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24 11:00:47 출처:cri
편집:韩京花

습근평과 부친: 인민을 위한 마음

"부친은 늙은 황소처럼 중국 인민을 위해 묵묵히 헌신해왔습니다. 이는 일생 동안 모든 정력을 인민을 위해 봉사하는 사업에 바치도록 나를 격려합니다."

습근평 주석은 부친의 생신을 축하하는 서한에서  부친 습중훈을 이렇게 형용했다.

습근평 주석은 "부친에게서 계승하고 받아들일 귀중한 품덕과 고상한 품성이 아주 많다"고 말했다. 이 가운데서 하나가 바로 "인민을 위한 마음'이다.

"나는 농민의 아들이다"

습중훈은 '군중속에서 걸어나온 군중 수령'이다. 습중훈은 늘 그가 농민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토지혁명시기, 20세 미만의 습중훈은 섬검변 근거지 창립에 투신했다. 그는 "군중의 지지가 없었더라면 우리의 모든 것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부친 습중훈이 거주한 적 있는 남읍촌의 뜰

관중 지역은 습중훈이 혁명에 참가한 시발점이자 그가 평생 염려하던 곳이다. 관중에 머물던 6년 동안 습중훈은 시종 삼진(三秦, 섬서성 일대) 지역을 뛰어다녔고 시종 군중과 함께 했다. 군중들은 일이 있으면 "습중훈을 찾아가라"라고 말했다. 1942년, 조직은 그가 '당의 귀중한 군중 수령'이라고 평가했다. 

"나의 할아버지도 농민입니다. 나의 부친은 농민으로부터 혁명의 길에 올랐습니다. 나도 7년 동안 농민으로 있었습니다."

농민에 대한 이런 소박한 감정은 줄곧 습근평 주석의 마음속에 아로새겨졌다.

어느 글에서 습근평 주석은 그가 황토의 아들이라고 썼다.

1969년, 16세 미만의 습근평은 베이징에서 양가하 대대에 내려갔다. 섬서성에서 지식청년, 농민으로 지낸 2400여일동안 그는 낮과 밤을 이어 황토고원의 순박한 농민들과 함께 자고 함께 먹고 함께 일했다. 그는 현지인들과 깊은 정을 쌓았으며 중국의 농촌이 어떠한지, 백성들의 희노애락이 무엇인지, 중국의 기본 국정이 무엇인지를 깊이 알게 되었다.

그때 그 시절 양가하의 모든 것이 청년 습근평의 마음을 움직였고 따뜻하게 했다.

인민에서 비롯되어 인민속에 뿌리를 내린다. 이는 습근평과 부친 두세대 공산당인의 변치 않는 초심이다.

진정으로 인민군중을 마음에 두다

2021년 9월 섬서성 유림을 고찰하던 습근평 주석이 부친 습중훈이 사업, 생활했던 곳인 중공수덕(绥德)지방위원회 옛터를 찾았다.

2021년 9월 14일, 습근평 주석이 중공수덕지방위원히 옛터를 돌아보았다

1943년, 습중훈은 수덕지방위원회 당서기로 취임한 후 곧바로 "52만 군중을 위해 봉사'할데 대한 요구를 제기했으며 자신과 지방위원회 사업인원들은 이를 먼저 시행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를 위해 습중훈은 각급 간부가 '관리'와 '나으리'로 되지 말고 '아문'을 나와 마을에 깊이 들어가 진정으로 군중을 위해 생각하고 실제적인 일을 할 것을 요구했다.

훗날 그는 처음으로 중앙실무회의에서 광동에 '권리를 내려놓고' 광동이 '한걸음 선행하여' 경제를 발전하고 민생을 개선할 것을 제기했다... 경제특구의 큰 막은 이렇게 남부 광동성에서 시작되었다.

습중훈은 광동에서 적극적으로 국유기업 개혁의 길을 모색했다. 그는 '청원의 경험'을 지지, 보급했으며 기업의 자주권을 늘리고 기업의 생산효율을 높였다.

기업을 시찰해 기업 생산과 개혁 상황을 알아보고 있는 습중훈

광동성의 오랜 간부인 장국영은 습근평이 관원이 된 후 부친 습중훈은 아들에게 얼마나 큰 관원이 되든지 부지런하게 인민을 위해 봉사하며 진정으로 인민을 위해 생각하라고 부탁했으며 군중과 연계하고 태도가 겸손하며 온화해야 한다고 당부했다고 회억했다.

지난 세기 80년대초, 습근평 주석은 지방 영도의 직무를 맡고 하북성 정정현 당위원회 서기를 역임했다. 

"종래로 사무실에 한가하게 있지 않았다." 이는 습근평에 대한 사람들의 인상이다. 그때의 현 간부들의 회억에 따르면 습근평 주석은 늘 사업인원들을 데리고 조사를 다녔다. 특별히 현성에 장터가 설 때면 거리에 책상을 놓고 정터에 온 군중들의 의견을 청취했다. 

 1983년, 하북성 정정현 당위원회 서기로 있던 습근평(중), 임시로 거리에 책상을 놓고 군중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있다.

인민에게 의거하고 인민을 위한다. 이는 습근평과 부친의 책임이었으며 또 그들의 힘의 원천이었다.

인민이 바로 강산이고 강산이 바로 인민이다

습중훈은 일생동안 혁명과 건설, 개혁의 여러 역사시기를 거쳤다. 

공화국 창립 50주년 축제 때 습중훈은 천안문 성루에서 축제를 관람하면서 감개무량하여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영원히 강산이 바로 인민이고 인민이 바로 강산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소박한 이 말은 인민을 위해 종신토록 분투한 노일대 혁명가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  말이다.

습근평 주석도 수차 "강산이 바로 인민이고 인민이 바로 강산"이라고 말했다. 어느 한번 지방 시찰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공산당이 강산을 일구어내고 지킵니다. 강산을 지키는 것은 인민의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인민이 좋은 나날을 보내도록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2012년 12월 30일, 습근평 주석이 하북성 부평현 용천관진 낙타만촌에서 군중들을 위문하고 있다.

"나를 잊고 인민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습근평과 부친의 인민을 위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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