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7-14 13:13:48 | cri |
청취자의 벗
(2016년7월13일)
2017-0713-tingzhong.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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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 담당 송휘입니다.
여: 안녕하세요? 아나운서 이명란입니다.
남: 요즘 이 곳 베이징의 최고 낮 기온이 36~37 ℃를 윗돌면서 체감온도는 45℃를 육박하는 것 같습니다. 비록 갑자기 내리는 폭우 날씨로 살짝 주춤하기는 하지만 달아오른 열기를 식히기엔 역부족인 것 같습니다.
여: 그렇습니다. 특히 삼복철에 접어들면 그 더위가 더 심해지는데요, 이 시기는 기온이 높고 대기압이 낮으며 습도가 높고 풍속이 약한 기후 특징이 있는데요. 그래서 중국에는 삼복 더위를 "小暑大暑、上蒸下煮"라고 표현합니다. 문자적인 의미는 소서와 대서 절기에 작열하는 태양아래, 달아오른 땅위에서 찌고 삶는 듯 한 무더위라는 뜻인데요. 그만큼 극심한 더위라는 뜻이겠죠.
남: 우리가 말하는 삼복(三伏)은 중국 진(秦)나라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일년 중 무더위가 가장 기승을 부리는 시기여서 삼복더위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평소 복날, 삼복, 복날음식 등과 같은 낱말들은 자주 들어 보았지만 복날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고 어떻게 유래 되었는 지는 잘 모르고 지냈던 것 같습니다. 한번 알아 볼까요?
여: 네, 복날은 장차 일어나고자 하는 음기가 양기에 눌려 엎드려 있는 날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복(伏)자는 사람이 개처럼 엎드려 있는 형상으로 가을철 금(金)의 기운이 대지로 내려오다가 아직 여름철의 더운 기운이 강렬하기 때문에 일어서지 못하고 엎드려 복종한다[屈伏]는 의미로 여름의 더운 기운이 가을의 서늘한 기운을 제압하여 굴복시켰다는 뜻입니다.
남: 즉 오행에서 여름은 불[火]에 속하고 가을은 쇠[金]에 속하는데 "여름 불기운에 가을의 쇠 기운이 세 번 굴복한다."라는 뜻으로 복종한다는 뜻의 복(伏)자를 써서 삼복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여: 삼복에는 또 복날 음식이 빠질 수 없죠. 중국에는 삼복이 되면 초복에는 만두를 중복에는 면을, 말복에는 달걀 밀 전병을 먹는 풍습이 있잖아요? 이웃나라 조선과 한국에서는 어떤 복날 음식들이 있는지 궁금하네요~
남: 예로부터 복날에는 개장국과 삼계탕을 즐겨 먹었다고 합니다. 특히 복날 한적한 숲속의 냇가로 가서 개를 잡아 개장국을 끓여 먹는 풍속을 복달임, 복놀이라 했으며, 함경도에서는 개 잡는 것을 개놀음이라 불렀다고 하네요. 또 복날 더위를 먹지 않고 질병에 걸리지 않는다 하여 팥죽이나 수박, 참외를 먹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조선에서는 복날 음식으로 단고기장을 으뜸으로 치구요, 한국에서는 아무래도 삼계탕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 한국의 삼계탕은 잘 알겠습니다만 조선의 단고기장은 처음 듣는 같은데요..
남: 네, 개고기를 조선에서 단고기라고 부르는 건 잘 알고 있죠? 단고기장은 바로 개고기국에 된장을 풀어 만든 국이라고 합니다. 함경도 지방에서는 맑은 물로 국을 조리하지만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단고기국에 장을 풀어 만든 요리를 최고로 쳐준다고 합니다.
여: 그렇군요. 올해 삼복에는 초복, 중복, 말복에 중국식의 물만두, 조선식의 단고기장, 한국식의 삼계탕을 골고루 맛봐야 겠네요.
남: 좋은 생각이네요. 아무튼 보양식으로 더운 날씨로 지친 몸을 추스리고 건강한 여름을 나시기 바라면서 오늘 프로 시작하겠습니다.
<편지 왔어요>
여: 여러분이 보내주신 따뜻한 사연으로 만들어가는 <편지 왔어요> 시간입니다.
남: 오늘의 첫 사연은 이명란 아나운서가 소개해 드리 겠습니다. 장춘의 김이분 청취자의 편지 사연입니다.
여: 서산 넘어가는 청춘
"강물은 흘러가지만 구름은 흘러가지만 나 여기에 머물고 싶어 나 여기에 남고 싶어" 라는 노래의 가사와 같이 우리 현대화의 아름다운 조국강산에서 이 좋은 세상에서 누가 가고 싶겠습니까? 하루라도 더 남아서 하루라도 더 머물러서 남은 인생의 황금빛을 더욱 찬란히 빛내고 싶고 우리 후손들의 건강한 성장과 앞으로의 큰 사업을 관심하며 후원을 잘하여 단 하루라도 보람있는 생활을 하고 싶습니다. 남은 황혼의 빛을 더욱 빛내려고 애쓰는 우리 장춘시 남관구 조선족 협회 동지들은 각양각색의 문체활동과 자신의 예능을 발휘하기 위해 노력 하고 있지요. 지난 6월 3일 장춘시 조선족 노래경연대회를 했습니다. 두달동안의 연습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시간과 기회을 가진겁니다. 노래연습 시간이 촉박하지만 선생님들의 지도와 관심에 유쾌하고도 보람있는 생활을 했고 연령은 숫자에 불과하다고 모두 동심으로 돌아가 유쾌하게 노래하면서 웃음과 희열의 꽃이 활짝 피는 청춘다운 그 모습이 얼마나 보기 좋았던지요. 정식 경연이 시작되자 그 큰 무대에서 아름다운 선율에 맞춰 노래하는 나의 심정은 그 어느 때 보다도 흐뭇했고 비록 긴장했지만 나의 최고의 수준을 발휘하는 그 순간은 내가 정말로 78세인가하면서도 마음껏 불렀습니다. 그 순간 나는 얼마나 행복하고 기뻣는지 ...비록 이상적인 성적은 아니지만 나의 인생에서 잊지 못할 추억이었습니다. 그 다음 6월 18일 장춘시 조선족들의 단오명절 기념축제인 장춘시 조선족 전통문화 페스티벌이 장춘시 조선족 중학교에서 펼쳐졌습니다. 그날 전통적인 단체공연인 장고춤과 북춤은 백여명이 참가한 성대한 무대였습니다. 그리고 공전하기, 동이이고 달리기, 제기 뿌리기, 씨름, 줄당기기 등 전통적인 체육종목이 진행되었습니다. 우리 노년협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아주 흥겨웠고 영원한 추억을 남긴 날이었습니다. 그 날의 일들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보냅니다. 끝까지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6월의 퀴즈 답안도 함께 보냅니다. 문제: 오뉴월에 관련된 속담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답: "남의 일은 오뉴월도 손이 시리다." "닭이 새끼가 발을 벗으니 오뉴월인가 여긴다." "동서 시집살이는 오뉴월에도 서리 버친다." "계집이 독한 마음은 오뉴월에 서리 친다." 함께 보내는 분들로는 배영애, 김일룡, 김화순, 구자병, 유한문, 조금실, 박경애, 임강옥, 김화자, 박호국, 백옥희, 최인숙, 최영탁, 2017년 6월 22일 장춘시 남관구 분회 제3소조 김이분 올림
남: 네, 김이분 청취자를 비롯한 남관구 분회의 많은 분들이 아주 뜻 깊은 하루를 보낸 것 같아 듣는 저희가 다 기쁘네요. 매일매일을 여러분처럼 알차고 행복하게 보낸다면 나이가 무슨 대수겠습니까? 중국말에 "活在当下"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지금 살고 있는 현재,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뜻인데요. 여러분 모두 즐거운 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여: 그런가 하면 흘러간 일이긴 하지만 영원히 잊혀지지 않고 마음속에 그래도 남아 있는 사람과 사건, 또는 순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황채선 청취자가 바로 그런 잊지 못할 일을 글로 적어 보내오셨는데요. 함께 만나 보겠습니다.
남: 잊을수 없는 나무 스케이트
나는 길림성 연변 화룡현 두도구 연풍의 한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불행하게도 아버지는 겨우 8살 밖에 안 되는 나와 오빠를 어머니께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셨다.
그러다 보니 나의 학창 생활은 경제상의 곤란은 더 말할 것도 없지만 생각해 보면 좋은 일, 굳은 일, 기쁜 일, 슬픈 일, 잊지 못할 추억들이 많고도 많다.
나는 1953년에 화룡현 두도구 광흥중학교에 입학했다. 처음 산골을 떠난 나에게는 자그마한 두도구도 매우 큰 도시 같았고 넓은 운동장과 길게 줄지어 있는 학교, 아름답게 장식해 놓은 넓고 밝은 교실, 단정하게 옷차림한 선생님들...그 모든 것이 너무나 신기해 보였고 위대해 보였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보니 배우는 과목도 많고 교학 방법도 소학교와 달랐고 체육시간에 육상도 하고 기계체조도 배웠으며 겨울이면 넓은 운동장에 물을 부어 만든 얼름장 위에서 스케이트를 연습해 시험까지 쳤다.
공부가 바빴지만 중학교 시절은 너무나 재미 있었다. 중학교 입학하던 겨울 어느날 나는 동무들과 함께 학교에서 삼각형의 나무 목데기와 스케이트 날을 샀다.
그때 나의 동무들 중 "너는 아버지가 없어 누가 스케이트를 맞추어 주니?" 하면서 관심하는 척 아버지가 없다고 비웃는 동무들도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없어도 큰 아버지가 있다는 생각에 동무들이 비웃어도 아랑곳 하지 않고 큰 아버지를 찾아 갔다.
그때 우리 큰 아버지네 집에는 나와 동갑내기의 언니가 있었는데 공부를 잘하지 못해 겨우 소학교 4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큰 아버지는 공부 잘하는 내가 시샘이 났는지 아니면 다른 볼일이 있어서 그랬는지 내가 목데기와 스케이트 날을 내놓으면서 맞추어 달라고 하니 무서운 눈길로 나를 쳐다보고 성을 내면서 "계집애가 무슨 스케이트를 탄다고.."하면서 나를 꾸지람했고 가마목에 앉아 있던 큰 어머니도 "돈도 없으면서 스케이트는 무슨 스케이트냐~"라며 나무람했다.
천진하고 철없이 아무런 생각도 없던 나는 그래도 큰 아버지라고 태산 같이 믿고 자신만만하게 찾아갔건만 스케이트를 맞추어 주지 않을 망정 욕하고 모욕까지 하니 너무나 뜻 밖의 일이라 놀랍기도 하고 서럽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여 말 한마디 더 하지 못하고 나오는 눈물을 참으면서 목데기와 스케이트 날을 들고 집으로 왔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를 보니 너무나 서러워 그만 말도 못하고 엉엉 목놓아 울었다. 따뜻한 밥을 지어놓고 내가 하교하기 만을 기다리고 있던 어머니는 너무도 놀라 황급히 바닥에 내려와 나의 언 두 손을 잡으면서 어찌된 영문인지 물었다. 하지만 나는 말도 못하고 서럽게 울기만 했다. 자초지종을 들으신 어머니는 그 따뜻한 가슴에 울고 있는 나를 꼭 껴 안아 주셨다. 어머니는 나의 눈물을 닦아주고 머리를 쓰다음어 주며 울음섞인 목소리로 "어린 것이 무슨 죄가 있다고...아버지가 있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턴데..울지마라, 엄마가 앞집 아저씨를 찾아 스케이트를 맞추어 달라고 할테니..너는 그저 공부만 잘하면 된다" 어머니는 서럽게 울고 있는 나를 오래도록 달래 주었다.
그 다음날 앞집 아저씨는 스케이트날을 맞추어 가지고 우리 집에 오셔서 내가 학교에서 돌아 오기만을 기다렸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맞춰 놓은 스케이트를 보고 아저씨에게 인사하는 것도 잊은 채 책보자기를 구들에 팽겨치고 스케이트를 안고 퐁퐁 뛰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내가 너무 좋아하는 모습을 본 아저씨는 "그게 그렇게도 좋니?"라면서 사랑스럽게 나의 어깨를 두드려 주면서 "이제는 울지 말고 스케이트도 잘 타고 공부도 더 잘해서 좋은 학생이 되어라"라고 고무 격려해 주었다.
그때에야 아저씨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예, 꼭 스케이트도 잘 타고 공부도 잘해 아저씨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어머니는 "그래 스케이트도 잘 타고 공부도 잘해야지, 아버지가 없고 돈 없는 것이 죄가 아니니 기죽지 말고 더 힘을 내여 열심히 공부하고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을 도울 줄 아는 착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라고 하시면서 나에게 더 없는 용기와 힘을 실어 주었다.
그 때 큰 오빠는 46년도에 참군하여 47년도에 개원 전투에서 희생되었고 둘째 오빠는 용정 한사(한어사범학교)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가정 형편은 아주 어려웠다. 하지만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자식들을 공부시키겠다는 소망을 가진 어머님의 따뜻한 사랑과 그의 견강하고 부지런한 모습, 항상 그 어떤 고난속에서도 기죽지 말고 극복하고 노력해 성공하라던 어머님의 소중한 당부의 말씀은 나에게 큰 용기와 힘으로 되어 여름 방학이면 산에 가 도라지를 캐고 겨울 방학이면 어머니와 같이 새끼도 꼬고 가마니도 짜면서 학비와 책값, 식비를 마련하며 열심히 공부해 대학을 졸업하고 당당한 의사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나의 인생은 평탄치만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어떠한 곤난과 불행속에서도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을 깊이 새기고 나의 인생길을 개척해 지금의 건강하고 행복한 생활을 일구어 냈다.
내가 말하는 목데기 스케이트는 보지도 못하고 들어도 보지 못한 분들이 많으리라 생각된다. 목데기 스케이트는 삼각형 나무의 각진 부분에 스케이트 날을 맞추고 넓은 양면에 꼬리를 단 끈을 끼어 신는 것이다.
말만 들어도 너무나 우습고 원시적인 것 같다. 그러나 해방직후 생활이 가난 할때는 전교에서 스케이트 선수들이나 구두 스케이트를 신었지 대부분 학생들은 목데기 스케이트를 신었기때문에 그때 아이들에게는 아주 귀중한 물건이었다.
80고개에 들어선 오늘에도 종종 목데기 스케이트가 생각나고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 나면서 저 세상에 가신 어머니와 앞집 아저씨가 그립고 보고 싶다.
길림성 장춘시 관성구 조선족 노인협회 황채선 2017.5.23
여: 네, <나의 나무 스케이트>,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였습니다. 어린시절 역경을 이겨내고 어엿한 의사로 성장을 했고 지금은 그 눈물나는 지난 날을 옛말 삼아 이야기하고 또 그때 의지가 되고 도움을 주었던 사람을 그리는 황채선 청취자에게 참 잘 살아 오셨다고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남: 그렇습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이 꼭 황채선 청취자를 두고 한 말인 것 같습니다. 평탄치 않은 인생을 인내와 용기로 살아온 황채선 청취자 만년에 행복이 넘치기를 바라면서 노래 한곡 보내 드리겠습니다. 한국의 김병석 가수가 부른 <고향>을 들으시면서 조금이나마 고향과 보고싶은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시기 바랍니다.
<고향>-김병석
남: 한국가요 <고향>을 듣고 왔습니다. 그럼 계속해서 장춘의 이종광 청취자의 편지 사연을 만나보겠습니다.
여: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 앞:
송휘, 이명란 아나운서 무더운 여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비교적 독특한 내용의 편지를 보내려고 합니다.
즉 장춘에서 설립된 조선족 경주 김씨 동친회에 대해 써보려고 합니다. 북경에서도 경주 김씨 동친회를 설립했다고 들었는데 만약 동친회가 있다면 우리 장춘 경주 김씨들이 축하의 인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장춘 경주 김씨 동친회는 조직된지 9년이 넘었으며 참가인원수는 초기의 20여명으로 부터 지금은 70여명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동친회에 참가한 사람은 경주 김씨 외에 사위와 며느리도 참가할 수 있습니다. 장춘에서 조직된 동친회와 한국에 있는 동친회는 구별이 있습니다. 한국에 있는 동친회는 친속 관계가 명확합니다. 집집마다 가족의 족보가 있어 항렬을 따라 이름도 짓기 때문에 절대 친속 관계가 변할수 없습니다. 장춘의 경주 김씨들은 대부분 족보가 없으며 이름도 항렬을 따라 지은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지었기 때문에 진정 누가 할아버지 벌이며 조카 벌인지 분별할 근거가 없습니다. 다만 경주 김씨의 자손들이라는 것은 확고하므로 나이가 많은 사람을 보고 형님, 언니라 부르고 나이차가 아주 클 때는 삼촌, 고모, 조카 등으로 부릅니다. 이렇게 부르는 것이 오히려 더 친절하고 어색하지 않아서 서로가 대하기 쉽고 편안하다고 느껴집니다.
나는 경주 김씨네 사위로 경주 김씨 동친회에 참가하였고 원래 친척이 적어서 외롭던 중에 아내 덕분에 경주 김씨 동친회에 들어가서 활동하게 되니 위안이 되고 즐겁습니다. 동친회는 아무런 조직적인 수속도 없고 신청서를 제출할 필요도 없으며 아무런 정치관념도 없습니다. 다만 친족관계로 무어진 민간단체일 뿐입니다. 그리고 동친회 활동의 모든 경비는 자체로 해결하기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 조선족은 같은 성씨 같은 본관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그 어디서 든지 아주 빨리 친해지고 친족의 정을 나누려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장춘 경주 김씨 동친회는 설립이래 1년에 두번씩 행사를 조직합니다. 한번은 봄놀이이고 다른 한번은 연말 모임입니다. 지난 9년의 행사는 이루다 소개해 드릴수 없지만 금년에 있은 행사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지난 5월21일은 장춘 국제마라톤이 열리던 날이였고 바로 이날 경주 김씨들은 봄놀이를 떠났습니다. 경주 김씨들은 국제마라톤경기의 번잡한 행사 현장을 피하기 위해 아침 6시에 집합해 6시 반에 시가지를 떠나 쌍양구 생태촌으로 달리는 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쌍양구는 원래 쌍양현으로 위만주국 시대부터 오늘까지 조선족이 비교적 많이 살고 있는 곳입니다. 이곳의 땅은 비옥하고 수자원이 풍부하여 조선족 농민들의 이상적인 터전입니다. 조선에서 쪽박차고 온 농민들은 이곳에 모여 수 많은 조선족 마을을 이루고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이전에 농업이 위주였던 쌍양구는 개혁개방이후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지금은 석유도 생산되고 금도 캐어내며 또 아름다운 쌍양의 경치는 수 많은 여행객들을 흡인하고 있습니다. 우리 일행은 오전 9시경에 생태촌에 도착했는데 그 아름다움은 우리를 경탄케 했습니다. 도로 북쪽에는 과수나무와 아카시아 나무가 우거져 있고 더 북쪽으로 들어가면 소나무 숲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도로 남쪽에는 넓고도 긴 호수가 있었으며 바람은 파도를 일구어 흰 물결에 꽃을 피웠습니다. 호수 댐 밑으로는 일망무제한 논밭이 있었고 농민들은 모내기에 바빴습니다. 호수 물위로 날아 예는 들오리 떼의 울음소리와 호수 옆에서 사육하는 새하얀 거위떼의 울음소리는 기묘한 대합창으로 우리들의 귀와 눈을 즐겁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1시간 동안 미나리를 캤습니다. 11시에 우리는 생태원의 넓은 식당에 모여서 6개 팀으로 나누어 눈 가리고 사람 얼굴 그리기 게임을 놀았습니다. 눈가리고 그리는 그림이라 그 위치가 정확할리 없었습니다. 이 해괴망측한 그름은 우리를 배를 끌어 안고 오랫동안 웃게 했습니다.
이어서 오찬이 시작되었습니다. 요리의 재료는 모두 생태 농장에서 기르고 재배한 것이였습니다. 물고기는 모두 호수에서 금방 잡아 낸 것들이였습니다. 이러한 생태 음식은 시내에서는 보기 힘든 진수성찬이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맛나는 음식에 술 까지 마시고 나니 기분이 더 없이 좋았고 술량도 는 것 같았습니다. 건강을 위하여 오래오래 살기를 위하여 동친회의 번영 발전을 위하여를 높이 외치며 잔을 부딛치고 건배를 하였습니다. 식사후에는 오락시간이 펼쳐졌습니다. 경주 김씨네는 재간둥이들이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노래하면 가수 같은 목청, 춤을 추면 무용수 같은 춤동작, 거의 절반 이상이 이런 사람들이니 정말 기분 좋게 놀수 있었습니다. 이번 동친회 행사는 우리들에게 보람과 기쁨을 주었습니다. 내가 살아있는 둥안 경주 김씨네 동친회가 몇번이나 더 있을지는 몰라도 꼭 참가하여 기쁨을 함께 누리려고 합니다.
장춘시 애청애독자클럽 경제개발구 분회 이종광 올림
남: 장춘시 조선족 경주 김씨 동친회의 상황과 일년에 한번 조직되는 봄놀이 행사에 대해 적어 주신 이종광 청취자의 사연이였습니다. 처음에는 종친회가 아니라 동친회라고 해서 잘 못된게 아닌가 싶었는데 쭉 듣고 보니 경주 김씨네 사위와 며느리까지 동참하는 모임이네요.
여: 이종광 청취자의 말씀처럼 지난날 두만강을 건너 척박한 땅을 개간하며 그 고달프고 힘겨운 생활을 하던 조선인들이 이런 혈연 관계로 맺어진 동친회, 동향인들의 모임을 통해 서로를 위로하고 달래주던 풍습이 지금까지 잘 전해져 내려온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인지 읽으면서 애잔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남: 경주 김씨는 신라의 김알지(金閼智)를 시조로 하는 성씨인데요, 삼국사기에 의하면 김알지는 65년 경주 계림에서 소나무에 걸려 있던 금괘에서 나왔다고 하여 탈해왕이 김(金)이라고 성씨를 지어 주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조선시대에 6명의 정승과 3명의 왕비를 배출하였으며 2000년 인구조사에서 54만 여 가구에 173만 여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집계 되었습니다. 아무쪼록 장춘시 조선족 경주 김씨 동친회가 앞으로도 화합과 친목을 돈독히 하며 발전 장대하기를 기원합니다.
여: 네, 그럼 한국의 현인이 부른 노래 <신라의 밤>을 듣고 퀴즈한마당코너로 이어가겠습니다.
브릿지-<퀴즈한마당>
[퀴즈한마당]
남: '퀴즈한마당' 코너에서는 매달에 한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지식경연과는 달리 방송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던 내용들입니다. 여러분이 직접 정답을 찾아나서야 된다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여: 7월의 퀴즈를 내어 드리기 전에 먼저 6월의 퀴즈 답안을 적어 보내신 장춘의 김금자 청취자의 퀴즈답안 함께 만나 보겠습니다.
남: 편집 선생님들 안녕하십니까? 우리 장춘에서는 우리의 전통명절인 단오절을 6월 18일 중소학교, 각 노인협회에서 참가해 성대하게 축제를 했고 앞으로 다가올 7월 1일과 우리 남관구 28주년 기념일을 함께 경축하기로 하였습니다. 달마다 다채로운 활동이 있어서 아주 기쁩니다. 퀴즈 답안 문: 오뉴월에 관련된 속담은 어떤것들이 있을까요? 답: 남의 일은 오유월에도 손이 시리다. /닭의 새끼가 발을 벗으니 오뉴월인가 여긴다./ 동서 시집살이는 오뉴월에도 서리 뻗친다./ 계집의 독한 마음은 오뉴월에 서리 친다/ 입니다. 함께 보낸 분들로는 박영희, 강종호, 최화자, 송영옥, 김선희, 전금숙, 장덕영, 김경복, 신재봉, 김금자 입니다.
2017년 6월 19일 김금자 올림
여: 네, 그리고 연변의 박철원 청취자가 7월 퀴즈 답안을 보내오셨는데요. 아마 7월의 퀴즈가 나가고 제일 처음으로 답안을 보내오신 것 같습니다. 지금 만나 보겠습니다.
7월1일은 중국공산당 창건 기념일이라 붉은 7월로만 생각하였지 중국국제방송 조선어방송의 개시 기념일이 있는 점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요. 퀴즈 문제가 나와 찾아보니 바로 1950년7월2일에 개시되였군요.
마침 어제 애청자모임이 있어 이 문제를 내놓으니 어떤 분들은 1950년이라하고 1941년, 1945년이라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개시일을 기억한 분은 없었습니다.
퀴즈 풀이를 통해 중국국제방송 조선어방송 개시기념일을 똑똑히 알게 되였습니다.
우리 방송의 자랑찬 역사를 축하하고 무궁한 미래를 축원하면서 변함없이 애청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연변애청자 김봉숙, 김봉선, 김연옥, 김명자, 김순옥, 김희숙, 김화순, 김련옥, 최금자, 박계옥, 리해숙, 리영자, 김순애, 박금숙, 태봉선, 김정자, 안봉숙, 김순숙, 정운봉, 최해원, 박일룡, 박상국, 박철원, 훈춘시의 정창선, 채화순입니다. 2017.7.11
남: 네, 우리 방송의 자랑찬 역사를 축하하고 무궁한 미래를 축원하면서 변함없이 애청할 것을 약속 드린다고 해 주신 박철원 청취자와 연변애청자협회의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도 더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여러분들의 사랑에 보답하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보내온 답안은 정답입을 알려드립니다.
여: 네, 그럼 7월의 퀴즈 내어 드리겠습니다. 7월의 퀴즈는 "올해로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방송은 방송개시 몇 주년을 맞았을까요?" 입니다.
남: "올해로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방송은 방송개시 몇 주년을 맞았을까요?" 7월의 퀴즈 내어드렸습니다.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여: 편지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면 되구요, 우편 번호는 100040번입니다.
남: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여: 네, 앞으로도 꾸준히 퀴즈 풀이에 참여하시기 바라면서 오늘 방송은 여기까지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프로 편성에 송 휘, 진행에 이명란, 송휘였습니다.
남: 함께 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저희는 다음 주 같은 시간에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여러분~
남녀: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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