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결합의 세계에도 분명 궁합이 존재한다. 《폼을 잡고》 《무드를 잡고》 《기회를 잡고》 《트집을 잡고》 할수는 있어도 이들을 쥘수는 없는 일이다. 손은 잡을수도 있고 쥘수도 있는데 말이다. 문법적으로 해석이 안되는 탈문법현상, 우리 말에 어디 이뿐이랴. 《새까만 후배》는 있어도 《하얀 후배》나 《파란 후배》는 있을수 없고 《새파란 나이》에 《새빨간 거짓말》은 할수 있어도 나이가 새파랗고 거짓말이 새빨갛게 될수는 없다. 《이야기꽃을 피운다》고 노래와 춤의 꽃을 피울수는 없는 일이고 이야기꽃을 본 사람도 없다.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심심한 사의》를 표할수는 있지만 박수가 뜨겁다면 큰 일이고 사의가 심심하다면 이상하다. 《침묵》도 마찬가지다. 침묵이 무거운것이 아닌데 우리는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고 한다. 궁합이 맞아야 할뿐만아니라 한번 결합한 단어들이 돌아눕거나 얼굴을 돌리기만 하면 다시 재결합하기가 힘드니 우리가 살아가는 사람세상과도 비슷한데가 있는것 같다. 사람세상이라니? 인간세상이지.

그렇지만 지금은 21세기, 마음이 맞으면 그만이지 민족이 다르면 어떻고 궁합이 무슨 상관이랴. 두개의 단어가 합쳐 하나가 되면서 곧바로 제2세가 생산되는 급변하는 시대요 스피드 시대다. 짜장면과 스파게티가 섞이면 짜파게티, 쫄면과 떡볶이가 볶이면 쫄볶이가 된다. 탁주와 막걸리는 탁걸리요, 옥스퍼드에 캠브리지는 옥스브리지, 오피스에 호텔은 오피스텔이요, 밍크에 비키니는 밍키니. 고유어에 한자어에 외래어 가리지 않고 전통적인것도 민족적인것도 외래적인것도 따로 따지지 않는 세상이다.

그래도 이런건 약과다. 1대 1의 결합이니 정조가 있고 지조가 있고 절개가 있다고 할수 있다. 어디 《먹다》라는 이 동작동사 하나를 보기로 하자. 역시 플레이보이 기질이 다분하다. 우선 돈을 먹기 좋아한다. 공금을 먹고 뢰물을 먹고 중국돈이든 한국돈이든 딸라든 유러든 가리지 않는다. 게다가 마약도 먹는다. 이때문에 골탕을 먹은것이 어디 한두번이던가? 욕을 먹고나면 겁을 먹기도 하지만 곧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마음만 먹으면 먹기 좋아하는 병을 못고칠리 없을텐데. 머리는 좀이 먹은지 오래되고 이젠 귀까지 먹어서 막무가내다. 그래도 나이 먹는것은 싫어한다. 오래 사는것을 좋아하면서도.

어디 《먹다》뿐이던가? 《보다》도 오십보 백보다. 우선 상대방의 맥을 보고 병을 보는체하면서 병주고 약주고 한다. 물론 관상을 보는것을 잊지 않는다. 기회를 보고 시기와 때를 보아 효험을 봄직한 처방 하나를 떼여본다. 몸은 사무를 보고 업무를 보는 책상앞에 있어도 마음은 회계 보는 일에 가있다. 인정사정 보지 않고 체면도 보지 않는다. 흉을 보는 일에 선수요 비위 맞춰 술상을 보고 잠자리도 보아준다. 결과를 보면 리득을 보기도 하지만 랑패를 보고 손해를 보고만다. 그때 가서야 타협을 보고 협의를 보길 바라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새서방을 보고 씨앗까지 본 마당에 어찌 합의를 볼수가 있겠는가? 심판을 볼 일만 남은것을. 선을 본 자식잔치를 보기로 했는데 사위 며느리를 언제 보며 손자 손녀를 언제 보랴. 흘리나니 눈물이요 후회하나니 한숨뿐이다. 대소변도 제대로 볼수 없는 신세.

보기 싫은것도 많은 세상, 아양 떨고 내숭 떨고 애교 떨고 호들갑 떨고 오도방정 떨고 너스레를 떨고, 고집 부리고 욕심 부리고 강짜를 부리고 말썽 부리고 까탈을 부리고 억지를 부리고 심술 부리고 객기 부리고 수작 부리고 행패 부리고 술수를 부리고 딴전을 부리고, 거드름 피우고 바람 피우고… 어디 이뿐이랴. 가살 떨고 가살 부리고 가살 피우고 한다. 어휘 플레이보이는 이렇게 각양각색이다.

그래도 오직 그대만을 위한 일편단심파가 있어서 다행이다. 《솔솔》은 봄바람을 위해 불고 《휘영청》은 밝은 달이 삶의 전부요, 《뉘엿뉘엿》은 지는 해에 목숨을 건다. 의성어와 의태어중 대부분이 이 부류에 속한다. 꿈을 꾸고 춤을 추고 그림을 그리고 셈을 세는 반복어 역시 이 부류다. 일편단심파는 절개 높은 성춘향이요 갑돌이를 좋아하면서 시집가는 갑순이가 아니다. 그런데 이건 웬 일인가? 개페(開閉) 범주에 속하는 어휘의 결합은 어딘가 이상한 조짐이 보인다. 입을 다물고 눈을 감고 마개를 막고 뚜껑을 닫아보라. 그리고 그 반대로 해보라. 다물었던 입은 열수도 있고 벌릴수도 있고 막았던 마개는 열수도 딸수도 있다. 그리고 닫았던 뚜껑은 열고 또 좀 큰 뚜껑이라면 들수도 있다. 이렇게 닫을때 결합양상이 다르고 열 때 양상이 다르다. 이리 봐도 저리 봐도 변함이 없는건 눈뿐이다. 감았던 눈은 뜰수만 있을뿐 열거나 어쩔수 없다. 얼핏 보기에는 일편단심파 같아도 실은 아닌 《엉큼한》부류도 비일비재다. 일편단심이란 역시 그리 흔한것이 아닌가부다.

그러잖아도 많이 심심하던차 오늘은 계속 어휘의 일편단심을 찾아 사전려행이나 떠나볼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