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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기록문학 <량가하> 제3회
2018-07-05 15:12:00 cri

 


라디오 기록문학 <량가하> 제3회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량가하에 금방 도착했을 때 습근평은 한동안 배정음식을 먹었습니다. (배정음식: 마을에 임시로 머무르는 간부 등을 위해 농가에서 준비한 식사. 배정음식을 먹을 때는 변변치 않은 음식에 술을 마시지 못하며 밥을 먹은 후 식비를 낸다) 그중 옥수수가루 찐빵, 콩가루 찐빵 등 음식은 마을 사람들이 평소에 아껴먹는 음식입니다. 밥을 먹을 때면 습근평이 배정받은 집 애들은 한켠에 서서 군침을 삼키면서 보기 일쑤였습니다.

지식청년들의 농촌생활은 베이징에서의 생활과는 격차가 매우 컸습니다. 하지만 현지 농민들의 생활보다는 훨씬 좋았습니다. 량가하 사람들의 매달 일인당 배급식량은 10킬로그램으로 지식청년들에게 제공되는 양의 반도 안됩니다. 허기를 달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은 옥수수개떡이나 씀바귀, 메밀잎 등으로 입에 풀칠을 했습니다.

후에 지식청년들은 자체로 밥을 지어먹었습니다. 절로 밥을 해먹으면서부터 지식청년들은 음식을 만들어 먹기가 쉬운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땔나무를 구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습니다. 산은 민둥산이여서 나무가 없었습니다. 관목조차도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라 어디에 가도 땔나무를 구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땔감마련을 위해 현지인들은 평소 모으기에 고심했습니다. 소똥을 말려 땔감으로 썼는가하면 또 홍수가 질 때에도 마을 사람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큰 물을 따라 떠내려오는 나뭇가지를 줍군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벼랑 기슭에 올라가 '물양지꽃가지(狼牙刺)'라는 관목을 베오는 마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관목은 불이 오래 지펴지는 땔나무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로 인해 벼랑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거나 불구가 되기도 했습니다.

지식청년들은 벼랑 기슭에 올라갈 수도 없었거니와 가시가 달린 관목을 벨 수도 없어 산에 가서 띠풀을 한아름씩 해왔습니다. 그런데 보기에는 많이 해온 것 같지만 아궁이에 넣고 불을 붙이면 몇 분도 안돼 다 타버렸습니다. 그때 지식청년 여섯명이 안아온 띠풀로는 밥 한끼도 지을수 없었습니다. 후에 대대에서 장만해둔 수숫단을 땔감으로 쓰도록 비준해서야 그들은 땔감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배를 곯기는 다반사였습니다. 대대에서는 종종 밀을 가루 내어 지식청년들에게 주어 그들이 생활을 개선하도록 했습니다. 공정복(鞏政福)의 기억 속에 인상 깊은 일화가 있습니다. 언젠가 농사일을 할 때 습근평이 밀가루 찐빵을 들고 산에 올라갔는데 점심식사를 할 때 보니 마을 사람들은 옥수수 개떡을 먹고 있었습니다. 습근평은 부끄러운 나머지 가져갔던 밀가루 찐방을 여성에게 주고 한끼를 굶었다고 합니다.

습근평은 량가하에서 한끼 이밥을 먹은 적이 있습니다. 그건 7년간의 지식청년생활에서 단 한번 있었던 일입니다. 그때 섬북(陝北)지역은 쌀이 매우 귀해 설을 쇨 때에도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먹었던 이밥은 이인당(李印堂)이 준 걸로 습근평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인당은 동천(銅川)에서 노동자로 일했고 습근평과 가깝게 지냈습니다. 한번은 그가 집에 오면서 쌀을 조금 가져와 어머니보고 밥을 한 후 습근평에게 맛보게 하자고 했습니다. 인당의 어머니는 쌀을 잘 일어 이밥을 지은 후 인당이더러 뜨거울 때 습근평에게 가져가도록 했습니다.

습근평은 량가하의 따뜻한 정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는 "내가 배가 고프면 마을 사람들이 나에게 밥을 해주고, 옷이 더러워지면 마을 사람들이 빨아주고, 바지가 해어지면 마을 사람들이 꿰매어주었다"고 그때 일을 회억했습니다.

농촌사회는 순박하고 농촌의 도덕평가기준은 간단명료합니다. 농촌에서는 고생을 견딜 수 있고 성실하면 사람들의 존중을 받습니다.

량가하에서 습근평이 가장 많이 한 일은 제방을 쌓는 일(황토고원 특유의 농업경작방식으로서 시멘트로 수토유실을 막는 일)이였습니다.

당시 농촌에는 대형 기계가 없어 제방을 쌓으려면 손으로 흙을 한층 한층 펴놓은 후 매우 무거운 돌로 부드러운 흙을 다졌습니다. 이 일은 중노동이었습니다.

그때는 노동보호조치가 따로 없었습니다. 습근평은 장갑이 없이 맨손으로 나무 달구를 잡고 뚜들겼는데 이렇게 온하루 일하고 나면 손바닥은 물집투성이였으며 이튿날에도 계속 일하게 되면 물집이 터져 피가 흐르군 했습니다. 하지만 힘들고 고달파도 "근평이는 억척스럽게 일했다"고 촌민들은 평가합니다.

제방 쌓는 일은 통상적으로 농한기인 겨울에 하게 되고 이때의 제방 쌓기는 가장 힘듭니다. 사원 량유창(梁有昌)은 그때의 일을 떠올리면서 음력 2~3월이면 섬북은 눈이 녹기 시작할 때인데 습근평은 바지가랭이를 걷어 올리고 맨발로 살을 에이는 듯한 물에서 일했다고 전했습니다.

촌민들은 몸을 사리지 않고 일하는 습근평에게 "훌륭한 젊은일세!"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습니다.

습근평은 한편으로는 그의 농민화 실천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책 속에서 정신적, 사상적 영향을 섭취했습니다.

량가하사람들의 기억 속에 습근평은 벽돌장만한 책을 읽었습니다. 밥을 먹을 때에도, 산에 가서 양을 방목할 때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전기가 통하지 않아 해가 지면 량가하인들은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오직 습근평의 토굴집에서만 한 가닥의 불빛이 흘러나왔습니다. 이 미약한 불빛이 습근평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는지는 그 누구도 몰랐습니다.

그때 습근평은 수많은 러시아 작품을 읽었습니다. 당시를 회억하면서 습근평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세대 사람들은 러시아 경전작품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저는 량가하 토굴집에서 체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읽었습니다. 이 책의 주인공 라흐메토프는 의지를 연마하기 위해 못 박힌 침대에서 잠을 잤고 못에 찔려 몸에서 피가 흘렀습니다. 그때 이 책을 보면서 의지력은 이렇게 키워야 되는 줄 알고 아예 담요를 치우고 맨구들에서 누워잤습니다. 비나 눈이 내리는 날이면 일부러 밖에 나가 비와 눈을 맞고 우물둔덕에서 냉수욕을 하는 등 고생을 찾아했습니다."

량가하에 정착한 후 습근평은 도처에서 책을 찾았습니다. 연천 현지에서 꾸린 문학지 <산화(山花)>도 습근평의 열독범위에 들었습니다. <산화>를 통해 그는 후에 유명작가가 된 로요(路遥)를 알게 되었고 두 사람은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로요는 후에 경탄을 금치 못하면서 습근평은 그보다 네 살 어리지만 지식면도 더 넓고 패기도 더 있다고 말했습니다.

량가하에서 생활한지 2~3년이 되자 습근평은 유창한 연천(延川)말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괭이로 땅을 파고 멜대로 똥통을 메고 땅을 갈고 파종하며 가을걷이를 하고 벼짐을 지는 등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을 습근평도 따라서 배웠습니다. 그는 모르는 것이 있으면 촌사람들에게 물어가면서 점차 농사일에 익숙한 실농군이 되었습니다.

습근평은 농촌의 여러 가지 일에 매우 능숙해졌습니다. 가져간 반짇고리도 쓸모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체로 털실을 꼬고 옷을 깁고 이불을 꿰매는 것을 배웠습니다. 비록 바늘땀이 고르지는 못해도 그럴 듯 했습니다.

량가하에서 습근평은 "농촌"학문을 배웠고 습근평은 량가하에 '도시'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량가하에는 좀도둑질하며 빈둥대는 사원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그가 대대의 파를 훔치다가 습근평에게 딱 걸렸습니다. 당시 관례대로라면 사원대회를 열고 사원들이 돌아가며 비평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습근평은 비평하지 않고 하나하나 따지면서 그에게 도리를 설명해 그가 잘못을 고치도록 했습니다. 그 사원은 습근평의 말을 들으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습근평의 이런 사리 밝은 처사에 량가하 촌민들은 마음속으로부터 탄복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래도 베이징의 아이가 대단해!" 그 일이 있은 후 마을사람들 눈의 "건달"은 점차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마을의 노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좋은 사원이 되었습니다. 그후 량옥명이 습근평과 이 일을 이야기하자 습근평은 "그는 작은 잘못을 범했을 뿐이고 얼마든지 고칠 수 있고 단결할 수 있는 사람이니 교육을 위주로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도와주면서 사람을 단결하는 습근평에 대해 량옥명은 평소에는 말수가 적은 이 지식청년이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후 량옥명은 일이 있을 때마다 습근평을 찾아 의논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습근평이 머무른 곳은 량가하촌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 담소를 나누면서 그가 들려주는 역사이야기, 재미나는 도시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량가하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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