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9-14 18:06:04 | cri |
(사진설명: 아름다운 유원촌)
개관:
700여 가구에 2,000 여 명이 주거하는 유원(兪源)촌은 태극 성상도(太極 星象圖)에 근거해 마을의 구도를 설계했다. 유원촌은 중국에서 신비로운 도교의 색채를 가진 유일한 마을이다.
유원촌이 태극 성상도에 근거해 구도를 배치했다면 곽동(郭洞)촌은 <내경도(內經圖)>에 근거해 마을을 기획했다. 명나라와 청나라 때의 건물들이 잘 보존된 곽동촌에는 자갈을 깐 도로가 질서정연하고 양쪽에 청색의 벽돌에 검정 기와로 된 고건물들이 산재해 장관이다.
정(鄭)씨 출신이 모여 사는 정의문(鄭義門)은 강남의 첫 가문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역사상 절강성 포강(浦江)현의 정씨가문은 효로 가문을 관리하여 송나라와 원나라, 명나라 3대 왕조에 15대에 걸쳐 3천여명이 함께 사는 마을을 형성함으로써 명나라 개국황제 주원장(朱元璋)에 의해 "강남의 첫 가문"이라는 명칭을 하사 받았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유원촌)
주요명소: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유원촌은 이름 그대로 유(兪)씨 자손들의 발원지이고 유원촌은 현재 중국에서 규모가 가장 큰 유씨 집거지이다. 전한데 의하면 남송(南宋) 때 항주(杭州) 출신인 유의(兪義)가 부친의 영구를 호송해 항주로 가던 중 이 곳에 이르렀다.
이 곳에서 하루 밤을 보내고 이튿날 다시 길을 떠나려고 하는데 시냇물 가에 둔 부친의 영구에 등나무 덩굴이 가득 덮여 있었다. 유의는 이 곳이 신이 정해준 곳이라고 생각해서 항주로 가지 않고 이 곳에 부친을 묻고 이 곳에 터를 잡았다.
(사진설명; 유원촌의 물길)
유원촌은 유씨의 제5대 손인 유래(兪淶)부터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유래는 당시의 명(明)나라 어사(御史)를 지낸 유백온(劉佰溫)과 교분이 깊었고 <유씨 가족 족보>에도 유백온의 글이 적혀 있다.
1349년 유백온이 유래를 만나기 위해 유원촌을 방문했다가 마을에 가뭄과 큰 물 재해가 번갈아 들고 역병이 성행해 살기 힘든 것을 보고 동구 밖을 곧게 흐르는 물길을 굽게 바꾸고 마을의 구도를 태극 성상도에 근거해 다시 설계했다.
그는 마을 주변의 11개 산마루를 활용해 황도 십이궁을 설계하고 마을에 태극하(太極河)를 만들었으며 건물은 이십팔수에 의해 지었다. 지금 유원촌의 구도는 그 때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다.
(사진설명: 유원촌의 물길)
사면이 산인 유원촌은 북쪽에 작은 입구가 나 있어서 멀리서 보면 마치 배가 불뚝 튀어나오고 입구가 작은 물병을 방불케 한다. 남동쪽에서 마을에 흘러 드는 시냇물의 물줄기와 남쪽에서 마을에 흘러 드는 시냇물이 마을에서 만나 북쪽으로 마을을 흘러 나간 후 마을 입구에서 S자 모양을 만들며 밭 사이를 흐른다.
S자 모양의 물줄기와 주변의 산, 들판이 마을에 거대한 태극무늬를 그린다. 유원촌은 "천강(天罡) 이십팔수(二十八宿)와 황도(黃道) 십이궁(十二宮)'에 근거해 마을의 구도를 배치했고 동구 밖의 태극무늬는 십이궁의 첫 번째 별자리를 대표하며 나머지 11개 별자리는 마을 주변의 11개 산마루로 대신한다.
마을을 경유하는 시냇물은 마을을 두 부분으로 나누고 마을에 산재한 7개의 연못은 "북두성(北斗星)"을 대표하며 유씨의 사당이 바로 이 별자리 안에 위치한다.
(사진설명: 유원촌의 일각)
마을의 건물들도 모두 "이십팔수"에 따라 지어져 전문가들은 유원촌이 천체 성상도를 완벽하게 구현한, 동양의 기이한 경관이라는 높은 평가를 아끼지 않는다.
자자손손 선비가문이 살아오는 유원촌은 풍부한 문화적 함의를 내포하고 있으며 역대로 과거시험에 급제한 선비도 적지 않다. 명나라와 청나라 때 이 곳에서 난 상서(尙書)와 대부(大夫), 진사(進士), 지현(知縣), 거인(擧人)등 벼슬길에 오른 사람들이 260여명에 달한다.
현재 유원촌에는 송나라와 원(元)나라, 명나라, 청나라 4대 왕조때 축조한 상이한 특징의 고건물 395채, 1072칸이 남아 있다. 유원촌의 건물들은 대부분 남쪽을 향하고 있어 건물의 내부가 밝고 화사하다.
건물과 홀, 누각, 뜰, 절 등 다양한 용도의 건물을 보유한 유원촌은 큰 규모를 자랑하고 고건물들 속 곳곳에서 용의 이미지를 찾아볼 수도 있어 더욱 신비롭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곽동촌)
2천명에 가까운 촌민들이 아직도 고건물에 주거하는 곽동촌 곳곳에서 명나라 때의 소박한 기둥과 청나라 때의 정교한 조각, 서양풍격의 영향을 받은 중화민국(中華民國)시기의 창틀을 볼 수 있다.
넓은 면적의 고건물 속에 큰 규모의 명문가 저택은 많지 않지만 마을과 건물이 완전하게 보존되어 곽동촌은 명나라 때부터 청나라, 중화민국 시기에 이르는 건축사라고 할 수 있다.
곽동촌은 "뭇 산의 품속에 안긴 넓은 공간 같고, 아늑함이 동굴과 같다'고 해서 곽동이라 이름한다. <무의현지>에 의하면 곽동촌의 역사는 송나라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본격적인 개발은 원(元)나라 때 시작되었다.
(사진설명: 곽동촌의 일각)
하(何)씨 가문의 족보에 의하면 1350년 무의출신인 하수지(何壽之)가 외할머니를 보러 곽동촌에 이르렀다가 고목이 울창한 첩첩산중에 맑은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아름다운 마을에 매료되어 이 곳에 눌러 앉을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뒤에 그는 조부와 외조부, 부모의 동의를 거쳐 곽동촌에 집을 짓기 시작했으며 그로부터 640여년동안 하씨의 자손이 번창해 일족이 많은 명문가를 만들었고 곽동촌은 오늘날 하씨 중심의 구도가 형성되었다.
문헌의 기록에 의하면 곽동촌은 <내경도>에 근거해 구도를 설계했다고 한다. 곽상(郭上)과 곽하(郭下) 두 마을로 분류되는 곽동촌은 지세부터가 특이하다.
(사진설명: 곽동촌의 건물)
삼면에 산이 둘러서고 북쪽에 트여져 있으며 탁 트인 북쪽으로 멀리에 오른쪽과 왼쪽에 청산이 마주해서 "사자와 코끼리가 문을 지키는"모양을 방불케 한다.
마을에서 합류한 두 갈래의 시냇물은 서쪽으로 마을을 빙 둘러 흐르고 물위에는 회룡교(回龍橋)가 놓여져 좋은 풍수를 형성한다. 십 리 밖에 솟은 석창령(石蒼嶺) 산 위에 세운 탑이 마침 이 회룡교과 일직선 상에 놓여 풍수에 대한 옛 사람들의 고심을 읽을 수 있다.
회룡교 옆의 용산(龍山)에는 6,7백년 수령의 고목이 울창하게 숲을 이루고 고목들 사이에는 귀중한 수종도 많아서 대표적인 고대 생태계의 숲을 형성한다.
(사진설명: 곽동촌의 일각)
송나라 후반과 원나라 초반에 정덕장(鄭德璋)이 가문의 무장을 갖추고 동명(東明)서원을 세웠으며 <정씨규범(鄭氏規範)>을 편찬해 정씨가문을 중국 역사상 유교사상을 가장 잘 구현한 명문가가 되게 했다.
"강남의 제일 가문"은 정의문이라고도 불리며 따라서 마을 이름도 정의문이라 한다. 정의문의 건물들은 모두 정씨 사당건물을 중심으로 지어져 있다.
서쪽을 향한 정씨 사당건물의 정문은 바로 거리와 연결되고 남쪽을 향한 옆문에 "강남 제일 가문"이라는 액자가 걸려 있다. 앞쪽에서 뒤로 가면서 다섯 개의 뜰을 거느린 사당의 가장 앞쪽에는 사검청(師儉廳)이 있고 순서에 따라 그 뒤에 중청(中廳)과 유서당(有序堂), 효우당(孝友堂)이 있으며 제일 뒤에는 침실이 위치한다.
60여 채의 건물을 거느린 사당은 가장 완전하게 보존된 고대 중국의 가문 사당이다. 굵은 기둥이 많은 것으로 유명한 정씨 사당에는 원나라 재상이 쓴 "백린계(白麟溪)" 비석과 명나라 황제들이 하사한 어필로 된 "효의가(孝義家)"와 "효의당(孝義堂)" 등 액자들이 보존되어 정의당의 높은 위상을 보여준다.
(사진설명: 곽동촌의 일각)
키워드:
고건물, 역사인문
위치와 교통:
유원촌은 절강(浙江, Zhejiang)성 무의(武義, Wuyi)현에 위치, 다양한 교통편으로 항주(杭州, Hangzhou)에 이른 다음 온주(溫州, Wenzhou)행 열차를 이용, 무의에서 하차한다.
열차로 항주에서 무의까지 5시간이 소요, 혹은 항주에서 무의를 오가는 시외 버스를 이용해도 된다. 무의에서 유원촌까지는 직행 시내 버스가 있어서 편리하게 오갈 수 있다.
곽동촌은 절강성 무의현에 위치, 항주에서 온주행 열차를 이용, 무의에서 하차, 무의에서 곽동촌행 버스를 바꾸어 탄다. 혹은 항주에서 무의행 시외버스를 이용해도 된다.
정의문은 절강성 금화(金華, Jinhua)시 포강(浦江, Pujiang)현에 위치, 다양한 교통편으로 금화시에 이른 다음 금화에서 포강행 버스를 바꾸어 탄다. 항주에서 금화까지 고속철도가 운영되어 3시간내에 도착이 가능하다
(사진설명: 유원촌의 조각)
계절:
1년 4계절
설명:
유원촌과 곽동촌, 정의문은 모두 절강성의 금화시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항주에서 금화시까지 고속철을 이용한 다음 금화시에서 차량을 대절해서 여러 명소를 오가면 자유롭게 많은 명소를 볼 수 있다.
220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금화시는 절강성 중부의 산악지대에 위치하고 따라서 산중에 산재한 고대의 마을들도 아주 많다. 유원촌과 곽동촌, 정의문을 제외하고도 금화시에는 제갈공명의 자손들이 모여 사는 제갈촌(諸葛村)을 망라해 다른 볼거리도 적지 않다.
(사진설명: 유원촌의 건물)
번역/편집: 이선옥 korean@cri.com.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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