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19 15:26:15 출처:cri
편집:韩京花

‘부친께 보낸 편지’--습근평과 부친의 이야기

오늘(6월 19일)은 아버지의 날이다. 아버지의 날을 맞아 습근평(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그의 부친 습중훈(習仲勳) 부자(父子)의 이야기를 전해드린다.

습 주석의 집무실에는 훈훈한 가정생활을 담은 연대별 사진 여러 장이 놓여 있다. 그중 한 장은 습근평 주석이 연로한 부친이 앉은 휠체어를 밀며 아내, 딸과 함께 산책하는 사진이다.

[습근평과 부친 습중훈, 부인 팽려원, 딸의 가족사진]

출처: <습중훈화전>(習㑖勛畵傳)

가정을 소중히 여기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중화민족의 전통적인 미덕은 습근평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렸다.
습 주석은 생활, 사업, 처신에 있어서 부친 습중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는 그가 부친에게 보낸 편지에서 엿볼 수 있다. 

2001년 10월 15일은 습중훈의 88번째 생신이었다. 88세 생신은 중국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날이다. 이날 습씨 일가족 모두 단란히 모였지만 유독 당시 복건(福建)성 성장을 역임한 습근평만이 다망한 공무로 참석하지 못했다. 습 주석은 죄송한 마음으로 부친에게 축수의 편지를 보냈다.
습 주석은 편지에서 부친에 대한 깊은 정을 털어놓았으며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아 계승하고 싶은 보귀하고 고상한 품격"을 언급했다.

"부친은 자신의 크나큰 사랑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고 '황소'마냥 중국 인민을 위해 묵묵히 헌신해왔습니다. 이는 필생의 정력을 인민군중을 위해 봉사하는 사업에 이바지해 금수중화와 고향의 친인들에게 보답하도록 나를 격려합니다."

습중훈은 '군중으로부터 나온 군중 리더'이다. 그는 항상 자신은 농민의 아들이라고 말하면서 시종 자신을 노동 인민들의 일원으로 간주했다. 1943년 중국 서북부 섬서(陝西)성 수덕(綏德) 당서기에 취임하자마자 "52만 군중을 위해 봉사하라"며 자신과 다른 사무인원들이 솔선수범하기로 다짐했다. 이를 위해 그는 시골을 찾아 군중들을 위해 방법을 생각하고 실제적인 일을 할 것을 각급 간부들에게 요구했다. 

1946년 섬서성에서의 습중훈

1978년 8월, 습중훈(왼쪽에서 세 번째)이 광동(廣東)성 혜양惠陽) 농촌에서 조사 연구 중이다. 습근평(맨 왼쪽)이 여름휴가기간 사회실천 참가 차 아버지를 따라 시골로 내려갔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온 습근평은 '군중을 찾아가자' '인민을 위해 봉사하자'는 생각과 자세를 견지해왔다. 중국 북부 하북(河北)성 정정(正定)현 재직기간 그는 모든 마을을 돌아보았고, 중국 동남부 복건(福建)성 녕덕(寧德)시에서 그는 취임 3개월 만에 9개의 현을 다 돌아보았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향진을 돌아보았으며, 중국 동부 절강(浙江)성 부임 후에는 1년여에 걸쳐 전 성의 90개 현시를 전부 돌아보았다.

1983년 하북성 정정현 당서기였던 습근평(앞줄 가운데)은 임시로 거리에 책상을 놓고 주민들의 의견을 청취했다.

1989년 12월 2일 당시 복건 녕덕(福建寧德) 당서기였던 습근평은 천여 명의 간부를 이끌고 녕덕현 남제 (南漈) 수리 공사장에서 도랑 정비 노동에 참가했다.

2012년 이후 중국 당과 국가 최고지도자가 되었지만 습 주석은 "근평아, 네가 얼마나 대단한 관직에 오르던 근면하게 인민을 위해 봉사하는 걸 잊어서는 안된다. 진심으로 백성들을 염두에 두고 군중들과 마음을 나누고 친화력이 있는 간부가 되어야 한다"는 부친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 이는 부친의 당부이자 습 주석이 항상 실천하는 초심(初心)이다. 가난 구제 시찰에 나서든 산길을 걷고 비바람이 몰아치든 습 주석은 언제나 어려운 군중의 집을 찾아 촌민들의 손을 잡고 연간 수입은 얼마나 되는지, 식량은 넉넉한지, 겨울 나이 솜이불은 있는지 등을 꼼꼼히 물었다. 또 온돌은 잘 쌓았는지, 지붕에는 펠트를 깔았는지, 비가 새는 곳은 없는지를 묻기도 했다.

2012년 12월 30일, 습근평 주석은 하북성 부평현 낙타만촌에서 불우이웃을 위로했다.

습 주석은 부친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아버지의 검소함은 가혹할 정도였습니다. 가정교육의 엄격함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이러한 교육 아래 근검한 습관을 키워왔습니다. 이는 오랜 볼셰비키와 공산당원의 가풍입니다. 이런 좋은 가풍은 세세대대로 이어져야 합니다."

습중훈은 늘 자녀들에게 식량을 절약하는 도리를 가르쳐 주었다. 습 주석의 누나 교교(橋橋)는 "식사할 때 아버지는 우리가 식탁에 떨군 밥알이라든가 빵 부스러기를 주워 드셨고, 마지막 남은 반찬 그릇의 국물은 찐빵으로 깨끗이 찍어 드셨습니다”고 회억했다.

 

1958년, 습중훈과 아들 습근평, 습원평

1960년, 습중훈이 아내 제심(齊心), 자녀, 친지들과 함께 북해공원을 찾았다.

(출처: <습중훈화전>)

귀동냥으로 가난한 나날을 보내며 '배불리 먹지 못하고 배를 곯는' 세월을 살아온 습근평은 부친의 검소한 품성을 이어받았다. 하북 정정에서 일할 때 여러 군데 헝겊으로 꿰어 맨 담요는 습 주석과 '단짝'이었다. 복건성 하문에서 근무할 때 그는 거의 매일이다싶이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했다.

중국 최고지도자가 된 이후에도 습 주석은 검소함을 솔선수범해왔다. 

2015년 7월 16일, 습근평 주석이 길림(吉林)성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벼 작황을 시찰하고 있다.

습 주석은 "가정은 인생의 첫 번째 교실이고 부모는 아이의 첫 번째 선생님"이라고 여긴다.  그 교실에서 습 주석은 부모로부터 인생의 가장 보귀한 교육을 받았고 인성을 몸에 익혔으며, 바로 그것이 오늘날 습주석의‘나를 잊고 인민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원대한 흉금의 바탕이 되었으며 인민을 위한 마음을 품을 수 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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