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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기록문학 <량가하> 제4회
2018-07-05 15:36:22 cri

 


1974년 4월, 황토고원은 이미 한겨울에 들어섰고 설대목을 맞아 량가하 사람들은 설준비에 분주했습니다.

대대(大隊) 당지부서기로 된지 얼마 안되는 습근평은 량가하의 면모를 일신할수 있는 좋은 방도가 없을가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습근평은 신문을 뒤적이다가 그달 8일의 "인민일보"에 실은 두편의 보도를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천리밖에 있는 사천성(四川省)에서 메탄가스를 대량 생산했다는 원고였습니다. 습근평은 만약 우리 이곳에서도 메탄가스를 취사와 조명에 쓴다면 얼마나 좋을가고 생각했습니다.

오지에 위치한 량가하는 석탄을 살려면 50키로미터 상거한 탄광에 가서 사와야 했습니다. 량가하 사람들은 땔감을 마련하기 위해 산의 나무를 많이 베었고 이는 수토유실을 초래하게 되었으며 결국 농업의 발전에 장애로 되었습니다. 만약 메탄가스를 생산할수만 있다면 농촌의 에너지문제를 해결할수 있고 생산력을 해방할수 있을 뿐만 아니라 화장실의 분변을 처리할수 있어 농촌의 공공위생수준을 높일수 있었습니다. 거기에 농업용비료문제를 해결하여 알곡생산량을 높이는 효과도 거둘수 있었습니다. 메탄가스가 바로 농촌의 생산과 생활문제를 해결하는 금열쇠나 다름없었습니다.

메탄가스에 대한 아름다운 미래를 상상하는 습근평은 가슴이 세차게 뛰었으나 금세 냉정을 되찾았습니다. 사천(四川)과 섬북(陝北)은 기후차이가 큰데 사천의 이 열쇠로 섬북의 자물쇠를 열수 있을가?

행동을 중시하는 습근평은 직접 사천에 가서 답을 찾아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20여킬로미터를 걸어 현성에 있는 현 당위원회를 찾아 메탄가스를 생산하려는 제안과 사천에 가서 견학을 하려는 계획을 회보했고 비준을 받게 되었습니다. 설이 지나자 습근평은 차비를 빌린 후 베이징의 연안지원 간부인 백근주(柏根柱) 등 세명과 함께 사천의 경험을 배우기 위한 견학길에 올랐습니다.

당시 사천성 메탄가스보급 영도소조 부조장을 맡고 있던 양초(楊超)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되지 전에 연안에서 8년간 근무한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인연까지 겹쳐 그는 습근평 일행을 환대해 주었고 사천성의 메탄가스생산상황을 자세하게 소개해 주었고 이들이 성도(成都) 교외의 현들과 메탄가스 기술연구부문들에 가서 고찰, 견학할수 있도록 배치해 주었습니다.

이번의 고찰과정은 바로 신심을 더욱 굳히는 과정이었습니다. 사천에서 돌아온 습근평은 량가하에서 메탄가스를 생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연이어 생겼고 이는 그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실험용탱크를 어디에 만드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촌민들의 집마당은 토굴집을 만들 때 흙을 다져 만든 것이어서 토질이 단단하지 못하니 메탄가스탱크를 만들기에 적합치 않았습니다. 또 촌의 길은 사람이 걸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라 구불구불하고 좁아서 시멘트와 자갈 등을 운반하는 두바퀴 짐수레가 다니기 힘드니 자재운반도 골치거리였습니다. 게다가 촌민들의 거주지가 분산되어 메탄가스탱크를 만든다 해도 어떻게 가가호호에 도달한단 말인가? 그리고 제일 문제로 되는 것은 메탄가스탱크의 덮개로 쓸 석판은 그 두께와 전반 품질에 대한 요구가 상당히 높았는데 이런 석재는 량가하에서 찾아볼수 없었습니다.

이런 수없이 많은 난관을 해결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부딪쳐서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석재가 없으니 습근평은 사람들과 함께 진흙벌을 한미터 이상 파서 돌을 구했고 모래가 없으니 몇몇 청년들과 함께 7키로미터 떨어진 전마구(前馬溝)에 가서 한포대씩 등짐으로 메어 날랐습니다. 하루에 두번씩 날랐는데 잔등이 다 까졌으나 힘들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석회가 없으니 습근평은 경험이 많은 미장공을 찾아 방도를 구했고 사처에서 석회석을 찾아 소형석회공장을 차려 자체로 생산했습니다.

기필코 메탄가스를 생산하고야 말리라는 강한 신념을 안고 습근평은 빠르게 돌아가는 팽이처럼 분주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반대의 목소리도 들려 왔습니다.

한 사람은 바삐 돌아치는 습근평의 면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용없을거네. 사천은 따뜻하고 우리 연천은 기후가 차니 여기서는 메탄가스를 생산할수 없을거야. 메탄가스생산은 진령(秦嶺)을 넘어서는 성공할수가 없다네."

그러나 습근평의 고집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실만이 가장 훌륭한 답이고 메탄가스탱크를 만든다면 이것이 바로 답안이라고 믿었습니다.

습근평의 드팀없는 신념과 각고의 노력으로 1974년 7월 중순에 용량이 8입방미터에 달하는 메탄가스탱크가 준공되었습니다. 그러나 습근평은 기뻐할수가 없었습니다. 가스도관을 탱크에 이어 놓았으나 메탄가스가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원인일까? 도관이 막힌 것은 아닐까? 여러가지로 분석한 결과 도관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었습니다. 습근평은 정을 찾아 도관에 넣고 찔러 보았으나 별 반응이 없었습니다. 다시 힘주어 찔러 보니 분변이 섞인 오물이 뿜겨져 나오면서 습근평의 얼굴에 뿌려졌습니다. 이어 쉭쉭 하는 소리와 함께 가스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습근평은 손으로 얼굴을 대충 닦고 도관을 이어 놓고는 메탄가스렌지를 열어 놓은후 성냥을 그었습니다. 훅하는 소리와 함께 모두가 기대했던 장면이 나타났습니다.

한자 남짓이 불길이 솟아올라 마치 너울너울 춤추는 듯 했습니다.

성공이었습니다. 이 소식은 발 빠르게 마을에 퍼졌고 이어 공사(公社)에, 현에 전해졌습니다. 사람들은 사면팔방에서 모여와 앞다투어 이 신기하고 깨끗한 불꽃을 구경했습니다.

"메탄가스생산은 진령을 넘지 못한다"던 지론은 자연스럽게 깨졌습니다. 메탄가스로 등불을 밝히고 밥을 짓는 효과를 눈으로 본 사람들은 너도나도 메탄가스를 생산하자고 나섰습니다.

이 실험의 성공은 연안지구 당위원회와 연천현 당위원회의 중시를 받게 되었습니다. 연천현 당위원회는 1977년까지 전 현 범위에서 메탄가스화를 실현하자는 목표를 내놓았고 정식으로 고찰팀을 사천에 파견해 경험을 배워 오도록 했습니다.

"만리길을 걷고 만권의 책을 읽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천의 풍물과 인정세태도 습근평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습니다. 그는 고찰길에서 모든 기회를 이용해 현지의 사정을 알아보았으며 연도에서 본 주련들까지도 참답게 필사해서는 여가시간에 그 뜻을 곰곰히 새겼습니다. 길에서 새로운 사물이나 일을 보게 되면 끝까지 캐 물어 자신의 견문을 넓혀갔습니다.

그때 동행했던 베이징지식청년 흑음귀(黑陰貴)는 탄복을 금치 못했습니다."습근평은 정말 배우기를 즐기고 사색하기를 즐기며 이론과 실천의 합일을 강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고찰팀이 연천에 돌아온 후 현당위원회는 이들의 회보를 청취했고 전 현에서 메탄가스생산을 추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어 여러가지 강습반과 학습반이 꾸려졌고 습근평이 주요 강사를 많아 기술전수를 책임졌습니다.

메탄가스탱크를 만드는 실천속에서 새로운 기술들도 속속 발명되었습니다. 량가하 사람들은 석재가 부족하자 흙으로 이를 대체했으며 흙과 돌을 결부해 만든 메탄가스탱크를 선보였습니다. 흙을 단단히 다져 시멘트반죽을 대신했습니다. 그 결과 량가하의 메탄가스탱크의 건설원가는 원래의 하나당 40여원에서 30여원으로 절감되었고 이를 통해 43가구의 조명과 취사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메탄가스화를 대부분 실현하게 되었습니다.

큰 일을 할려면 세심함이 필수적입니다. 메탄가스탱크를 건설했던 경력은 습근평에게 중요하고도 심원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15년 후 이미 복건성(福建省) 영덕(寧德)지구 당위원회 서기로 된 습근평은 이렇게 회고합니다. "제가 섬북 연천현 량가하촌에서 농촌생활을 할 때 마을에서 메탄가스화를 위한 과학기술활동을 전개하는 작은 일에서 과학기술의 성과를 보급하는 효과를 톡톡히 보았지요. 집집마다 밥을 짓는 땔감이 필요없고 불을 밝히는 기름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그때 마을 사람들의 환희에 넘친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합니다. 과학기술수준을 높이면 생산과 생활문제들을 해결할수 있고 이는 대중의 긍정과 옹호를 받게 된다는 것을 사실이 말해준 것입니다."

30여년 후 이미 절강성 당위원회 서기로 된 습근평은 순안현(順安縣)을 시찰하면서 서남부의 강하촌(姜下村)을 찾아 메탄가스탱크를 둘러보았다. 그는 웃으면서 자신을 메탄가스생산의 "전문가"라고 소개했으며 메탄가스생산을 잘 해 대중이 진정으로 혜택을 보게 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지금의 량가하는 오래전에 이미 전기가 통했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상징으로, 한단락의 역사로 사람들은 습근평이 모두를 이끌고 건설한 첫 메탄가스탱크를 남겨두었습니다. 그 옆에는 "섬서성(陝西省) 최초 메탄가스탱크"라고 적힌 돌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때 메탄가스탱크를 만들면서 확장했던 길은 지금까지도 마을사람들이 이용하고 있습니다.

(제4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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