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04 11:13:51 | cri |
(사진설명: 아름다운 당월촌)
개관:
당월(棠樾)의 패방(牌坊)은 안휘에서 가장 유명하다. 7개의 패방이 모여 소박하면서도 우아하고 장엄해 보는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당월의 패방은 앞쪽에서 뒤로 가면서 차례로 "충성과 효도, 절개, 의리"를 보여준다.
"인간중심"의 인문역사를 보여주는 동시에 안휘 상인들의 집단인 휘상(徽商)의 역사를 대변하기도 하는 패방은 패방마다 모두 감동스러운 스토리를 담고 있고 청나라 건륭(乾隆)제에게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사진설명: 당월촌의 패방)
역사:
당월은 과거에 당월(唐越), 자효리(慈孝里)이라고 불렀으며 당나라 초반에 포안국(鮑安國)이 거금을 들여 현지의 어려운 사람들을 도운 공으로 당고조(唐高祖)로부터 "당월국공(唐越國公)'에 봉해졌다.
따라서 그들이 사는 마을을 당월(唐越)이라 했고 그 뒤에 당월(棠樾)로 개명해서 오늘날에 이른다. 당월촌에 모여 사는 포씨가문은 안휘의 명문가로 역대로 많은 명인들이 났으며 그들의 공덕을 기리는 패방도 많이 지었다.
(사진설명: 당월촌의 패방)
명나라 때인 1420년 명나라 황제의 어명으로 국고에서 받은 은으로 자효리방(慈孝里坊)를 축조했고 그 뒤에 청나라 때까지 수차에 걸쳐 보수했다.
명나라 때인 1552년부터 1567년까지 사이에 포찬방(鮑燦坊)을 축조, 1622년에 포상현(鮑象賢)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포상현방(鮑象賢坊)을 축조했다.
청나라 때인 1768년에 포문연처방(鮑文淵妻坊), 1784년에 포문령처방(鮑文齡妻坊), 1797년에 포봉창방(鮑逢昌坊), 1820년에 낙선호시방(樂善好施坊)을 축조했다.
(사진설명: 당월의 패방)
주요명소:
산이 많은 안휘에는 경작지가 적어서 먹고 살기가 힘들었고 그러면서 안휘 출신의 사람들은 타지에 나가서 장사로 부를 창출했으며 그러는 과정에 휘상(徽商)이라는 안휘의 상인 집단을 형성했다.
휘상은 명(明)나라와 청(淸)나라 때 최고의 번성을 이루었고 그들은 고향에 돌아와 고향을 건설하거나 벼슬길에 올랐다. 안휘는 이학(理學)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휘상은 고향에 사당을 짓고 정원을 조성했으며 저택을 건설했다.
그들은 이와 동시에 마을에 종법제도를 고양하는 취지의 건축물과 학교를 세우고 다리를 놓았으며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패방이다.
(사진설명: 가까이에서 본 패방)
당월의 7개 패방 중 3개는 명나라 때 축조했고 나머지 4개는 청나라 때 세웠다. 과거 패방은 숭고한 명예를 대표하는 축조물이었고 당월의 패방은 대부분이 황제가 당월촌민들의 "충성과 효도, 절개, 의리"를 높이 본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당월의 7개 패방은 서로 다른 시기에 축조되었지만 모두 안휘의 석각풍격을 잘 보여준다.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7개의 패방이 군락을 형성해 돌에 한 시대의 지역문화 특색을 기록한 것이다.
중심선 양쪽이 엄밀하게 대칭되는 패방은 사람들에게 안정적인 느낌을 주며 눈길이 닿는 곳에는 정성을 들인 조각물이 즐비하다. 주변에 다른 축조물이 없고 넓은 밭이 펼쳐져 패방은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사진설명: 패방과 마을)
멀리서 패방을 바라보면 패방은 밭과 나무, 연못, 하천, 다리 등과 어울려 아름답고 완벽한 동구 밖 경관을 형성하며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고대 마을을 잘 살린다.
당월의 패방은 모양은 목조 패방을 모방했으나 모두가 질이 좋은 흡(歙)현의 청석으로 되어 있고 못이나 리벳 하나 사용하지 않고 돌과 돌을 교묘하게 쌓아 축조했다.
당월촌 촌민 포찬이 어머니에게 효도한 것을 기리기 위해 세운 포찬효행방(鮑燦孝行坊)은 기둥이 4개이고 패방의 너비는 9.45m, 높이 8.86m, 깊이가 3.54m에 달한다.
(사진설명: 패방의 조각)
패방의 정면에 "성지(聖旨)"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황제의 어명으로 패방을 세웠음을 보여주며 대들보의 앞뒤에는 정교한 사자가 새겨져 있다. 포찬은 부모에게 효도한 동시에 자식도 잘 교육해 황제의 어명으로 패방을 세우게 되었다.
너비 8.57m, 높이 9.6m, 깊이 2.53m에 기둥 4개의 자효리방(慈孝里坊)에는 "어제(御製)"와 "자사리(慈寺里)"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 패방도 송나라 말 포씨 부자를 위해 황제의 어명으로 축조했다.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당월촌의 한 포씨 부자가 반군에 포로가 되었고 반군이 둘 중 한 명의 목을 베기로 하고 누가 죽고 누가 살지를 선택하라고 했다.
(사진설명: 패방의 편액)
포씨 부자는 서로 자신이 죽고 상대방을 살게 해달라고 해서 하늘을 감동시켰고 반군마저도 차마 그들을 죽이지 못했으며 그 뒤에 조정이 그들을 표창하기 위해 이 패방을 짓도록 했다는 기록이다.
그 뒤에 명나라 영락(永樂)황제가 이 일을 알고 자효시(慈孝詩)를 지었으며 청나라 건륭(乾隆)황제도 강남에 이르렀다가 "자애로움과 효도는 이 세상에 유일무이하다"고 치하하고 보수용 자금도 주었다.
자효리방은 수차에 걸쳐 보수할 때마다 역대 황제들의 시나 평가를 패방에 새겨 그 과정을 기록했다. 중국에서 자효리방처럼 여러 황제의 칭찬을 받은 패방은 그렇게 많지 않다.
(사진설명: 당월촌의 낙선호시방)
낙선호시방(樂善好施坊)은 너비가 11.82m, 높이 11.7m, 깊이 2.85m이다. 네 개의 기둥에는 아무런 무늬도 새기지 않고 대들보에만 꽃무늬를 새겨 이색적이다.
이 패방은 소금장사로 부자가 된 포숙방(鮑淑芳)이 황하(黃河)와 회하(華夏)강에 홍수가 질 때마다 거금을 헌납하고 고향에 사당을 짓고 학교를 세우며 다리를 놓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준 것을 표창하기 위해 세웠다.
포문연계처오씨절효방(鮑文淵繼妻吳氏節孝坊)은 포문연의 아내 오씨의 선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패방이다. 22살에 포문연에게 시집을 온 오씨는 29살에 남편을 잃고 전처가 남긴 아들을 친 자식처럼 키웠으며 시부모에게 효도해 마을 사람들과 지방관리를 감동시켜 이 패방을 받게 되었다.
(사진설명: 당월촌의 패방)
포봉창효자방(鮑逢昌孝子坊)은 이름 그대로 효자인 포봉창을 표창하기 위해 세운 패방이다. 기록에 의하면 포봉창의 부친이 명나라 후반에 전란을 피해 고향을 떠나 다년간 소식이 없었다.
청나라 때인 1646년 14살이 된 포봉창은 부친을 찾아 나섰고 안휘에서 천리 너머 떨어진 감숙(甘肅)의 한 절에서 병을 앓고 있는 부친을 찾아 병을 치료한 뒤 집으로 모셔왔으며 집에 오니 또 모친이 병환에 있어서 유명한 의사를 찾아 다니며 모친의 병을 치료했다.
포상현상서방(鮑象賢尙書坊)은 벼슬길에 올라 1529년에 진사가 된 포상현이 직위가 병부우시랑(兵部右侍郞)에까지 이르고 운남(雲南)에 가서 나라를 지켰다고 해서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운 패방이다.
(사진설명: 당월촌의 돈본당)
패방의 주변에는 또한 사당건물과 가옥, 정자, 누각 등이 산재해 아름다운 넓은 들판을 배경으로 유구한 역사와 풍부한 인문을 직관적으로 잘 보여준다.
포씨 가문의 사당인 돈본당(敦本堂)은 일명 "남사(男祠)'라고도 한다. 명나라 때인 1522년에 병부우시랑을 지낸 포상현이 은퇴하고 고향에 돌아와 포씨가문의 8세조 경운공(慶雲公)을 위해 이 사당을 지었다.
문루는 높은 오봉루(五鳳樓)이고 의문(儀文)도 다양하게 장식했으며 문밖에는 정교한 벽돌조각이 즐비한 담을 쌓았다. 웅장한 기세로 포씨가문의 화려함을 보여주는 돈본당은 가는 기둥에 굵은 대들보가 이색적이다.
(사진설명: 당월촌의 포가화원)
사당에는 "자애로움과 효도는 유일무이하고 아름다움은 강남에서 최고"라고 한 청나라 건륭제의 글을 비롯해 여러 황제들이 써준 글을 새긴 비석 17점이 소장되어 당월촌과 포씨가문의 눈부신 어제를 보여준다.
이밖에 당월촌에서는 여자사당인 청의당(淸㦤堂)도 빼놓을 수 없는 명물이다. 여사(女祠)라고도 불리는 청의당은 당월촌 출신이고 소금을 경영하는 휘상의 대표인 포씨가문의 24세조 포계운(鮑启運)이 포씨 가문 여성들의 희생정신과 기여를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포가화원(鮑家花園)은 포씨가문의 24세조 포계운이 청나라 때 조성한 정원이다. 고대 안휘의 정원과 분재를 접목한 포가화원은 소주(蘇州)의 정원인 졸정원(拙政園)과 유원(留園), 사자림(獅子林)과 비견하는 정원이다.
(사진설명: 당월촌의 청의당)
키워드:
고건물, 역사인문
위치와 교통:
당월은 안휘(安徽, Anhui)성 흡현(歙縣, Shexian), 둔계(屯溪, Tunxi)에서 25km거리에 위치. 다양한 교통편으로 안휘 성도 합비(合肥, Hefei)에 도착한 후 흡현행 버스를 이용한다.
혹은 항공편을 이용해 황산시 둔계공항에 내린 다음 흡현 행 버스를 이용하거나 철도를 이용해 흡현에 도착해도 편리하게 명소를 오갈 수 있다.
(사진설명: 당월촌의 봄)
계절:
봄과 가을
설명:
석조 패방의 마을 당월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거리를 가진 둔계(屯溪)와 가깝다. 여러 갈래의 거리와 골목을 거느린 둔계에는 패방을 망라해 남송(南宋)과 명청(明淸)시기의 고건물이 많다.
여건이 되면 시간을 많이 할애해서 패방의 마을 당월촌과 살아 있는 "청명상하도(淸明上下圖)"라 인정되는 둔계도 함께 보면 안휘의 문화를 더욱 잘 느낄 수 있다.
번역/편집: 이선옥 korean@cri.com.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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