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08 09:49:53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2년 7월 7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7월의 첫번 <청취자의 >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 함께하는 아나운서 임봉해(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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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목요일인 7 7일은 양력 한해의 188일째 되는 날입니다. 한해가 마감할 때까지 177 남았습니다.

역사 속의 오늘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7 7 중국 역사에서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1937 7 7, 일본이 전면 중국침략을 시작하였습니다. 7 7 저녁, 노구교 일본 주둔군은 중국 지방당국에 아무런 통지를 하지 않은 상황에서 중국 주둔군 진지 부근에서 이른바 군사연습을 진행했으며 병사가 실종되었다면서 북평 서남쪽의 완평 현성에 들어가 수색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중국 주둔군은 무리한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일본군은 중국 주둔군을 공격했으며 중국 주둔군 29 37사단 219연대는 이에 반격하고 완강한 항쟁을 진행했습니다.

완평성의 총소리는 중국 전민 항일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양력 7 7일이 전쟁의 서막이라면 음력 7 7일은 사랑의 축제의 날입니다.

해마다 음력 7 7 이날은 중국 전통적인 명절인 칠석 명절입니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이날은 직녀 일곱 자매의 날이라고 하며 제사 활동은 이날 저녁에 진행된다고 해서칠석이라고 합니다.\

민간에 전한데 의하면 해마다 칠석 저녁이면 천상의 직녀와 견우가 오작교 위에서 만난다고 합니다. 직녀는 용모가 예쁘고 마음씨가 고우며 손재간이 많은 선녀라고 합니다. 지상의 처녀들은 이날 저녁이면 하늘의 밝은 달을 바라고 과일상을 차리며 제사를 올렸습니다. 그들은 천상의 여신이 그들에게 지혜로움과 재간을 주길 바랐으며 이보다 사랑과 혼인의 인연을 내려주길 기원했습니다.

상고시대 천문에 대한 인식과 방직기술의 산생, 발전에 따라 견우와 직녀 그리고 제사 풍속이 있게 되었습니다. 학자들은, 풍속이 남자들은 경작을 해고 여자들은 천을 짜던 형태의 반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한나라 전설은 직녀가 옥황상제의 일곱 번째 딸이며, 견우가 소를 끌던 농부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칠석절은 중국 명절에서 제일 낭만적인 명절이며 지난날 처녀들이 제일 중시하던 날이었습니다.

이날, 오작교가 놓인 하늘을 바라보면 부지중 칠석과 이어지는 무수한 시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옛사람들은 망망한 밤하늘을 바라고 세상에 널리 유전되는 많은 시들을 지었습니다.

2006 5, 칠석절은 중국 국무원에 의해 1 국가 비문화재로 되었습니다. 오늘날 칠석절은 중국의발렌타인 데이 불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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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는 승려를 따라 찾은 이야기 이런 제목으로 천태산의 전설로 전하는 신라사찰 말씀드렸습니다.

천태산의 전설로 전하는 신라사찰

헛갈리지 않도록 먼저 설명을 해둔다. 천태산天台山 천태종이 일어난 절강성浙江省 녕파寧波 천태산이 아니다. 사실상 동명의 천태산天臺山 중국 대륙에 십여 개나 되는데, 천태산은 대륙 남부가 아니라 동부의 산동성山東省 일조日照 있다.

일조는 일출의 햇살이 제일 먼저 비춘다는 말에서 취한 지명이다. 지명은 천태산에 있는 동이東夷 상고시절 태양숭배 신화로 인해 생긴 것이다.

신화가 있는 태양의 산에는 한때 신라인들이 촌락을 이뤄 살고 있었다. 정말이지 천손天孫 자식들은 태양부족의 고향을 찾아 바다 저쪽에서 일부러 듯싶다.

천태산의 신라촌에는 노비로 팔려온 신라인이 있었다고 국지국(鞠志國, 일조시 태양문화연구회 부회장) 씨는 신라촌 촌민의 신분을 밝혔다.

일조 시내에 있는 태양문화연구회의 사무실에서 국씨를 만났다. 근처의 기차역에서 오구작작 붐비는 인파가 실루엣처럼 창밖으로 하얗게 비쳐들고 있었다. 10 국씨는 미국에서 공부할 우연하게 비석을 만났으며, 나중에 신비한 비석의 출처를 찾아 천태산으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천태산의 산봉우리마다 널려 있는 태양유적은 그를 경이로움과 감동의 경지에 빠지게 했다. 드디어 국씨는 천태산의 태양유적을 발굴, 연구하는 고고학자로 일대 변신을 한다.

국씨의 말에 따르면 신라노비는 성이 이李씨이며 후예가 현재 한국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이씨의 후예가 조상의 기억을 옮긴 글에서 지금까지 몰랐던 신라촌의 많은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신라촌은 천태산의 산골짜기에 있었고 소금 말리기와 어로, 농사를 생계로 삼았다고 한다.

나라 영태永泰 원년(765), 초대 치청평淄靑平 절도사 이정기李正己 산동 일대를 점거하고 할거세력을 형성했다. 그는 신라노비 교역을 방임했으며 이로 하여 한때 신라노비의 매매는 더구나 창궐했다. 819, 당나라는 이정기의 할거세력을 평정한 823년과 828년에 걸쳐 번이나 칙령을 내리고 신라인을 노비로 사지 못하게 했으며 그들을 귀국하게 했다.

대부분의 신라인들은 방면된 여전히 대륙에 남아있길 원했으며 연해 일대에 기거하면서 군락을 형성했다. 그들을 제외하고 대륙에 안착한 신라인들은 통역, 항해기술자, 학자, 승려, 심지어 바둑기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신라인들의 군락은 신라방新羅坊, 신라채新羅寨, 신라보新羅堡 이름으로 불렸으며 산동성 지어 남쪽의 복건성福建省 연해에도 나타나고 있었다.

시기, 천태산의 부근 지역에는 염장鹽場 있어 아주 번화했으며 신라촌의 인구도 다른 신라마을에 비해 훨씬 많았다고 한다.

현재로선 천태산의 신라촌에 이씨의 선조처럼 노비 출신이 얼마 되었는지 없다. 그러나 천태산에 신라사를 지은 것은 그들 촌민이 아니라 승려라고 비기碑記 기록하고 있다. 대만臺灣에서 발견된석봉사중수비기石鳳寺重修碑記 당나라 , 신라 승려 지은智隱 사원을 재건했으며 신라사新羅寺라고 했으니 불문이 재흥했다. 명기하고 있는 것이다.

신라인들은 촌락을 이룬 부근에 새로 사찰을 세우는 경우가 많았지만, 시기적으로 천태산에는 신라마을보다 신라사가 먼저 생긴 같다는 지적이다. 분명한건 신라사가 천태산의 사찰을 재건했다는 . 남북조(南北朝, 420~589) 시기의 승려 혜심慧深 일찍 천태민사天臺憫寺 세웠다고석봉사중수비기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그때 혜심은 산기슭에서 굶어죽은 사람의 시신을 보고 돌을 쌓아 무덤을 만들었으며 무덤 옆에 사찰을 세우고 이름자에 불쌍히 여길 넣어 사찰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후 재건한 신라사는 천태민사보다 훨씬 오랫동안 존립했다. 나라 홍무(洪武, 1368~1398) 연간까지 5 동안 천태산에 줄곧 향불을 피워 올렸다. 신라촌도 여전히 천태산에 존립하고 있었으며 신라인 후예가 위주였고 촌장도 신라인 후예였다. 이씨의 선조는 홍무 연간에 한시기 신라촌의 촌장으로 있었다고 전한다.

와중에 고려 말기의 문신 정몽주鄭夢周 신라촌을 찾아왔던 것이다. 정몽주는 무너지는 고려를 마지막까지 지키다가 숨진 충절의 인물이다. 그는 명나라를 사신으로 방문한 기간 일부러 일조의 천태산을 찾아와서 신라촌의 유민들을 만났던 것이다.

이때 정몽주는 신라인의 뿌리를 찾고 맥을 잇기 위해 신라촌에서 젊은이들을 일부 선정하여 반도에 데려갔다고 전한다. 정몽주는 은자를 내어 신라사 부근에 신라서원新羅書院 세웠다.

정몽주는 천태산에서 신라 유민을 만난 감개가 무량하여 시를 지었다. 일조현日照縣 신라촌 동쪽의 봉황산鳳凰山 산마루에 있는 은행나무 아래에 비각으로 남는다.

“海上孤城草樹荒 바닷가의 외로운 성에는 초목이 황량한데

最先迎日上扶桑 제일 먼저 해를 맞아 부상에 오르네.

我來東望仍搔首 내가 동녘을 바라보노니 시름이 여전하네.

波浪遙應接故鄕 파도의 물결은 멀리 고향에 잇닿으리.

천태산의 산마루에서 해는 날마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떠오르고 있었지만, 신라인들의 흔적은 명나라 때에 이르러 고무지우개로 지우듯 가뭇없이 사라진다.

나라 건문(建文, 1399~1402) 연간, 나라 주체朱棣 정난지역靖難之役 발동했다. 전란은 4 남짓이 지속되며 거주莒州 일대는 백리 가도록 짓는 연기가 없었다. 거주는 시기의 행정지역으로, 천태산 북쪽의 지금의 거현莒縣 일대에 치소가 있었다. 천태산 사찰의 비각 비문도 건문 연간 산불이 불시에 일어나서 경서와 사원이 하루아침에 훼손되었다. 밝히고 있다. 신라촌 역시 무렵 전란과 산불로 인구가 분산되고 해체되었을 가능성이 십분 크다.

새로운 이주민들이 천태산 기슭에 끼리끼리 찾아온다. 씨의 족보에 의하면 그들의 선조는 전란이 끝난 건문 4 이후 동해 연운항連雲港에서 천태산으로 이주를 했다. 진씨 종족宗族 나중에 신라사의 옛터에 사찰을 중수하며 석봉사石鳳寺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신라사와 신라서원, 신라촌의 이름이 후세에 전해질 있은 것은 신라인들이 일부 천태산에 남아있었기 때문이 아닐지 한다. 어찌됐거나 이때부터 천태산에는 신라인에 대한 기록이 더는 나타나지 않는다.

천태산의 고찰에 얽힌 악연은 천년의 윤회를 반복하고 있었다. 나라 , 일조에서 향민鄕民 독일 천주교 교회 사이에 충돌이 생기며, 이를 진압하던 독일군이 천태산을 떠날 거국莒國 시조 제사비석과 정몽주의 시문비각 그리고 석봉사 재건비석 3점의 유물을 훔쳐갔던 것이다.

국씨가 미국에서 만났던 비석은 바로 거국 시조의 제사비석이었다.

촌락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상고시절의 신화는 천태산에 돌탑과 암석화, 석총으로 분명하게 남아있다.

천태산의 신라사는 더구나 비문에만 적혀있는 허망한 전설이었던가?…

드디어 특기할 만한 사실이 발견된다. , 산으로 통하는 길을 닦을 신라사의 부처 조각상이 골짜기의 모퉁이에서 발굴되는 것이다.

, 신라사는 흔적을 분명하게 천태산에 묻고 있었던 것입니다. 천태산에 전하는 천년의 전설은 허구가 아니라 진실한 실화였습니다.

승려를 따라 찾은 이야기 이런 제목으로 천태산의 비문에 적힌 삼국유사 이야기 말씀드렸습니다.

[퀴즈 한마당 코너]

MC: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먼저 지난달의 퀴즈 답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해마다 5 19일은 중국 관광의 입니다. 이날은 천대산 일기 시작된 날이라고 해서 생긴 명절인데요, 천대산의 일기 어느 책에서 나오는 글이겠습니까.

, 천대산의 일기 명나라 말기의 유명한 지리학자 서하객의 일기를 모아 만든 서하객 여행기 편입니다.

계속하여 이달의 퀴즈를 내어드리겠습니다.

법기사는 대륙 초기의 사찰인데요, 법기사는 어떻게 지어진 이름일까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법기사는 대륙 초기의 사찰인데요, 법기사는 어떻게 지어진 이름일까요.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16 중국 중앙방송총국 아시아아프리카지역 방송센터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

MC: ,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시간 진행에 임봉해(MC), 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 함께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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