했습니다. 팔로군 태악남진파견대는 일본군과의 소모전을 피하기 위해 일부분 병력만 적군들과 접촉하게 한 외 주력부대를 신속히 고평(高平) 서쪽의 동서욕(東西峪)지역으로 이전했습니다. 하여 일본군은 첫번째 진공에서 헛탕을 치고 말았습니다. 29일 일본군은 또 동서욕을 협공했지만 또 한번 헛물을 켜고 남진파견대 소부대와 민병들의 끊임없는 공격을 받았습니다. 이와 동시에 장자와 심수사이에 위치한 국민당 제98군도 일본군에 항복하지 않고 주동적으로 일본군 석철진(石哲鎭)경비대를 공격했습니다.
일본군은 28일 제98군을 포위했습니다. 팔로군의 지원하에 제98군의 일부 장병들이 포위를 뚫고 나왔지만 무사민 사령관은 전투 속에서 불행히 희생했습니다. 10월 3일 반"소탕"은 승리적으로 끝났습니다.
10월 6일 일본 괴뢰군은 또 3만여명을 모아 심원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소탕을 진행했습니다. 태악 항일군민은 사전에 가재나 농작물을 감추어 놓는 등 준비를 마치고 지방무장이 내부 작전을 견지하고 팔로군 주력부대가 외부에서 적들과 싸우는 내부 및 외부가 밀접히 결부하는 전략방식을 취해 적들을 물리치면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습격에 지친 일본 괴뢰군은 18일 부득불 항일근거지에서 철수해 "소탕"을 그만두었습니다.
팔로군 태악지역의 반"소탕"작전은 이처럼 일본 괴뢰군 총 1천400여명을 사살하고 작전의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China Radio International.CRI. All Rights Reserved.
16A Shijingshan Road, Beijing, Chin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