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한 려비를 가지고 먼 려행길》에 나섰습니다.

막차가 기다리고있을줄은 뜻밖이였습니다.

오르고 보니 금세기 마지막 화려한 《세기호(世??)》였습니다.

한해를 보낼뿐인데 한세기를 선물 받습니다.

아무래도 행운아인가 봅니다, 저는.

그후 2001년 겨울호에는 《중국에서 날아온 글발》란을 내여 《애정전선소야곡》, 《달력앞에서》, 《겨울이여, 안녕!》 세 작품을 싣기도 했다. 물론 지금도 청탁원고는 숙제하는 기분으로 날자를 맞추군 한다.

《에세이문학》에서 내 필명은 최순이다. 필명하면 또 박연구선생님 이야기를 하지 않을수 없다. 필명을 하나 지어오라는 선생님의 전화를 받고 이리저리 생각을 해보았지만 별로 탐탁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순희라는 이름에는 분명 고리타분한 냄새가 풍긴다. 교과서나 론문 례문에서 철수와 순희가 빠지지 않을만큼 흔한 이름이기도 하다. 나는 이 이름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바꾸고싶을만큼 싫어하지도 않는다. 필명도 원래의 이름에서 탈피하고싶지 않아서 《최순이, 최수니》 정도로 생각을 잡고 약속대로 선생님을 찾아갔다. 필명을 뭐로 할거냐는 선생님의 물음에 《글쎄요》하는 신통치 않은 내 말을 듣고 선생님께서 먼저 《최순이》로 하면 어떻겠느냐 제의해주셨다. 어머나, 나는 크게 놀랐다. 《제 생각이랑 어쩌면 이렇게 일치할 수가 있습니까?》라는 말을 하고싶었지만 잘 참았다. 선생님께서 말씀을 이으셨다. 《순희라니 얼마나 촌스러워요? 순이면 몰라도》. 《선생님도 참, 저는 그래도 전통적이라고 생각하고싶었는데 촌스럽다니요?》 물론 이 말씀도 드리지 않았다. 이름뿐이 아니고 내가 원래 좀 촌스러운데가 있다는걸 스스로 잘 알기때문이다. 그런데 촌스럽기는 순희와 순이가 별로 다를바가 없었다.

이름이란 하나의 기호일뿐인데 부르기에 따라 천양지차를 보인다. 같은 물건이 고물단지로 되는가 하면 골동품이 되는것처럼 말이다. 믿어지지 않는다면 한가지 례를 들수 있다. 한국의 세계적인 패션디자이너 앙드레 김, 그의 이름은 그의 의상만큼이나 화려하다. 앙드레 김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이는 그의 본명이 아니다. 본명은 김봉남. 이 얼마나 고전적이고 전통적이고 민족적이고 또 촌스러운 이름인가.

한국어를 공부하는 중국 학생들 이름을 살펴봐도 가지각색이다. 양파, 오이, 고추, 당근, 두부와 같은 료리재료에다가 후추 등 양념 같은 이름, 구정, 신정 같은 명절 이름에다가 노염, 아매, 손목, 손가락이라는 이름, 중국어로 부를 때는 다 남자답고 녀자다운 이름들이 한국어로는 이렇게 의미가 외곡되고 전이된다. 지어는 한국어로 부를수 없는 이름까지 있어서 정말이지 난감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각설하고, 에세이문학과 박연구선생님과의 인연으로 그리고 수필을 좋아하는 남편의 영향으로 나의 《외도》는 오늘까지 이어져 어느덧 수필집을 출판하기에 이르렀다. 그사이 운이 좋아서 제1회 재외동포문학상 수필상 입상에 윤동주문학상, 도라지문학상도 수상하는 영예를 안게 되였다. 그런데 상을 받은후로는 글을 별로 쓰지 못했다. 몇편의 글도 원고청탁 마감날에야 겨우 보내군 해서 편집자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미안한 마음에 다음에는 절대 원고청탁에 응하지 말아야지 다짐했건만 이번엔 그만 《이달의 문인》으로 선정되고 글 쓸 시간이 한달이나 된다는 유혹에 덜컥 허락을 하고말았던것이다.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후회하지만 막급이다. 분명한 사실 한가지는 해명을 해야 마음 편할것 같다. 남편때문에 전도유망한(?) 녀성 수필가 한사람이 매몰될번했다는 사실, 내가 그렇게 여러차례나 명예회복의 기회를 주었건만 남편이 전혀 인정해줄 기미를 보이지 않는지라 오늘 부득불 만천하에 공개하기에 이르고만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수필쓰기는 집짓기와 비슷한 작업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어휘라는 한장 한장의 벽돌로 내가 그린 설계도에 따라 요리조리 쌓아가는 즐거운 과정이다. 내가 쓴 수필에는 고상하고 심오하고 비판적인것이 별로 없다. 그보다는 일상적이고 생활적인것들이 주를 이룬다. 만약 기어이 어떤 전투적이고 현실 비판적인 경향이 첨부되여야 한다면 나는 내가 지은 집꼭대기에 훨훨 휘날리는 기발을 꽂거나 총과 붓, 낫이 겹쳐진 그림이라도 조각해넣거나 해야 할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결국 전투지휘소 비슷한 다른 건물로 전락된다. 사랑방 안채에서 《앞으로 돌격!》 한다면 만화 한 장면이 되기 십상이다.

콩크리트로 도배된 도시공간의 빌딩과는 다른, 작고 아담한 집을 나는 짓고싶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내 글, 내 집의 설계자이고 건축가이다. 그러나 설계자라든지 건축가라든지 하는 고급직함의 《자》나 《가》 하고는 거리가 멀다보니 아담한 집을 짓느라고 애면글면했는데 결국 재간 부족으로 여기저기 어설픈 구석들이 내가 보기에도 민망하기만 하다. 지극히 사적인 공간까지도 몽땅 로출하는 어리석음도 자초하고말았다. 남편을 자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보는 이들을 식상하게 만들었고 남편이 사생활침해 운운해도 나로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게 되였다. 나의 인맥이나 인간관계가 넓지 못한 연고로 무대에 나서줄 사람이 몇몇 안되니 어쩔수 없는 일이다.

사실 집이라고 지어놓고보니 이곳 저곳 손을 보고싶은 곳도 많고 헐어버리고싶은것도 있지만 민속촌에 남아있는 오두막처럼 그냥 두기로 했다. 그래도 혹 내가 지은 오두막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는 이들이 있고 가끔 돌 하나라도 독특하고 예쁘다고 칭찬해주는 이들이 있어서 힘든줄 모르고 한채 또 한채 짓는 어리석음을 반복하고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 않는가? 더는 봐줄수 없으니 이젠 제발 물러나달라고 하기전까지는 아마 이 일을 계속하지 않을가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