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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기록문학 <량가하>  제5회
2018-07-06 21:02:34 cri


토굴집 문밖에 서있는 남루한 옷차림에 왜소한 몸집의 무휘(武暉)는 올해 14살입니다. 습근평 보다 한살 어린 그는 량가하마을의 중학생입니다.

때는 엄동설한이라 토굴집 안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습니다. 누군가 토굴집 밖에 서 있는 무휘에게 불을 땔 줄 아는가고 묻자 무휘는 당연히 안다고 답했습니다.

이렇게 무휘는 지식청년들이 투숙한 토굴집의 단골손님이 되었습니다. 연천(延川)방언을 알아 듣지 못할 때마다 지식청년들은 무휘에게 묻곤 했습니다. '통역관'의 역할은 무휘에게 적잖은 자신감을 부여해 주었습니다. 지식청년들의 담소를 즐겨 듣는 외, 구들 머리와 창턱, 베개 옆에 놓여 있는 책들이 무휘의 마음을 더욱 끌었습니다.

무휘가 빌린 첫번째 책은 습근평이 가져온 '10만개의 무엇 때문에'였습니다. 이 책은 무휘에게 드넓은 세계를 탐지하는 창구를 열어주었습니다. 지식에 대한 갈구로 그는 책을 보면 흥분하여 좀처럼 손에서 놓질 않았습니다.

'10만개의 무엇 때문에'를 다 읽은 후 무휘는 또 습근평으로부터 '삼국연의(三國演義)','어머니(母親)','고요한 돈하(靜靜的頓河)' 등을 빌렸습니다. 그는 지식청년 왕연생(王燕生),뢰평생(雷平生)에게서 솔직함과 정직함을 느꼈고 습근평에게서 겸손과 성실함을 느꼈습니다.

습근평의 영향을 받아 무휘는 지식의 해양을 누비며 점차 대학에 진학하려는 결심을 다졌습니다. 1973년 무휘와 습근평은 함께 대학에 지원했고 무휘는 연안사범대학에 입학했습니다. 학교로 떠나는 무휘에게 습근평은 15킬로그램의 식량교환권(배급표)과 함께 왕연생이 량가하를 떠나면서 두고 간 남색 털 코트를 건네며 말했습니다.

"자네 이 코트를 가져가게. 학교에 가면 입을 수도 있고 이불로 덮을 수도 있네."

졸업 후 무휘는 선후로 연천현 교학연구실과 우거(禹居)중학교, 영평진(永坪鎭)교육위원회, 영평중학교에서 근무하면서 본보기를 보여주고 교학견학을 조직하고 교학수준 제고에 모를 박으면서 우거중학교를 연천현에서 유명한 중학교로 우뚝 서게 했습니다. 그는 또 사회자원을 유치해 학교 운영 여건을 개선하면서 영평중학교의 면모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어디를 가나 무휘는 항상 말보다 행동을 우선시 하면서 행동의 거인(巨人)이 되도록 스스로에게 요구했습니다.

2014년 은퇴를 앞둔 무휘는 학교를 찾아 캠퍼스 이곳저곳을 거닐며 아쉬움을 달랬습니다. '한 사람의 삶은 응당 이렇게 지내야 한다: 바로 지난 날을 되돌아 볼 때 허송세월 하지 않아 후회가 없고 부질없이 보내지 않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무휘는 삶이 부여한 의미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무휘와 같은 해에 대학입시에 참가한 습근평은 가정성분(家庭成分) 때문에 청화대학으로부터 입학을 거부 당했습니다. 2년 후인 1975년 청화대학은 연안에 배정한 두명 명액을 전부 연천에 돌렸습니다. 하여 습근평은 재차 대학에 지원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이때 습중훈이 하방(下放:지식인을 노동현장으로 보냄)생활을 하던 낙양(洛陽)내화자재공장에서 제출한 '습중훈동지의 문제는 인민내부 모순이므로 자녀들의 진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증명서류로 극복하기 어려워 보였던 '정치심사관'을 넘길 수 있었습니다.

개학 날자가 다가왔지만 습근평은 여전히 생산대의 일에 전념하면서 자신을 대체해 생산대 당지부서기를 맡을 후보를 고민했습니다.

수와(隨娃)는 석춘양(石春陽)의 애명입니다. 습근평은 생산대대 당지부서기로 선정됐을 때 성품이 정직한 석춘양을 대장, 지부위원으로 추천한바 있습니다. 때문에 석춘양은 습근평이 생각하는 가장 적합한 후보였습니다. 며칠 후 습근평은 당원회의를 소집했고 회의가 끝날 무렵 이렇게 말했습니다.

"난 곧 떠나게 되니 지금 지부서기를 맡을 사람을 선정해야 합니다. 나는 수와를 추천합니다."

투표용지에 모두들 수와를 적었습니다. 석춘양은 이 결과는 자신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근평이를 믿기 때문이며 또한 근평이가 추천했기 때문에 다들 자신을 선택했다고 말했습니다.

석춘양에게는 영원히 잊지 못할 한가지 사연이 있습니다.

습근평이 대대 당지부서기로 당선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생산대에서 구제식량을 조달받았습니다. 이 식량배분과 관련해 사원들 간에 분쟁이 생겼습니다. 모두의 생활형편이 어려운 것을 잘 아는 습근평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바로 집집마다 돌아보면 어느 집에 더 많이 줘야 할지 뻔한게 아닙니까?"

밤 10시부터 새벽 5시까지 습근평은 여러 사람과 함께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식량상황을 파악한 후 남은 식량이 적은 집에 더 많이 배분해주자 모두들 의견이 없었습니다.

이 일은 석춘양의 뇌리에 깊이 새겨 졌습니다. 그는 이와 같이 신속하고 과단성있는 조치는 그 누구에게도 사리사욕을 채울 기회를 주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석춘양은 누구나 이기심이 있기 마련이라며 공정하게 처사하지 못하면 대중들도 믿지 않을 것이며 공정하게 처사한다고 해도 모두가 받아 들일 수 있는 방법과 방식을 취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1975년 10월 7일은 습근평이 량가하를 떠나는 날이었습니다. 이날 새벽, 습근평이 문을 열고 토굴집을 나서니 이미 마을의 남녀노소 모두가 손에 대추며 좁쌀을 들고 마당과 길 옆에 묵묵히 서 있었습니다. 이를 본 습근평은 울컥 눈물을 쏟았습니다.

이날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일을 제쳐놓고 길게 줄을 서서 10여리나 습근평을 배웅했습니다.

습근평에게 있어서 량가하는 인생의 터닝포인트였습니다. 그후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습근평은 량가하에 대한 깊은 정을 회고했습니다. "이 땅을 밟고 인민 대중들과 함께 하노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힘이 솟구칩니다. 섬북 고원은 나의 뿌리입니다. 이곳에서 나는 인민을 위해 실속있는 일을 하련다는 드팀없는 신념을 굳혔습니다. 그때 비록 몸은 량가하를 떠났지만 마음은 그곳에 남겼습니다."

습근평이 량가하를 떠난 후 '공정한 처사'법에 대한 석춘양의 사색은 멈춘 적이 없었습니다. 석춘양은 물자가 부족한 시대에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공정한 처사의 핵심은 공평이지만 경제가 쾌속 발전하는 시대에서 이런 공정을 실현하려면 우선 치우치지 않는 "조건"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조건을 찾기 위해 석양춘은 연천현의 발전 계획과 결부해 량가하에서 사과산업을 발전시킬 것을 제안했습니다.

2015년 2월 13일, 량가하를 다시 찾은 습근평은 사과밭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산에 올랐습니다. 인건비를 감안하지 않는다면 한무 당 농약과 비료값 천여원만 들이면 5년 후부터 열매를 맺기 시작해 연간 수천여원의 소득을 낼 수 있고 성과기(盛果期:과일 재배시기)에 접어들면 연간 2만원 이상을 벌수 있다는 석춘양의 소개를 들으면서 습근평은 빙그레 웃으면서 수와가 마을사람들을 인솔해 산업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며 격려해 주었습니다.

2014년부터 량가하를 찾는 관광객들이 갈수록 늘어나자 량가하는 문화관광산업 개발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2015년 5월 1일 량가하는 시골문화관광발전유한회사를 설립했습니다. 석춘양은 특별히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해 회사 규장제도를 제정하고 완비한 경영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이로써 마을 사람들은 이 회사의 직원이 되었고 60% 이상의 마을 사람들이 집 문앞에서 일자리를 찾았습니다.

시대는 계속 발전하고 있고 치우치지 않는 공정한 일처리의 이야기도 계속 진행형입니다. 발전에 마침표가 없듯이 이 이야기에도 마침표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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