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08 10:56:57 출처:cri
편집:朱正善

고산족의 역사

고산족은 중국 대만지역 남도어계 각 족군(族群)의 통칭이다.

고산족은 주로 중국의 대만성에 거주하고 있으며 소수가 복건성과 절강성 등 연해지역에 살고 있다.

2008년 인구집계에 따르면 고산족의 총 인구는 49만 4천여명에 달한다. 또 ‘중국통계연감-2021’에 따르면 중국 대륙의 고산족 인구는 약 3500명이다.

고산족은 자신의 언어가 있는데 남도어계 인도네시아 어족에 속하며 대체로 세가지 방언을 사용한다. 하지만 대륙에 산재하고 있는 고산족은 한어를 통용한다. 고산족은 본 민족의 문자가 없다.  

대만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의 문물 중에는 중국 복건성의 신석기문물들과 밀접한 연관성을 보이는 내용들이 있다. 고산족의 대를 이은 전통풍속 중에는 중국 화남 옛 문화의 특징을 보이는 부분이 많다. 예하면 태양과 뱀, 새에 대한 숭배, 홍수신화, 거주, 복장 등에서 유사성을 보인다.

고산족의 선민들을 2,3만년전 신석기시대의 ‘“재진인”’(在鎭人)이라고로 보는 견해가도 있다. 고산족의 기원에 대해 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만 비교적 일치한 주장은 내지의 연해 일대 고대 월족과 류큐제도,와 필리핀제도에서 온 주민들이 서로 융합되어 형성되었다는 설이 주를 이룬다.

 문헌기재에 따르면 한나라 때 대만을 ‘이주’(夷州)라고 부른 기록이 있다. 하지만 대만에 거주한 초기 민족의 호칭은 3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에는 이주인, 산이(山夷)라고 불렀있다.  그 후 ‘“수서’(隋書)”에서는 ‘“류큐토착인’”, 이라 했으며 송나라와, 원나라 때에는 ‘“류큐’(琉求)”, ‘“토착인’”으로 했다부르다가 명나라 때는 동번(東番), 청나라 때에는 ‘“토번’(土番)”, ‘“번족’(番族)”등으로 부르기도 했다.  일본이 대만을 강점했던 시기에는 ‘“번족’”, ‘“고사족”’(高砂族)등 모욕적인 호칭을 사용하였다.

고산족이라는 민족명칭은 항일전쟁이 승리한 후 조국 인민들이 대만 소수민족에 대한 중국 내지인들의 규범화된 호칭이라고 할수 있다. 고산족의 유래에 대해서는 남래설 즉 말레이시아에서 왔다는 남래설과 서래설 즉 중국대륙에서 왔다는 서래설, 자고로 옛 월인의 한 갈래가 말레이제도 및 류큐제도의 토착인들과 융합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 고산족은 민족구성이 복잡하고 갈래도 많은데 이로부터는 이들의 발내원지가 다르고 이주한 시간과 방식, 섬에 상륙한 장소도 서로 달랐음을 유추해보게 한다.   볼 수 있다.

과거에 고산족은 장시기 동안 원시사회발전단계에 있었다. 역사기재에 따르면 삼국시기 고산족의 선민들은 여러 부락으로 나뉘었고 부락성원들을 ‘“미린’”이라 불렀으며 공공사무는 부락성원들이 공동으로 관리했다. 돌도끼 등을 사용하면서 채집과 수렵위주의 생활을 했고 당시에는 목축업이 발달하지 않았다. 또 남자가 여자 집에 장가가는 혼인제도가 성행해 모계씨족사회단계에 처해 있었다. 기원 7세기에 이르러 농경과 목축업에 종사했으나 생산도구는 여전히 석기를 위주로 했고 철기는 적었다. 부락에는 추장이 있었고 과세가 없었으며 공공사무는 여전히 부락성원들이 관리했다. 법을 어기는 사람이 생기면 부락성원들이 관습법에 따라 공동으로 판결하는 방식을 취했는데 그 죄가 가벼울 때는 곤장을 때렸고 중할 때는 사형에 처했다. 문자가 없었고 역법을 사용할 줄 몰랐으며 산신과 바다신을 숭배했다.

당나라 때 남태평양의 말라이제도, 인도네시아, 필리핀, 일본 등 섬의 다른 인종과 부동한 혈통의 토착민족이 육속 대만섬에 이주해왔다. 이들은 오랜 세월동안 현지의 토착민 그리고 그들보다 먼저 온 ‘“백월”’족 등 군체들과 융합되면서 새로운 군체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북송과 남송, 원, 명, 청 여러 조대에 대만섬과 중국대륙간의 연계가 날로 늘었다.  진제(陳第)의 ‘“동번지’(東番志)” 등의 기재로 보면 당시 고산족은 농업과 목축업, 수렵에서 일정한 발전을 가져왔고 현지특산물로 대륙의 연해주민들과 교역을 진행했다. 대륙에서는 마노와 자기, 천, 소금,  구리, 비녀 등으로 고산족의 사슴가죽, 녹용 등을 교환했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볼 때 고산족의 여러 부락은 왕래가 적었고 순박한 생활을 유지했다.

17세기후부터 대량의 한족인들이 대만으로 이주해갔고 당시 대만을 장악한 정성공 정권이 고산족경제문화발전에 유리한 일련의 정책조치를 취함에 따라 고산족의 사회 및 경제발전이 탄력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서남부평원지대에 살던 고산족은 그 일부분이부가 봉건사회에 진입한니다.

16세기부터 대만의 고산족은 수차 외세의 침략을 여러번 당했다.

1563년에 왜구가 북부의 계롱일대에 쳐들어와 약탈을 감행하고 갖은 만행을 저지르자 현지의 고산족은 산간지역으로 이주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 후에는 네덜란드의 식민주의자들과 스페인의 식민주의자들, 미국과 일본의 침략자들이 대만에 쳐들어왔고 고산족인들은 치열한 저항을 진행하면서 고향 땅을 목숨으로 죽음으로써 보호하는 애국주의 정신을 보여주었다.

오랜 기간 동안 고산족과 한족은 함께 외세에 저항하면서 공동으로 대만을 개발하였다.

일본제국주의가 대만을 강점했던 50년간 섬주민들의 반항이 거셌다. 그 중1930년에 있은 봉기기의 규모가 가장 컸다. 1947년에는 대만섬의 한족들이 주축이 된 “2·28”봉기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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