朱正善
2020-07-29 10:41:53 출처:cri
편집:朱正善

(시골 제1서기들의 이야기) 빈곤마을에 입주한 '낭만주의' 청년

호균부(胡鈞溥)는 귀주성 위녕(威寧) 이족회족묘족자치현 석문(石問)향 단결(團結)촌 마을 주재 서기이다.

23세 때 귀주대학을 졸업 한 뒤 그는 단결촌 촌지부 서기로 파견되었다. 
"대학교때 친구들은 모두 베이징과 상해, 광주 등 대도시 취직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농촌에 내려가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이 로맨틱한 결정을 내리게 됐습니다."
하지만 2016년 그가 단결촌에 내려올 때 마을 상황은 낭만과 거리가 멀고도 멀었다.  오몽산(烏蒙山) 복지, 운남과 귀주 접경에 위치한 이 편벽한 마을의 빈곤발생율은 무려 48%에 달했다.
"당시 단결촌은 주로 전통재배에 의거했습니다. 감자를 주로 심고 거기에 옥수수를 곁들여 심었습니다. 경제작물이 거의 없는 상황이었죠. 석막화 지역에 위치해 있어 토지가 척박했고 편벽한 곳에 자리한 탓에 교통마저 불편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단결촌은 잘못된 길로 나아가 시행착오를 범할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반드시 단결촌에 맞는 산업의 길을 모색해야 했습니다."
그 때를 회억하며 호균부 서기는 이렇게 말한다. 
일련의 현지 고찰을 마친 뒤 그는 이웃한 중수(中水)진에서 내한성이 강한  자피마늘을 도입해 마을의 200여묘 땅에 심었다.  묘당 생산량이 500킬로그램에 달했고 1킬로그램당 3원에 팔려 차별화를 실현함과 아울러 부가가치도 톡톡했다.
기자는 또 호균부 서기를 따라 마을의 작은 산에 올랐다. 산허리에  70, 80개 벌통이 군데군데 놓여있었고 많은 벌들이 그 사이를 날아다녔다. 여기가 바로 촌민 로사영(羅仕永)의 양봉장이다.
양봉산업 초창기의 어려움을 호균부 서기는 이렇게 소개했다.
"2017년에 우리는 준의(遵義)에 가 양봉기술을 배울수 있는 명액 5개를 쟁취했습니다. 학습기간 주숙을 전부 해결해주고 교통비까지 대준다고 했지만 선뜻 나서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습니다. 나중에 벌통을 메고 집집이 다니며 설득한 결과 겨우 세 사람이 마음이 동했습니다." 
단결촌 촌민들은 장시기 동안 편벽한 산골에서 폐쇄적인 생활을 하고 있어 양봉기술을 전혀 접해보지 못했던터라 모두가 선뜻 나서지 못할만도 했다.  2018년에 라사영의 숙부는 조카가 양봉사업을 크게 벌리자 조카를  따라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고 지금은 십여개 벌통을 관리하며 한해 1만여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농업 산업이 초보적으로 규모를 이루고 도로가 통하면서 2019년 말 단결촌은 가난의 모자를 벗어던졌다. 
최근에 단결촌은 군중대회를 열고 향촌관리체계 개혁방안을 통과했다. 이 역시 호균부 서기의 가슴을 짓누르던 하나의 큰 돌덩이었다. 단결촌이 가난에서 벗어난 뒤 호균부 서기는 시골관리체계 개혁의 시기가 성숙되었다고 생각했다. 
" 과거 우리 촌민들은 자아관리와 자아서비스 의식이 강하지 못했습니다. 최근년간 우리는 3급 관리모델 개혁을 통해 대중들의 내재적인 동력을 점차 키워주었습니다. 지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적립금 관리제도를 통해 대중들의 적극성을 충분히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 호균부 서기는 자신감에 넘쳐 이렇게 말한다. 
3년 반이 지난 오늘 그는 자신이 전보다 한결 실무적으로 변했지만 마음속에는 여전히 '낭만'을 보유한 청년이라고 말한다. 
그를 가장 감동시키는 것은 전에 단결촌에 대해 품었던 아름다운 소망들이 하나 둘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당의 호소를 받들어 단결촌에 왔습니다. 이 곳에서 탈빈곤의 약속을 지키는 것은  당원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을 촌민들과 힘을 합친다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수 있고 샤오캉 사회 전면 건설의 목표도 필히 이룰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호균부 서기는 보다 아름다운 내일을 자신한다.

번역/편집:주정선
korean@cri.com.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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