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04 17:30:09 | cri |
(사진설명: 아름다운 부용진)
개관:
쌀두부의 마을 부용진(芙蓉鎭)은 마을 곳곳에 고상가옥이 운치를 자랑하고 건물들 사이에 반들반들한 돌이 깔린 거리와 골목이 펼쳐져 있는 호남 서부의 대표적인 고대 마을이다.
2천 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부용진은 입구에 웅장한 폭포가 있어서 "폭포 위의 천 년 고도"라고도 부르며 호남 서부의 4대 유명 도시, "미니 남경(南京)"의 미명도 가진다.
아름다운 경치와 유구한 역사를 가진 부용진은 원래 왕촌(王村)이라 불렀는데 영화 <부용진>이 이 곳에서 촬영되어 인기리에 방영되면서 마을의 이름도 부용진으로 바꾸게 되었다.
(사진설명: 멀리서 본 부용진)
역사:
기원전 202년의 한(漢)나라 때 왕촌은 유양현(酉陽縣)에 속했고 서기 219년에 동오(東吳)에 속했으며 수(隨)나라 때인 589년에 신주(辰州)에 속하고 청(淸)나라 때인 1729년에 영순현(永順縣)에 속했다.
1986년 왕촌에서 영화 <부용진>이 촬영되고 영화가 인기리에 방영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왕촌을 찾았고 2007년 현지 정부는 왕촌의 관광업 발전을 위해 부용진 혹은 왕촌 부용진이라 개명했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부용진)
주요명소:
삼면이 물이고 한 쪽으로 산을 업은 부용진에는 현재까지도 오랜 세월 동안 바닥이 반들반들해진 돌길이 펼쳐져 있고 거리와 골목의 양쪽에는 고상가옥들이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부용진 최고의 명물은 속이 빈 구리 기둥 계주동주(溪州銅柱)이다. 서기 940년 초왕(楚王) 마희범(馬希范)과 계주 칙사(勅使) 팽사수(彭士愁)가 다년간의 전쟁을 끝내고 동맹을 맺으면서 그 증거물로 구리 5천 근으로 기둥을 주조하고 기둥에 전쟁의 과정과 평화를 맺은 과정을 기록했다.
고대 중국에서 구리 기둥은 분계선을 나타내는 표지이다. 초왕과 계주칙사가 강화조약을 맺고 주조한 계주동주는 처음에 초나라와 계주간 분계선에 세워졌다.
(사진설명: 부용진의 구리기둥)
무게 2500kg의 구리 기둥은 높이가 4m이며 속이 비어 있는 팔각형이며 상단에 구리로 된 지붕을 덮고 있다. 오랜 세월을 거쳤지만 반들반들한 기둥에 새겨진 글자는 오늘날까지도 또렷하게 보인다.
유수강가에 세웠던 계주동주는 강의 상류에 댐을 축조하면서 물에 잠기게 되어 1969년 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대 도시 왕촌에 옮겨져 현재 부용진 민속관에 소장되어 있다.
토가(土家)족들이 모여 사는 부용진에서는 2.5km 길이의 돌 길 석판가(石板街)도 명물이다. 수 천 년 동안 부용진과 함께 해 온 이 거리는 유수의 나루터에서 시작해 산발을 따라 꼬불꼬불 펼쳐져 있고 거리의 양쪽에는 토가족들의 고상가옥이 즐비하다.
(사진설명: 부용진의 돌길)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청나라 때 부용진에는 560여 개의 가게가 집중되고 매일 세상 곳곳의 상인들이 밀려와 부용진은 "미니 남경"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오늘날 어제의 번창함을 보이지 않지만 오래된 거리의 양쪽에 온갖 기념품을 경영하는 가게들이 있고 그 사이로 가끔 부용진의 특색이 다분한 쌀두부를 파는 가게도 있어서 운치를 돋운다.
유수의 나루터, 석판가의 시작에 서서 올려다 보면 부용진의 웅장한 폭포와 아찔한 벼랑 위에 자리잡은 마을이 한 눈에 안겨오며 돌 길을 따라 마을로 향하면 마치 영화 속에 들어선 듯 착각하게 된다.
(사진설명: 부용진의 폭포)
부용진에 들어서면 첫 명소가 바로 부용진 폭포이다. 부용진을 경유해 흘러 내리는 이 폭포는 호남 서부에서 규모가 가장 큰 폭포로 높이가 60m, 너비 40m에 달한다.
두 단계로 나뉘어 쏟아지는 폭포는 자욱한 물보라를 형성하고 우레 같은 소리를 내서 십 리 밖에서도 폭포의 소리가 들린다. 봄과 여름이 되면 물량이 많아 물안개 자욱하고 무지개가 비껴 그 속의 부용진은 "폭포 위에 있는 고도'라 불리기도 한다.
폭포의 옆에는 토왕행궁(土王行宮)이 유난히 눈길을 끈다. 과거 토사왕조의 왕궁이었던 이 행궁의 한 쪽은 아찔한 낭떠러지이고 건물의 앞으로는 시냇물이 졸졸 흐르다가 벼랑을 날아 내리며 폭포를 만든다.
(사진설명: 폭포와 행궁)
910년 팽사수는 토사왕조(土司王朝)를 세우고 계주 왕촌에 도읍을 정하고 유양궁(酉陽宮)을 지었다. 1135년 도읍을 영순(永順)의 노사성(老司城)으로 옮기면서 유양궁은 역대 토사왕(土司王)들이 여름에 머무는 피서행궁이 되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존속해온 소수민족 왕조인 토사왕조는 818년동안 존속했고 도합 28대의 35명 토사왕이 권력을 승계했다. 오늘날 이 행궁에는 동굴에서 보는 물의 주렴, 처마에서 떨어지는 폭포 등 기이한 경관을 볼 수 있다.
피서행궁 외 부용진의 다른 건물들은 모두 적각루(吊角樓)라고 하는 고상가옥이다. 지혜로운 토가족들은 평지가 거의 없는 산악지대에 살면서 산비탈과 물가에 집을 지을 수밖에 없었고 그러면서 건물이 지면과 떨어져 기둥 위에 있는 고상 가옥을 고안해 냈다.
(사진설명: 부용진의 일각)
고상 가옥의 한 쪽은 지면과 붙어 있고 다른 삼면은 지면과 떨어져 있으며 건물하단의 기둥들이 건물을 지탱한다. 통풍이 잘 되고 건조하며 독사나 야수도 방어하기에 좋은 이런 고상 가옥들은 남부의 산악지대에서 특히 적합하다.
부용진의 폭포 옆에는 과거 토인(土人)이 살았던 동굴 유적지가 있다. 현지의 왕(王)씨 족보에 의하면 먼 옛날 진(秦)나라의 난을 피해 사람들이 이 곳에 이르러 맨 발에 동물의 가죽을 몸에 걸치고 동굴에서 사는 토착민들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들이 바로 오늘날 부용진 토가족들의 조상이라고 전해진다. 난을 피해 온 사람들은 토착민들이 착하고 근면한 것을 보고 그들과 함께 살면서 이 곳을 경영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오늘날의 부용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사진설명: 폭포뒤에서 본 행궁)
키워드:
민속, 풍경, 역사인문
위치와 교통:
부용진은 호남(湖南, Hunan)성 상서(湘西, Xiangxi) 토가(土家)족 묘족 자치주 영순(永順, Yongshun)현에 위치, 다양한 교통편으로 장가계(張家界)에 이른 다음 장가계 버스 터미널이나 장가계역에서 부용진행 버스를 바꾸어 탄다.
장가계에서 부용진까지는 1시감 30분이 소요되고 길수(吉壽)에서는 부용진까지 60km, 버스로 2시간이 소요되며 봉황고성에서는 부용진까지 3시간이 소요된다.
(사진설명: 부용진의 쌀두부집)
계절:
1년 4계절
설명:
영화 <부용진>은 한 여인이 쌀두부를 만들어 팔면서 부를 창조하지만 정치운동에서 피해를 받고 그러는 과정에 역시 피해를 받는 남 주인공과 사랑하면서 함께 좋은 세상을 기다리는 이야기로 엮어졌다.
이 영화에서 나오는 쌀두부가 바로 부용진의 음식이다. 쌀을 물에 갈아서 소금물과 함께 삶아서 냉각시키면 하얀 두부 모양의 음식, 쌀두부가 만들어진다.
(사진설명: 부용진의 일각)
쌀두부를 먹을 때는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서 그릇에 담고 야채와 새콤한 대두와 땅콩, 돼지고기와 닭고기 등을 올린 다음 소금과 다시다, 참기름, 콩장, 고춧가루, 후추가루로 끓인 국물을 두고 다진 파와 간장 등 양념으로 버무린다.
쌀두부는 영양분이 많이 함유되고 새콤하면서도 짠 맛이 나며 체내의 독소를 배출하는데도 도움이 되어 미용에 좋은 이유로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한 몸에 차지한다.
부용진의 거리에는 쌀두부집이 적지 않고 심지어 영화 <부용진>의 여 주인공이 만들었다는 쌀두부집도 하나가 아니다. 그 중 가장 정통 쌀두부집은 패방(牌坊) 근처의 쌀두부집이라고 알려져 있다.
(사진설명: 부용진의 입구)
부용진의 주변에는 가장 아름다운 중국의 소도시 봉황고성(鳳凰古城)과 바위산이 아름다운 장가계(張家界), 묘(苗)족의 마을 건주고성(乾州古城), 토사왕조의 도읍 노사성 등 많은 볼거리가 있다.
부용진을 관광하고 주변의 명소를 함께 보려면 시일이 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숙박할 장소를 찾아야 하는데 부용진에 숙박하면서 주변을 보는 것이 좋다.
부용진에는 호텔도 있지만 그보다도 민박이 더 운치 있다. 부용진의 민박은 대부분 석판가의 양쪽이나 물가에 있어서 환경이 좋고 가격이 착하며 정갈하고 깨끗하다.
번역/편집: 이선옥 korean@cri.com.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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