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26 11:17:22 | cri |
【한국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심경호 교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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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운서] 유규한 역사속에서 중한 양국은 정치와 경제무역, 문화를 비롯한 여러 영역에서 교류와 협력을 해 왔습니다. 그 속에는 학문적인 교류도 빼놓을수 없는데요. 특히 청나라의 학자 완원과 조선후기의 학자 김정희에 대한 이야기를 그 예로 들수 있습니다. 오늘의 <문화동향>에서는 송휘 기자와 함께 중국 양주의 완원가묘를 찾은 한국고려대학교 심경호 교수의 인터뷰를 통해 자세한 상황을 알아 보겠습니다.
(사진설명: 완원像)
[송휘 기자] 얼마전 저는 취재차 강남의 대표적인 도시로 불리는 양주의 완원가묘(阮元家廟)를 찾았습니다. 완원(阮元)은 청(淸)나라 시기의 대신(大臣)이자 학자, 사상가이며 자가 백원(伯元), 호는 운대(云臺)로 건륭(乾隆) 54년에 진사(進士)로 진급해 청나라 중후기 건륭제, 가경제, 도광제에 이르는 3대 원로이며 경학, 사학, 금석학 등 여러 영역의 대학자로서 일대 문종(一代文宗)으로 불리 웁니다.
(사진설명: 좌1 완원의 6대손 완석안선생, 우1 고배 예를 갖고 있는 심경호 교수, 우2 경례하고 있는 중한일 3국 학자들)
이날 중국과 한국, 일본 등 해내 외 학자와 전문가 40여명이 완원가묘를 찾아 예를 올리고 간단한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때 완원의 위패 앞에서 가묘를 방문한 일행 중 한 분이 고배(叩拜) 예를 갖추는 아주 흥미로운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한국이나 일본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그다지 흥미로울 것도 없겠지만 경례로 일관하는 중국에서 고배라니? 그 주인공은 바로 한국 고려대학 문과대학에서 교수로 재직중인 심경호 선생입니다. 그럼 심경호 교수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렇게 깍듯하게 예의를 갖춘 이유와 완원과 김정희의 관계, 이들이 주고 받았던 학문적 교류가 현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 등에 대해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진설명: 방문 소감을 밝히고 있는 한국 고려대학교 심경호 교수)
한국 고려대 심경호 교수(이하 심경호로 약함): 안녕하십니까? 한국고려대학교 문과대학 한문학과에 재직하고 있는 심경호입니다. 아무한테나 제가 두 번 절하는 것이 아니고, 한국에서는 돌아가신 분한테 두 번 절하게 되어있습니다. 돌아가신 큰 선생님께도 두 번 절을 합니다. 제가 지금 한문학을 하고 있는 이유는 저의 은사님께서 완원의 영향을 받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을 완역하신 분입니다. 그 당시 고증학을 배우려면 중국에 유학을 왔어야 했지만 수교전이라 당시는 중국 유학 길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은사님께서 교토대학에 유학을 가라고 해서 유학을 갔습니다. 따라서 완원 선생은 저의 선생의 선생님이시기 때문에 제가 절을 한 것입니다. 우연히 절을 한 게 아니고요.
(사진설명: 기자의 인터뷰를 받고 있는 한국 고려대학교 심경호 교수)
기자: 언제부터 완원과 김정희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고 지금까지 어떤 연구성과들이 있나요?
심경호: 제가 대학을 1975년에 입학했는데 그 당시는 한문을 경시하는 시기였는데 당시 다행히 집안에서 한문을 했습니다만 저 역시도 한문을 부정하기 위해 한문을 접하게 되었고 대학에 입학해 한문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때 은사님이 번역하신 책이 바로 추사 김정희의 "완당집"이었습니다. 그때 은사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완당이라는 호의 기원이 완원에 있고 또 완원의 학문을 많이 받아 들였기 때문에 추사와 19세기 한국의 지적인 풍토를 이해하려면 완원을 전문적으로 공부를 해야 한다고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실은 완원에 대해, 추사 김정희와의 관계에 대해 연구해야 할 것이 숙제로 남아 있는데 완수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좀 더 많은 연구를 해 볼 생각이고 그 동안에 사실 몇 편의 단편적인 논문을 썼지만 (양주에)와서 이 풍토 속에서 어떻게 조성되었는가 하는 것을 느끼고 나니까 더 적극적인 동력원을 갖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몇 십 년간 관심을 가져왔고 또 저의 학문의 출반인데 이제 본격적으로 해야 할 시점이고 한걸음 접근하지 않았나 생각 됩니다.
기자: 오랫동안 완원에 대한 연구와 완원과 추사 김정희의 관계에 대해 연구를 해오셨는데 오늘 완원가묘를 방문한 소감은 어떤가요?
심경호: 흔히 강남이라고 하는 양자강 남쪽 지역에 학회나 관광으로 여러 번 왔었는데요. 이번에 완원의 가묘는 처음 참관을 했어요. 그런데 제 개인적으로도 완원의 학문이 조선후기 이른바 19세기에 전해져서 한국의 한학(漢學)이라고 하는 고증학이 꽃피우게 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 근원을 만났다는 느낌 때문에 굉장히 감회가 깊었고요. 또 사용하던 텍스트도 13경 주소를 사용하게 되는데 그 것이 바로 완원의 교감을 거친 것이 잖아요. 그래서 그러한 것들이 학문의 원축이라고 할까요? 이런 것들이 이 풍토 속에서 나왔구나 하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던 중요한 체험이었습니다.
기자: 구체적으로 추사 김정희 선생은 완원 선생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고 그 후 조선의 학문과 후학양성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십니까?
심경호: 제일 중요한 것은 학문은 개념과 방법인데, 추사 김정희는 완원을 통해 "실사구시"라는 화두라고 할까요? 학무의 아주 중요한 개념을 받아들이고 논문을 쓰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의 근, 현대에서도 많이 차용되는 개념입니다."
기자: 완원과 김정희의 문화적, 학문적 교류가 현 시대 중한 교류에 시사하는 점은요?
심경호: 우리가 문학을 요새 얘기할 때 서적을 많이 이야기하는데 사실 서적의 배후에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래서 책을 통해서 읽는 것과 그 사람의 인격을 접하고 직접적으로 감화를 받고 혹은 그 사람의 육성을 들으면서 공부를 하는 것은 많이 다르거든요. 그런데 추사 김정희와 완원은 물론 양주에서 만난 것이 아니라 북경에서 만난 것이지만 젊은 시절에 직접적인 인격을 접해서 그 인품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공감을 했기 때문에 그 학문을 좋아하게 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현재에도 마찬가지로 중한 양국에 있어서도 단순히 물질적인 교류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학술이나 문화든, 체육이든 여러 면에서 사람 대 사람의 관계로서 허심탄회하게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면에서 김정희와 완원의 만남은 여러 가지 시사하는 점이 크다고 봅니다.
기자: 앞으로 중한 양국의 교류에 있어서 바라는 점은요?
심경호: 마음을 비워놓고 여러 가지 사실을 따져보면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보면 물론 굴절도 있겠지만 진정한 만남이라는 것은 인간적으로 행복하게 살고 자유롭게 살고 또 민주화를 위해 사회를 공부하잖아요? 그런데 학문적인 만남이라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만남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되고 정치적인 문제는 하나하나 해결되어야 할 다른 한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일시적인 어려움은 있겠지만 역시 인간 대 인간의 만남으로서 학술적, 문화적 교류, 체육인들의 교류, 개인 대 개인의 교류가 더 활발해 진다면 양국이 서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현재는 과거와 같이 일방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호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설명: 인터뷰를 마치고 기자와 함께 기념사진을 남기고 있는 한국 고려대학교 심경호 교수)
기자: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심경호: 감사합니다.
[아나운서] 심경호 교수의 말씀처럼 중한 양국이 빈번한 교류를 통해 그 친선을 오래오래 이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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