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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타임]명인의 발자취를 따라서- 웅희령옛집
2016-03-25 15:50:31 cri

살랑살랑 바람이 꽃내음을 싣고 불어와 봄소식을 전합니다. 새싹이 돋아나고 꽃이 망울을 터뜨리는 자연의 그 신기함과 아름다움에 우린 그저 넋놓고 마음껏 감상할 뿐입니다. 요즘 위챗 모멘트를 보면 온통 꽃구경 사진으로 도배되고 있는데요, 새봄을 맞아 싱숭생숭해질 무렵 오늘 명인의 발자취를 따라서에서는 여러분과 함께 봉황고성(鳳凰古城)에 있는 웅희령(熊希齡)옛집을 찾아 떠나보려고 합니다.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도시로 알려진 봉황고성은 험한 산과 계곡을 지나야 만날 수 있는 오지로 문학가인 심종문(沈從文)의 소설 "변성(邊城)"에 등장합니다.

호남성 호서자치주(湖西自治州)에 위치한 봉황고성은 중국 제101번째 국가역사문화명성으로 풍경이 수려하고 역사가 유구합니다. 더욱이 이곳에서는 많은 명인이 배출되었습니다. 잘 알려진 작가 심종문 외에도 1913년 중화민국(民國) 제1대 총리(總理)에 선출된 유명한 교육가, 자선가 웅희령을 꼽을 수 있습니다.

봉황고성 북문성가(北文星街)의 작은 골목에 위치한 웅희령옛집은 부지면적이 800평방미터로 본채, 거실, 주방으로 구성된 단층건물입니다. 이 건물은 전형적인 묘족 고대건물구조로 묘족 정취가 다분합니다. 정문 상단에는 웅희령옛집 편액이 걸려있고 양옆에는 웅건한 필력과 뚜렷한 글씨체로 적힌 대련(對聯)이 보입니다. "일생 진심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중화의 진흥을 바랬으며, 반평생 자선(慈善) 학교를 꾸려 민족을 위해 인재를 양성했노라."고 적힌 대련은 평생 나라와 백성의 운명을 걱정하고 중화민족의 인재 양성에 심혈을 기울인 웅희령의 일생을 개괄해주고 있습니다.

본가 정문에 들어서면 왼쪽켠에 10여 평방미터 되는 객실이 있고 가운데 작은 마당에는 동전들이 깔린 물항아리가 놓여져 있습니다. 이 마당을 둘러싸고 곁채들이 세워져 정방형 구조를 이루고 있는데요, 이 옛집의 문과 창, 벽은 대부분 나무구조로 되었고 그 위에 꽃이나 각가지 도안들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마당 동쪽에 있는 땔나무 창고에는 맷돌, 방아 등 농기구들이 놓여져 소박한 주인집의 생활단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웅희령은 어렸을 때부터 이 창고에서 노닐면서 맷돌질하고 곡물을 쓿어 겉껍질을 벗기거나 빻아서 가루를 내는 기술을 연마했다고 합니다. 정문과 마주한 본채에는 웅희령의 사진이 걸려 있고 그 아래 반신상이 세워져있습니다. 본채 옆 거실에는 웅희령이 사용했던 침구와 책상, 걸상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낮다란 나무천정아래 네 기둥과 한 개 널판자로 이어진 침대는 삼면이 흰 천으로 둘러쌓였고 침대위에는 베개와 이불들이 놓여져 있습니다. 침대와 마주한 곳에는 책상과 걸상이 있고 벽에는 웅희령의 삶의 궤적이 담긴 사진들이 걸려있습니다. 이곳에 전시된 웅희령의 유품들은 웅희령이 걸어온 인생의 발자취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발자취를 따라서 그의 이야기에 귀기울여 봅니다.

1870년 웅희령은 봉화고성의 이 아담한 사합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출생에 대해 봉황고성 민간에는 신기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웅희령이 태어난 날 밤 그의 울음소리는 모든 거리에 울려퍼질 정도로 컸다고 합니다. 이웃들은 모두 웅씨네 집을 찾아 축하하면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큰 걸 보아 필히 큰 일을 해낼 인재"라고 했습니다. 게다가 그날밤 웅희령옛집 거리에는 온통 은은한 향기가 퍼져 이웃들은 웅희령이 반드시 청렴한 관원이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고 합니다.

웅희령은 천부적으로 총명하고 지혜로워 일찍 6세 때 벌써 "삼자경(三字經)"을 3, 4일만에 외워내는 '호남신동(湖南神童)'으로 일컬어졌습니다. 서당에서 공부할 때 스승은 "꽃을 화분에 심어 춘추 소식을 알아보노라"라는 시구를 지어 제자들에게 뒷구절을 맞추게 했습니다. 어린 웅희령은 잠간 사색에 잠기더니 "연못을 파 천지의 차고 기욺을 보노라"고 답했습니다. 대구적인 내용과 운율적인 구성에 스승은 그를 나라를 다스릴 인재라고 감탄해마지 않았습니다.

스승의 예언처럼 웅희령은 1894년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한림원서길사(翰林院庶吉士)로 낙점, 1913년에는 민국(民國) 제1대 총리(總理)로 선출되었으나 원세개의 복벽에 반기를 들고 사직했습니다. 그 후 웅희령은 자선(慈善)과 교육사업(教育事 業)에 매진해1920년에 향산자유원 (香山慈 幼院)을 창설했습니다. 원장직을 담임하면서 웅희령은 고아와 가난한 어린이 천여명을 입양했습니다. 1931년 "9.18"사변으로 상해가 함락된 후 웅희령은 적십자회 회장 신분으로 임시병원 4곳, 난민수용소 8곳을 세워 상병 천여명과 난민 15만명을 구제했습니다. 1937년 12월 25일 이 풍문인물은 홍콩에서 타계했습니다. 그때 국민정부는 웅희령을 위해 인산을 치렀다고 합니다.

주은래 총리는 "웅희령은 원세개시대의 제1류 인재이고 내각총리"라고 하면서 "웅희령의 일은 잘 기억하고 있다"고 높게 평가했습니다.

봉황고성의 산수는 세상의 불의에 분개하는 웅희령의 강직한 성격을 키워주었고 묘족전통교육은 그에게 착하고 베풀줄 아는 천성을 가르쳤습니다.

수려한 풍경과 고즈넉한 정취로 마음마저 차분해지는 봉황고성, 애국과 자선으로 인생을 수놓은 명인 웅희령의 옛집이 있어 이 안일함속에 따뜻함마저 스며있는 것이 아닐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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