朱正善
2022-02-03 18:32:59 출처:cri
편집:朱正善

우즈베크족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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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크족의 선민들은 소그드인, 마자테인, 호라즘인과 남하한 돌궐어사용군체가 융합되어 형성되었다. 고대의 소그드인은 주로 중앙아시아의 시르다리야강과 아무다리야강 유역 그리고 저라부쌍강 유역에 분포되었으며 이 지역은 하중(河中)지역이라고도 한다. 기원전 2세기에 알타이어계에 속한 돌궐인 부락이 지속적으로 중앙아시아지역으로 들어왔다. 이들이 현지 토착인인 소그드인 부락들과의 교류가 깊어지면서 점차 돌궐어를 사용하는 군체로 변화했다. 활동구역이 다름에 따라 이 부류의 사람들은 돌궐인,  부하라인, 페르가나인, 호라즘인, 사마르칸드인 등으로 호칭했다.

기원 874년에 중앙아시아의 소그드인이 사만왕조를 세우고 중앙집권제를 추진해 중앙아시아 역사상 최초의 통일왕조를 내왔고 고대 페르시아 문화와 이슬람문화가 아우러져 새로운 페르시아 문화를 형성했다. 이는 우즈베크족의 형성에 기반을 마련했다.

9세기 후 중앙아시아의 카를루크와 회골 등 돌궐인들이 남하하여 하중지역에 진입했고 카라한 왕조를세웠다. 카라한 왕조는 국력이 강했으며 기원 999년에 이란인의 사만왕조를 멸망시키고1004년에는 텐국을 멸망시킴으로써 강대한 중앙아시아제국을 형성했다. 이때 중앙아시아는 대규모의 돌궐화 과정을 시작했고 돌궐인과 이란인들이 상호 융합되고 돌궐문화와 페르시아 문화가 융합되면서 돌궐-페르시아-이슬람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카라한 왕조 집권기는 중앙아시아에서 봉건제도가 최종적으로 노예제를 대체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우즈베크족이라는 이 명칭은 기원 14세기 몽골제국의 4대한국(汗國)중의 하나인 킵차크한국의 돌궐출신통치자인 수단 무함마드 우즈베크한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원사(元史)”에서는 “웨지베”(月即別), “웨주보”(月祖伯) 등으로 불렀다. 킵차크한국은 우즈베크한의 치세에서 한동안 국력이 강성하여 “우즈베크한국”이라 불렀다.  그러나 얼마 후 기원14세기 중반부터 우즈베크한국은 권력다툼으로 내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기원 15세기에 킵차크한국이 멸망하게 되고 그 한 부분을 이루던 백장(白帳)한국이 강성해졌으며 그 통치범위내의 농민과 목축민들을 우즈베크인이라 부르기도 했다.

1451년 무함마드 시반니가 시반니한국을 세웠으며 당시 중앙아시아의 소택지지역 및 초원산림지대에 살던 돌궐부족들이 한국의 주요한 부락들이었다.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초까지 시반니칸이 우즈베크 유목민들을 이끌고 다년간의 정벌을 거쳐 강대한 부하라한국을 세우면서 하중지역과 페르가나강 유역에서 통치적 지위를 확립했다. 남하한 우즈베크족 유목민들은 현지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돌궐- 이란사르트족 주민들과 어울려 살면서 새로운 대 융합을 시작했다. 남하한 우즈베크인들의 언어가 현지 주민들과 비슷하거나 같았고 이들이 정치와 경제 등 분야에서 통치지위에 있었기에 이 시기는 전반 우즈베크족의 형성을 추진하게 되었다.

중앙아시아의 하중지역은 중국의 신강과 마주보고 있고 지리적 환경도 비슷했기에 경제와 문화적인 보완성이 강했다.  하여 오래전부터 우즈베크인들의 조상들은 중앙아시아에서 신강지역으로 이주하는 경우가 있었다.

14세기에 킵차크한국과 원나라는 대규모의 상업왕래가 있었다. 명나라 때에 쌍방의 이런 상업왕래가 더욱 번영했고 사절단을 상호 파견하고 관의 상단들이 늘 오갔다. 16세기부터 17세기까지 부하라, 사마르칸트 등 지역에서 동쪽으로 온 중앙아시아상인들은 중국 신강의 야르칸트(葉爾羌)를 필수경유지로 하면서 비단과 찻잎, 자기, 가죽 등 여러가지 특산물을 경영했다. 일부 상인과 상단은 아커쑤(阿克蘇), 투루판(吐魯番)에서 숙주(肅州)로 와서 화물을 중국내지에 팔았다.  이 과정에서 중앙아시아의 일부 상인들이 신강의 일부 도시들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18세기 초반 중앙아시아에서 신강으로 와 정착하는 우즈베크인들이 점점 늘어났고 그 거주지역도 신강 남부에서 북부로까지 확대되었다. 18세기 50년대 청나라는 준가얼을 평정하고 신강을 통일했으며 우즈베크인들을 주축으로 하는 부하라한국 등 나라들과 외교관계를 맺었고 그 후 6,70년간 우호적으로 지내왔다.  이 시기 사회가 안정되고 사회생산이 일정한 회복과 성장세를 보였으며 이는 우즈베크상인들과 중국 신강지역의 무역왕래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해 주었다.

우즈베크상인들이 가는 곳마다 부동한 규모의 거주지들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같은 노선을 따라 자주 오갔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고정 투숙지를 형성했다.  또 일부 상인들은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경우 이런 곳들에 장기 거주하면서 생업을 이어가고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면서 현지의 주민으로 되었다. 당시 우즈베크인이 비교적 집중된 거주지들로는 야르칸트, 아커쑤, 우루무치, 이리(伊利), 타청(塔城) 등이 있었다. 19세기 중반에 신강으로 이주해온 우즈베크인들 중에는 상인 외에도 농민과 목축민, 수공업자, 지식인, 성직자, 빈민 등이 있었다.

19세기 70년대 후반에 부하라한국, 코칸트, 히바 등 중소한국이 러시아에 병합되었다. 따라서 이런 지역의 우즈베크상인들의 무역왕래도 제정러시아와 중국 신강 간의 무역에 포함되었다. 상업무역도 점차 다양해져 장거리수송을 거친 물품들이 신강의 장마당에서 팔리는 외에 많은 이들은 가게를 세웠다. 당시 우루무치, 카스, 이리, 타청 등지에는 우즈베크상인들이 세운 양행(洋行)이라 불리는 가게들이 있었다.  이는 우즈베크상인들이 신강에서 정착하는데 조건을 마련했다.  이런 무역이 점점 발전함에 따라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크 근로자들이 육속 신강에 들어왔으며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이들 또한 현지에 정착했다. 이 기간 민주주의사상을 가진 우즈베크 지식인들이 제정러시아의 강압통치를 피해 신강에 들어온 경우도 있다. 이들은 그 숫자는 많지 않지만 자신들의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들 역시 중국 우즈베크족의 한갈래라고 볼 수 있다.

1차 세계대전기간과 그 후의 상당히 긴 시기에 중앙아시아지역은 전란이 지속되고 자연재해가 연속적으로 발생했으며 일부 주민들이 타향이나 외국으로 살길을 찾아 떠났다.  중국 신강 지역은 이미 우즈베크인들이 정착해 살아온 역사적 기반이 있었기에 혈연적 관계나 사회적 연계가 있던 우즈베크인들이 신강에 와서 정착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20세기 30년대에 이르러 신강에 이주하는 우즈베크인은 상인으로부터 사회 여러 계층으로 확대되었다. 그 중에서 도시에 정착한 이들은 주로 상업이나 수공업, 교육, 의료 등 업종에서 일했고 농업, 목축구에 정착한 이들은 위구르족, 카자흐족 등 다른 민족들과 함께 과일,화훼재배와 농업, 목축업에 종사했다. 이런 공동의 생산과 생활 실천속에서 여러 민족들간의 내왕과 이해가 깊어지고 이는 또 여러 민족간 경제문화의 공동발전을 한층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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