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균 선

불타는 저녁노을에 아무 감응도 없는 사람이 있을가? 그만큼 많은것을 상징하고 많은것을 생각하게 하는 하늘의 경관이니 말이다. 한낮 구만리 창천을 질주하며 빛과 열로 대지를 축복하다가 또 하루가 저물어 래일을 기약하는 해님의 상서로운 미소일수도 있고 다하지 못한 사랑이 아쉬워 하늘가에 쓰는 석별의 편지일수도 있다.

무릇 노을은 좋기만하다. 아침노을은 비가 온다는 하늘의 예고요 저녁노을은 좋은 새 날로 이어진다는 하늘의 편지이다. 아침노을이든 저녁노을이든 노을은 예이제 너무 좋다. 아침노을이 희망의 서광이라면 저녁노을은 애수에 젖은 상념의 후광이라고 할수 있으리라.

향촌에서 농사짓던 그 시절, 긴 그림자를 끌고 일밭에서 돌아오다가 산언덕에 퍼더버리고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속절없는 휘파람을 많이도 불었다. 사랑은 말이 없고 청춘은 시들어서 애?기만 하던 마음을 노을에 적어보기도 했다.

동산에 고운 아침노을은

내 희망의 서광이라오

그대 창문을 여시라

눈부신 황금빛 내 사랑

한아름 넘치게 쏟아져들리라.

서산에 타는 저녁노을은

내 정열의 잔광이라오

그대 창문을 닫지 마시라

다할길이 없는 내 사랑

꿈자리 포근히 보듬어주리라.

지금은 늙어서 지각한 사랑같은 저녁노을이 더구나 좋아졌는지 모른다. 때때로 인생의 막바지에 사무한신으로 주저앉아 락일의 철학을 음미하면서 노을의 의미를 자세히 읽어본다. 그저 랑만의 풍경선인줄 알다가 노을의 진실을 파헤쳐보니 사색이 펄쩍 놀란다. 노을은 하늘가에 먼지가 특별히 많은 날에 생긴다고, 공기중에 떠있는 먼지는 그 파장이 짧은 청색계층은 돌려보내지만 파장이 긴 적황색계층은 그대로 통과시키기기에 하늘이 붉게 물든것처럼 보인다고, 빈사(瀕死)의 역할을 하는 하늘먼지가 많을수록 노을은 더욱 붉고 아름다워진다고 어느 책에 씌여있었거늘…

참으로 사이비진실이다. 대저 몰라도 좋을것을 굳이 알고나면 신비감이 곧 사라지고 허무함을 보듬으며 허위로 가득찬 삶의 현장을 다시 둘러보게 된다, 석양의 본의가 아니게 인간세상에서 올려보내는 끝없는 먼지, 수증기와 기체분자의 걸작인 노을, 먼지가 란무하는 진실의 결과가 곤혹스럽지 않으랴, 더러운 먼지가 많은 날 더욱 붉고 아름답다는것이 얼마나 불가사의하고 아이러니칼한가?

인간세상을 티끌세상이라 한다. 시끌벅적한 인생현장에서도 해가 비치니 먼지도 빛나는 가관애 개탄이 아니 나올수 없다. 인간의 삶을 껄끄럽게 만들고 온갖 비리와 불안과 공포를 몰아오는 먼지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럴때 각자의 가슴에 노을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설가?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인다는것은 슬픈 일이 아닐수 없다. 탐욕과 권력욕과 폭력의 론리로 일그러진 무늬들이, 짐승에 다름없는 삶을 거부하는 모순된 인간정신이 눈부시게 아로새겨진다는 현실, 그것은 노을이 우리에게 내주는 철학이고 감응의 지혜이다.

그러나 노을의 철학과 지혜가 그 정도에 머물지 않는다. 노을은 먼지가 많으면 많을수록 찬란하게 아름답다는 역설에 대한 해석은 제나름이겠지만 노을이 제시하는 철학만은 가볍게 해석할수 없으리라. 노을의 진실은 미묘하다. 노을의 론리대로라면 세상이 더러우면 더러울수록 아름다움이 과시되는것이다. 마치 부정과 비리우에 앉아 떵떵거리는 위군자들이 많은것처럼 말이다.

모두가 홍진세계에서 뒹굴거늘 누구의 마음에나 먼지가 다다소소히 들어앉기마련이다. 물욕이라는 먼지, 명예욕이라는 먼지, 권세욕이라는 먼지, 정욕의 방종이라는 먼지…먼지투성이인 우리의 심령이다. 번쩍이는것이라 해서 다 금은 아니지만 심령의 골방에 먼지가 많이 쌓인자가 빛나고 많이 가진자가 인격자로, 생활의 강자로 부상되니 참으로 세상은 구름이요 인간은 티끌이라 그래서 홍진세계이라.

목숨마저 내대는 인간의 탐욕심은 어느 간이음식점에 식단만큼이나 간단한것이다. 두부청하면 두부가 나오고 명태찜을 주문하면 명태찜이 나오듯이 욕망이 실현되는것은 아니지만 가지고싶다는 그 한가지만은 식단과 다를것이 없다. 만족하다고 금을 그으면 만족할것이요 불만족하다고 무작정 파고들면 미궁으로 되는것이다. 한세상을 살고보면 자기에게 속한것이란 티끌만큼도 없는데 넘치도록 가지려한다. 너무 가지면 천심이 용납안하고 고무풍선같은 욕망을 한정없이 불구고나면 터지고마는데…

그래도 소망을 품고있을 때가 좋다. 저녁에 새 날을 기리는 마음처럼 말이다. 무어나 다 가진후에는 그 이상 더 좋아질수 없지 않은가? 원하는걸 못가져 앙탈하다가 가지고나면 권태를 느끼는 인간은 참으로 별것아닌 욕심이 지나쳐 행복해지기 어려운것이다. 창망한 하늘과 땅 사이에는 문도 없고 담장도 없으니 오고감에 형체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초로같은 인생에 삶의 자취는 허무한데 어느것이 내것이고 어느것이 남의것인가? 그래서 유희같은 인생마당에서 너무 진지하게 대할것은 하나도 없다고 하는것이다.

그토록 가지고 싶던것을 일단 가지고나면 뒤따르는것은 일상이요 그 다음은 심드렁이다. 인간이 태생적으로 욕심덩어리로 되였으니 류행어처럼 마음이야 어찌 싹 비울수 있으랴만 마음에 낀 먼지만큼은 수시로 털어버리고 부담없이 살아갈 가능성은 각자 자신에게 달린것이다.

먼지를 매개로 그렇듯 이채로운것일진대 노을의 진실은 인생의 어떤 진실이기도 한것이다. 약자의 부러움을 자아내도록 삶을 영위하고 있는 강자들 모두가 노을처럼 먼지의 덕이라고 말할수 없지만 확실히 먼지가 많이 들어앉은 령혼을 가진 사람들이 노을처럼 선망의 눈길속에서 내노라 으쓱하는 이 시대의 현실이기도 하다.

이 저녁, 찬란함으로 먼지의 래력을 감추고 보란듯이 꽃피여있는 노을의 진실을 투시하느라니 마음속에도《노을》이 꽃펴난다. 한갑자를 넘어 살아오면서 겪은 그 많은 좌절과 실패와 저질렀던 숱한 잘못과 까닭모를 죄의식을 떠올리며 노을같은 부끄러움이 얼굴에 비끼고있음을 느낀다.

저녁노을은 곧 스러질것이다. 그 눈부심을 어둠이 지워버린다. 내 인생에 아쉽고 후회스러운것들도 지워버릴 지우개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가? 쌓이고 쌓여 돌처럼 굳어진 리욕의 먼지를 늦게나마 털어버리고 도움이 절실히 수요되는 많은 약자들에게 박애의 따뜻한 마음을 가진다면 내 인생의 노을뒤에 남는 재빛이 거두어질수 있을가?

때때로 서녘하늘을 장엄하게 물들이는 노을을 바라볼 때마다 힘차게 솟아오를 아침해를 내 마음의 언덕에 먼저 떠올린다. 락조가 피워올린 저녁노을은 내 마지막 욕심이자 꿈일지도 모른다. 아침해는 이제 나의 몫이 될수 없다. 일찍 아침해를 바라보며 인생의 저녁해를 예상하지 못한 그 어리석은 욕심이 우스울뿐이다.

저녁노을은 눈부시여도 단명하다. 해가지면 먼지도 더 빛날 일이 없듯이 먼지로 득세한 사람도 나중엔 노을처럼 어둠속에 묻혀버릴것이다. 역시 홍진세계에 티끌같은 우리네 인간이 아니겠는가? 자신에게 조용히 묻고있노라면 운치가 넘치는 시 한수가 가슴에 살폿이 안겨든다.

티끌세상에 묻혀 놀다가

풀집에 한가히 홀로 눕네

사립문 저녁 향해 열렸고

노을은 불과 같이 붉구나