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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창조"를 위한 만리 여행
--길림시조선족기업가협회 조약걸 회장 인터뷰
2015-11-02 15:40:28 cri

길림시조선족기업가협회 조약걸 회장

 

그는 불현듯 하던 이야기를 멈춘다. 어딘가에 귀를 솔깃하고 있었다. 뭔가 잔뜩 긴장하는 그의 기색에 다들 의아함을 감추지 못한다.

"갑자기 웬 일이지?"

이윽고 멀리서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가 차창으로 은은히 날아든다. 실은 그가 남보다 한발 앞서 사이렌 소리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조 어린 '18번 농담'으로 좌중의 어색한 분위기를 날려 보낸다.

"참, 나는 귀가 커서 큰일이라니까…"

기실 그에게는 식은땀이 쫙 돋는 순간이다. 사람들이 붐비고 상가가 밀집한 종합상가빌딩의 제일 큰 두려움은 화재이기 때문이다. 20여년을 두 손으로 일궈낸 이 상가빌딩은 그의 삶의 일부이자 생활의 일부이다. 날마다 퇴근 때면 종합상가빌딩 주위를 한 바퀴 빙 돌아보는 게 그에게는 제일 행복한 순간이라고 한다.

상가빌딩에 미쳤다고 해서 그에게 달린 별호가 '조만리'이다. 정작 그의 이름인 '조약걸'은 이때만은 사람들에게 잊혀져 있는 듯하다.

'만리종합상가빌딩'은 길림시 번화가의 천진대로를 가로 타고 쌍둥이처럼 나란히 서있는 두채의 빌딩이다. 총 부지면적 9만㎡, 연간 매출액 10억원, 연간 납세액 4천만원… "억"소리가 나는 쇼핑센터는 대중소비 시장을 타깃으로 삼아 싸고 질 좋은 상품으로 사람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길림 시내의 브랜드로, 한국 서울의 동대문과 비견하여 일명 "길림시의 동대문"으로 불린다.

언제인가부터 이 종합상가빌딩은 '만리'라는 이름처럼 길림 밖까지 소문을 놓고 있다. 상업계의 '신화'를 일궈낸 조약걸도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며 화제의 인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사실상 조약걸의 '신화'는 어린 시절의 트랙 위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2014세계한인회장대회에서 한국 박근혜 대통령과 기념촬영

 

달리기 경기에서 "꼴찌"를 한 소년

어린 소년은 트랙에서 또래들과 함께 달리기 경주를 즐겼다. 뒤로 휙휙 물러가는 사람과 경물 그리고 홀로 먼저 트랙의 종착 지점을 밟을 때의 흥분은 그 무엇과도 비할수 없는 짜릿함을 선사했다. 달리기 경주는 번마다 소년에게 성공의 달콤한 맛을 만끽할수 있는 "마력의 세계"를 열어주었다.

마냥 1등의 희열을 즐기고 싶었던 소년은 뜻하지 않던 '좌절'을 당한다. 또래 형들과 힘 겨루기를 하다가 다리가 부러졌던 것. 반년을 집에서 휴양하다가 귀교했는데 마침 달리기 경주가 있었다. "물을 만난 고기"라면 그렇게 기뻤을까, 소년은 선참으로 신청하고 트랙에 섰다. 그러나 이번에는 1등이 아니라 '꼴찌'였다. 금방 나은 다리가 마음처럼 달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운동장이 떠나가라 울었지요."

조약걸의 회억에는 눈물 범벅이 되었던 개구쟁이 소년의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어린 소년은 경기에서 져도 울고 학급장을 못해도 울었다. 아무튼 꼭 1등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쇠고집의 성격이었다.

그래서 학교 다니는 내내 성적이 월등히 좋았고 또 대학에 쉽게 입학할 수 있었다. 대학졸업 후 조약걸은 길림시 정부의 공무원으로 자리 잡으면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순탄한 '인생여정'을 시작한다.

그러나 조약걸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만족하지 않고 특별한 '일탈'을 꿈꾸고 있었다. 옛 기억에 1등만 추구하던 소년의 모습이 봄날의 따가운 햇살로 내려앉고 있었다.

드디어 조약걸에게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가 서른 살 즈음하던 때였다. 그는 길림성 건설청 시찰조의 일행으로 개혁과 개방의 전초지인 훈춘시를 방문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훈춘시를 항구도시로 건설할 데 대한 포럼이 있었는데, 젊은 나이에 일 잘하기로 소문났던 그는 길림성 훈춘시찰조의 일원으로 참석할 수 있었다.

전국의 엘리트들이 한 자리에 모여 열변을 토했다. 그 마당에서 조약걸은 흥분을 떠나 전율 자체를 느꼈다. 엘리트들의 앞선 생각과 구상에 머리가 막 먹먹했다. 그들은 경주 트랙에서 벌써 멀리 앞서 달리고 있었다.

"아, 바로 이거구나!"

조약걸은 마침내 자기가 서야 하고 달려야 할 트랙을 찾은 듯 홀가분한 심정이었다. 그는 훈춘에서 돌아오자 바람으로 부서에 사직서를 낸다. 말이 사직서이지 그의 '만리 여행'을 시작하는 신청서이자 도전장이었다.

'만리 여행'은 종자돈 200만원을 갖고 시작했다. 솔직히 지금도 200만원은 서민들에게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하물며 지난 세기 90년대에 일개 말단 공무원이 이 거액의 돈을 어떻게 벌어들인 것일까?…

기막힌 일화가 있다. 그 당시 중국은 한창 도시화 붐이 일면서 부동산시장이 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경제학 전공자인 조약걸은 또 건설부문에서 근무하면서 공정건설과 부동산개발, 재무 등 업무에 모두 정통했다. 그는 정책적 우세를 빌어 건축설계도 한장으로 아파트를 예매했던 것이다.

"성공과 실패는 종이 한 장의 차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고 보면 조약걸은 "종이 한 장이 200만원"이라는 '신화' 같은 이야기를 만든 것이다. 부동산 산업이 고속성장하던 그때 그 시절의 흐름을 제때에 읽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길림시 천진대로를 사이에 둔 만리종합상가

 

길림시 상업중심에 일떠선 "만리빌딩"

그때 그 시절 부동산 산업은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었다. 와중에 상업빌딩의 투자는 아파트 단지에 비해 이윤이 한두 배가 아닌 몇십 배나 남는 사업이었다. 종국적인 목표를 확정했지만, 길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정부 부문에서 내주는 부지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해당 관원이 이런저런 핑계로 도장을 찍어주지 않았다.

"30대의 새파란 젊은이가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고 여긴 거지요."

이때 조약걸의 남다른 끈기가 다시 한 번 빛을 발한다. 한번 안 되면 두 번, 두 번 안 되면 세 번… 관원에게 입이 닳도록 설명을 했다. 어떤 때는 하루 종일 사무실 문밖을 지키고 관원을 기다렸다. 나중에 담당관원은 조약걸에게 두 손을 다 들어주었다.

2001년, 길림시의 번화가에 조약걸의 종합상가빌딩이 일어선다. 이때 조약걸은 또 엉뚱한 일을 벌인다. 원래는 당시의 슈퍼 흥행에 따라 이곳에 대형슈퍼를 운영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돌연히 슈퍼를 접기로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사실상 조약걸은 이에 앞서 광동으로 시장조사를 갔었다. 그는 거기서 상업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는 대형 슈퍼를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왔다. 통상 이 같은 경우라면 누구라도 앞으로 길림시에서 광동처럼 역시 슈퍼가 잘 될 것이라는 판단을 내릴 수 있겠다.

그런데 조약걸은 이미 빌딩에 부설한 쇼핑카트용 에스켈레이터를 계단식 에스컬레이터로 바꾸는 작업을 단행한다.

"슈퍼가 들어서면 서로 가격 경쟁을 하게 되겠지요." 조약걸은 그때 내린 결단의 이유를 이렇게 해석한다.

멀리 앞을 내다보았을 때 슈퍼는 장래성이 있는 목표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구상은 이번에는 '트랙'을 잘못 잡은 듯 했다. 만리종합상가빌딩이 오픈한지 1년 만에 큰 악재를 만난 것이다.

만리종합상가는 업주들에게 세를 주고 그들을 관리, 서비스하는 경영전략을 실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객수가 줄어들면서 운영이 어려웠던 업주들이 하나, 둘 가게를 그만두는 상황이 벌어졌다. 상가빌딩에 바야흐로 파리가 날릴 불황의 조짐이 어두운 그림자처럼 드리우고 있었다.

이때 조약걸은 '만리 여행'중의 중대한 결정을 하게 된다. "일개인 모두가 행복해야 가정의 안정이 있기 때문에 세입자들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자"는 것이었다. 큰 업주와 작은 업주의 관계는 기실 가족과 같다는 것.

만리종합상가는 가게를 1년에 평방당 20원의 임대료로 시장에 내놓았다. 평당 몇십전에 맞먹는 파격적인 가격이었다. 또 세입자가 2000원의 보증금을 내면 가게 하나는 덤으로 더 임대를 받을 수 있었다. 텅텅 비고 있던 상가빌딩에는 금세 세입자가 꽉 찼다. 임대료가 낮으니 상품가격이 낮아졌고 상품가격이 낮아지니 잇따라 고객이 많아졌다. 세입자들의 얼굴에는 마침내 웃음꽃이 피어났다. 가게를 초기 임대가격의 100배로 다른 사람에게 재임대하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훗날 만리쇼핑센터의 가게 임대료는 원 가격보다 70배 인상되었지만, 그때는 이미 호황 흐름에 가세한 업주들은 부담 없이 이 임대료를 받아들였다.

어느새 만리종합상가빌딩은 꿈을 함께 꾸는 사람들과 더불어 2만평, 4만평, 8만평으로 차츰차츰 덩치를 크게 불려갔다.

조약걸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만리종합상가에서 또 남다른 조치를 단행한다. 업주들이라면 임대료만 내야 하는 게 아니라는 것. 이 빌딩에 입주한 업주라면 회사에 구체적인 제안이나 하고 싶은 말을 무기명으로 꼭 써내야 한단다. 이 제안 등과 관련해서는 조약걸이 다니면서 일일이 직접 받아온다.

이 조치는 종합상가빌딩의 운영에 있어서 적시적으로 미흡한 점을 보완하고 업주들의 어려움을 풀어주는 해결통로로 되고 있다.

만리 여행은 서로 손잡고 함께 가는 길

'만리종합상가빌딩'을 제외하고 조약걸은 또 만리부동산개발회사, 약화(跃华)유리공장, 동북아상품무역회사 등 4개 계열사를 만리그룹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경영하고 있다. 이런 기업은 길림시 굴지의 민간기업으로 "길림성 우수민영기업", "길림시 성실신용기업"등 수많은 영예를 받아 안았다.

조약걸의 '만리 여행'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화려한 세계를 열고 있다. 그러나 그의 '만리 여행'은 아직도 시작이라고 한다. "혼자 가면 빨리 가고 함께 가면 멀리 간다."는 말이 있듯 조약걸의 "만리 여행"은 빨리 가는 게 목적이 아니라 끌어주고 다독이며 함께 그리고 멀리 가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이다.

조약걸이 '만리종합상가'처럼 소중히 여기고 있는 또 다른 "분신"이 있으니 바로 길림시조선족기업가협회이다. 현재 100여명 회원을 둔 길림시조선족기업가협회는 항상 길림시 조선족사회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되고 있다.

길림시의 인구는 440만명, 이중 조선족인구는 10만명 미만에 불과하다. 허나 "참새는 작아도 오장육부는 구전하다"고 길림시에는 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알리는 조선족군중예술관이 있는가 하면 민족의 후대를 양성하기 위한 조선족어린이집이 있으며 또 조선족 초등학교와 고등학교가 있고, 조선족이 운영하는 민영병원이 있다.

조선족소학교에 학생전용버스 기증

 

조약걸은 회장으로 길림시조선족기업가협회를 인솔하여 조선족행사들을 후원하고 있으며 사회공익자선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협회 기업인들의 앞장에 서서 누계로 인민폐 300여만원을 사회 공익사업에 기부했다. 조약걸은 또 길림시조선족기업가협회의 대외협력을 확대하여 베이징, 천진, 심양 등 전국의 조선족기업가협회와 업무제휴관계를 맺고 기업탐방 및 교류를 진행하고 있으며 한국의 경영협회와의 교류를 통해 양호한 무역협력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조약걸은 그동안 국내외 일류의 기업들을 참관하면서 배운 회사경영 경험과 자신의 경영 경험담을 주변 사람들과 즐겨 나누며 특별히 젊은이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어떤 일이든지 자기가 좋아하는 일, 잘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많이 보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배우면서 통찰력을 키워 어려움이 닥쳤을 때 해결방안을 모색해야 합니다."

조약걸의 인생 '만리 여행'의 향후 설계도에는 또 만리호텔, 만리예식장이 있고 만리실버타운이 있다. 조약걸의 말대로 그의 '만리 여행'은 갓 시작을 떼고 있는 것이다.

그의 도전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취재/글 이향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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