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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기록문학 <량가하> 제2회
2018-07-03 20:35:44 cri

습근평은 마음속으로부터 자신을 연안사람으로 간주했습니다.

2004년 8월 14일 당시 중공 절강성당위원회 서기였던 습근평은 연안(延安)방송의 단독인터뷰를 받았습니다. "자신을 진정한 연안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하는 기자의 질문에 습근평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습니다. "나는 자신을 연안인의 한사람으로 간주합니다. 왜냐하면 연안은 제 인생의 시작과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 가지고 있는 많은 기본적인 생각들과 기본적인 특징은 연안에서 형성되었습니다. 때문에 저는 당연히 자신을 연안사람으로 간주합니다."

1968년 12월 22일, 모택동(毛澤東)주석은 "지식청년들이 농촌으로 가서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고 호소했습니다. 전국의 1700여만 청년학생들이 이 호소를 받들고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감으로써 잊을수 있는 인생의 새로운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청년 습근평도 이 농촌진출대군 중의 일원이었습니다. 그의 출발지는 베이징이었고 종착지는 혁명의 성지 연안이었습니다. 1969년 1월 13일, 베이징역은 사람들로 붐비었습니다. "지식청년 특별열차"는 남으로 하남(河南)을 지나 다시 롱해선(隴海線)을 타고 서쪽으로 향했으며 서안(西安)에 이르러 다시 북으로 향해 결국 동천(銅川)에 이르렀습니다. 동천에서 아침을 먹고 지식청년들은 그들을 마중나온 트럭에 앉아 연안으로 향했습니다.

 

1월 16일 습근평 일행은 연천현(延川縣) 문안역(文安驛)공사에 도착했습니다. 이어 이들은 문안역의 여러 생산대에 배치되었습니다.

습근평을 비롯한 열다섯 명은 량가하에 배치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습근평은 제일 어렸습니다. 당시 량가하대대 당지부서기였던 양옥명(梁玉明)은 습근평이 갈색트렁크를 들고 왔는데 그 속에는 책이 가득 있었다고 기억합니다. 그의 회억에 따르면 그날 지식청년들을 도와 짐을 날랐던 현지의 한 청년이 부피가 크지 않은 갈색트렁크를 들게 되었는데 길에서 점점 뒤에 처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휴식을 하면서 그 청년이 다른 사람들이 든 큰 트렁크를 들어보니 자신이 든 것보다 훨씬 가볍더라는 것이었습니다. 량가하에 도착해서야 사람들은 습근평이 트렁크를 두 개나 가져왔고 그속에는 책이 가득 들어있었다는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흰 살결에 키가 큰 청년, 사람들이 습근평을 본 첫 인상이었습니다.

당시 량가하에는 80여 가구에 200여명이 살고 있었습니다. 작은 강물이 마을을 흘러 지나고 촌민들은 그 강 양켠의 산기슭에 지은 토굴집에서 살았습니다. 토굴집 밖에는 황토산이 솟아 있었습니다. 날이 점점 어두워진 후 골짜기에서 마을을 올려다 보면 토굴집에서 밝힌 등잔불빛이 별빛처럼 창문틈으로 새어 나왔으며 볼수 있는 제일 큰 평지라야 100평방미터도 안되었습니다. 당시 습근평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게 바로 산정동인들의 생활이구만!"

15명의 지식청년들은 두개 팀으로 나뉘었습니다. 습근평은 대명(戴明), 뢰평생(雷平生), 왕연생(王燕生), 양경생(楊京生) 등과 함께 2대에 배치되었습니다. 이들은 대대 공청단 지부서기인 장청원(張靑遠)의 토굴집에 잠시 기거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농촌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촌민들은 수도에서 온 이 지식청년들을 훓어보았고 지식청년들도 촌민들을 바라 보았습니다. 바로 서로간의 이 응시는 도시와 농촌간의 만남이었고 사명감이 넘친 지식청년들과 사회의 가장 말단에서 살아가는 농민들간의 만남이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1969년의 음력설이 되었습니다. 지식청년들은 연안사람들이 귀한 손님들을 맞이하는 표준식사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구들에 상이 차려지고 작은 사발 네 개에는 고기볶음, 닭고기요리, 완자, 갈비요리가 담겨 있었으며 거기에 농주까지 곁들여 졌습니다. 물자가 부족하던 그 세월에 이 한상은 "호화로운 식사"였습니다. 상을 마주한 지식청년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섬북에도 이렇게 맛있는 음식들이 있는 줄 몰랐구나!"

그러나 그 기쁨은 잠시뿐이었고 이후 시작된 생활은 량가하의 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정월 대보름이 지나자 마을의 일부 촌민들이 집에 자물쇠를 잠그고는 외지로 떠났습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촌민들은 약속이나 한듯 집을 떠나 구걸하는 거지 대오 속에 합류하군 했습니다. 연천현에서는 거의 절반 되는 마을들에서 이 시간이 되면 다른 곳에 가서 구걸을 했는데 어떤 생산대의 대장도 구걸을 나섰습니다.

2004년 습근평은 연안방송과의 단독인터뷰에서 이런 에피소드를 회억했습니다. 당시 현지 촌민들 속에서 제일 유명한 일화는 습근평이 개에게 빵을 먹인 일이었습니다. 그 사연인즉 습근평이 책가방을 정리하다가 베이징에서 넣어 두었던 빵 반조각을 발견했고 이미 변하여 먹을수 없는지라 옆에 있던 개에게 던져 주었습니다. 촌민들은 빵을 본적이 없었으니 먹어 보았을리는 더욱 없었습니다. 이들은 습근평이 이런 훌륭한 음식을 개에게 먹였다는 말을 듣고는 지식청년들이 식량이 아까운줄 전혀 모른다고 혀를 찼고 그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전 연천현이 모두 알게 되었다는 웃지도 울지도 못할 에피소드입니다.

"나는 황토지의 아들"이라는 문장에서 습근평은 량가하시절의 생활에 대해 이렇게 반성합니다. "당의 부름을 받고 농촌에 갔을 때 나는 나이가 어렸고 장기적인 타산이 없었으며 따라서 다른 사람과 단결하는 문제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다른 지식청년들은 매일 산에 가서 일을 했지만 나는 제멋대로였고 현지 촌민들은 나를 곱게 보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습근평이 말한 "단결"은 그의 부친 습중훈(習仲勛)의 교육에서 비롯한 말입니다. 이와 관련해 습근평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늘 저에게 단결에 대한 도리를 가르쳤고 자식들에게 어릴 때부터 단결을 중시하고 단결을 잘 하는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는 만큼 모든 일에서 자기중심이 되어서는 절대 안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단결관념"으로 습근평은 자신을 대중들 속에, 농촌에 녹아들게 했습니다. 바로 이런 "단결관념"이 그로 하여금 인민들속에 뿌리를 박고 대중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관념을 점차 형성하게 했습니다. 뛰어난 단합심은 습근평의 선명한 지도풍격 중의 하나로 되었습니다.

습근평의 농촌생활은 완전히 변했습니다. 그는 베이징청년과 농촌청년간의 차이를 메우기 위해 노력을 경주했습니다.

량가하 생활에서 습근평이 제일 참기 힘들고 손쓸 방법이 없는 것이 바로 벼룩이었습니다. 습근평은 피부가 여리어 벼룩에게 물린 곳을 긁으면 붉은 반점이 솟아났고 긁을수록 더욱 가려워 참기가 힘들었습니다. 당시 습근평과 함께 일을 하던 석춘양(石春陽)은 습근평의 걷어 올린 다리를 비롯해 온 몸에 벼룩과 이에게 물린 상처가 남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종아리에는 벼룩에게 물린 붉은 반점들이 많았고 금방 딱지가 앉은 것이 있는가 하면 딱지가 떨어져 피가 흐르는 상처도 있었습니다.

습근평과 지식청년들은 벼룩을 없애는 여러가지 방법을 찾았습니다. 2년이 지난후 습근평은 이런 환경에 완전히 습관되었고 벼룩이 아무리 물어도 달게 잠을 잘수 있었습니다.

농촌사람들이 본 습근평은 아는 것이 많고 성격이 온화하며 하는 말이 보수적이지도 그렇다고 급진적이지도 않아 아주 성실한 청년이었습니다. "도시티"가 나지 않는 습근평은 마을의 청년들과 금세 사귀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발을 가정형편이 어려운 친구에게 선물했고 때로는 이발사로 자처해 마을 청년들에게 이발을 해주었습니다. 한때는 수영코치로 변신해 청년들에게 평영을 가르쳐주기도 했습니다. 량가하의 귀향지식청년인 왕헌평(王憲平), 사원 석춘양, 무휘(武暉), 장위방(張衛龐) 등은 습근평의 좋은 친구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미 마음속으로부터 이 "베이징아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습근평은 이들이 외부세계를 알게 하는 통로이고 한쌍의 눈동자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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